* * *
솨아아아…….
재수 없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온은 제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비가 내림에 따라 플레이어가 있는 지역의 기온이 떨어집니다. 궂은 날씨에 플레이어의 사망 확률이 1% 올라갑니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5%입니다.]
이온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가시는 것을 보고는 에렌스트 경이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조금만 걸으시면 됩니다.”
이온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찰박, 찰박.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어느새 고요해진 뒷골목에 울려 퍼졌다.
“하필 이런 날을 골라 북부로 출발하다니 재수도 없군요.”
에렌스트 경은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살며시 올려다보며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이온은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황제를, 말하는 거야?”
“……변경백에게는 왜 갑자기 찾아가는 걸까요.”
“죽기 전에는 사람이 변한다고 하니, 그 속이야 아무도 알 수 없지.”
왜인지 날카로운 그의 말투에 에렌스트 경이 조금 눈치를 보았다. 이어지는 이온의 음성엔 약간의 비웃음마저 배어 있었다.
“황위를 사생아에게 넘겨주지는 않을 테니 어차피 바뀌는 것은 없어. 하, 곧 버니언, 그 망나니 녀석의 세상이 오겠지.”
중간의 숨소리는 단순히 숨이 차기 때문에 난 것이었지 아니면 웃음소리였는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다만 유난히 냉소적인 그 태도에 에렌스트 경이 조심스레 물어 왔다.
“혹시, 도련님께서는 다른 대의를 품고 계십니까?”
이온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대의라.’
버니언이 재수 없었고, 그 자식이 황위를 물려받으면 틀림없이 나라를 말아먹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런 거창한 생각은 한 적 없었다.
그저…….
〈내가, 내가 널 지킬 기회를 줘, 이온.〉
스스로를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했을 뿐이었다. 더는 남에게 기생하여 살지 않겠다며.
“…….”
“도련님?”
“그런 게 있을 리가. 난 저주가 풀릴 때까진 내일 살아 있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 외의 생각을 하는 건 나한텐 사치야.”
이온이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에렌스트 경은 제가 실언했음을 깨닫고는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그 모습을 곁눈으로 확인한 이온이 가볍게 물었다.
“이런 말을 굳이 내 입으로 듣고 싶었어?”
“죄송합니다, 도련님.”
“죄송할 일까지는 아니니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보다 길은 얼마나 남았어? 꽤 걸어온 듯한데.”
“여기, 이 길에서 꺾어 몇 블록만 더 가면 됩니다.”
이온은 에렌스트 경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걸었다. 비가 내려 추워진 날씨 때문에 이온의 기침이 더욱 심해질 무렵에야 그들은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었다.
미리 구해 둔 표를 가지고 들어서니 단차가 있는 좌석들이 죽 배치된 가운데, 정중앙에 빛으로 밝힌 무대가 자리한 것이 보였다.
잠깐의 유희를 얻으려 기꺼이 돈을 내고 들어온 자들을 위해서 한 마법사가 공연을 펼치는 중이었다.
공연은 다소 기괴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이 더 열광한다는 이상한 공연이었다.
때마침 마법사가 외쳤다.
“자, 여러분! 이제 이 사람의 잘린 팔이 새살 돋아나듯 새로이 나올 겁니다!”
“와아아아아아!”
맨 끝에 서서 지켜보던 이온은 마법사 옆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가, 에렌스트 경에게 물었다.
“인체 개조는 금지된 마법 아니었나?”
“마탑 외에서는 금지되었죠. 그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상위의 마법입니다. 적어도 이런 길거리 공연자가 선보일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회복 마법은 여타의 공격이나 방어 마법보다 훨씬 더 깊은 지식을 요구했다.
특히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신체를 회복시키려면 단순히 겉보기만 좋게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흐르고 있던 마나의 흐름까지 완벽하게 복원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마법을 행하기 전, 예의 공연 마법사가 한 손에 붉은색 물약이 든 병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이온은 희미하게 웃었다.
“저거군.”
“네, 저걸 사용하면 주변 마나의 흐름이 기이해진다고 들었습니다.”
“당장 확인해 봐야겠어.”
“예, 걱정 마십시오. 금방 손에 들어올 겁니다.”
난리가 난 것은 에렌스트 경의 입에서 확신 어린 말이 나왔을 때와 거의 동시였다. 마법사의 옆에 있던 도우미가 돌연 그의 손에 들린 물약을 빼앗은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행위에 마법사가 놀란 사이 그 도우미가 무대 밖으로 뛰쳐나왔다. 놀란 관중석의 사람들이 밀물처럼 도망가기 시작하면서 건물 안은 순식간에 난리 법석이 되었다.
이온은 그 모습을 확인한 것을 끝으로 이곳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양 뒤돌아섰고, 에렌스트 경이 그런 그를 뒷문으로 안내했다.
후둑, 후두두두둑.
밖으로 빠져나오자 빗물이 다시 후드를 쳤다. 그러나 이온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의 물약이 제 손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또 다른 소란이 일었다. 에렌스트 경이 위험을 감지하고 이온을 건물 뒤편으로 이끌어 몸을 숨기자마자 엄격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황실의 명을 받고 온 노아 기사단이다! 여기 있는 자들을 모두 체포하겠다!”
“……!”
이온이 벽에 붙은 채로 입구 쪽을 살며시 살폈다. 그러자 노아 기사단이라고 외친 이들의 선두에서 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단정하지만 사나워 보이는 인상에, 거대한 체구가 눈에 띄는 남자.
그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이온의 머릿속에 선명한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크레이거가(家) 소공작님, 저는 노아 기사단 소속의 아스타틴 딜런 부단장입니다.〉
그리고 작게 코웃음 치던 여유로움까지…….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내였다.
이온의 입에서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스타틴…….”
에렌스트 경도 상대를 알아보고는 고개 내민 이온의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명백히 보호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아무래도 약병을 받자마자 서둘러 몸을 피하셔야겠습니다, 도련님.”
“알겠어. 괜히 번거롭게 됐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지붕에서 뛰어내려 왔다. 무대에서 약병을 가로챈 이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마 관중석에 심어 두었다는 이인 듯했다. 그는 이온에게 직접 약병을 건네었다.
“여기 있습니다.”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약병을 받아 들었다. 직후에 에렌스트 경이 이온을 안아 들려고 자세를 취했을 때였다.
“도망가는 건가?”
“……!”
이온과 에렌스트 경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지붕 쪽으로 향했다. 노아 기사단의 부단장인 아스타틴 딜런이 그곳에 있었다.
‘벌써?’
마치 다 예상했다는 듯 너무 빠르게 쫓아왔다. 혹시 함정이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찰나에 아스타틴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뒤를 밟았던 사내의 명치를 쳐 단숨에 쓰러뜨린 그가 이온에게 다가서려 하자 에렌스트 경이 곧장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이온은 에렌스트 경의 뒤에서 약병을 쥔 채 아스타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상태 이상: 적의]
비가 와서 실로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무리 후드를 뒤집어썼어도 대낮의 햇빛에 제 초록색 눈과 밀빛 머리가 선명하게 보였을 테니. 그랬으면 누군지 들켰을지도 모른다.
아스타틴은 제 앞에서 칼을 뽑은 에렌스트 경 너머의 이온을 똑바로 보며, 특유의 중저음으로 물었다.
“그대는 라치크 길드의 소속이겠지?”
“…….”
묻는 형태였으나 실제로는 질문이 아니었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군.”
[아스타틴 딜런이 플레이어에게 옅은 적의를 느낍니다.]
[현재 플레이어가 생존할 확률은 29%입니다.]
어째서 ‘옅은’ 적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등장과 함께 사망 확률이 위험 수위에 근접해 갔다.
그렇지만 이온은 자신의 기사인 에렌스트 경을 믿고 그 자리를 지켰다.
카강!
에렌스트 경과 아스타틴 부단장의 검이 거세게 맞부딪쳤다. 기기긱,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잠시 힘겨루기를 하다가 에렌스트 경이 먼저 검을 흘려 냈다.
아스타틴은 무기 없이 서 있는 이온을 잡아 내고 싶은 눈치였으나 에렌스트 경이 가만두지 않았다. 그가 이온 쪽으로 향하려는 아스타틴의 몸짓과 검의 진로를 몇 번이나 막아섰다.
까앙!
검을 강철 건틀릿으로 막은 에렌스트 경이 손의 방향을 틀어 아스타틴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격투에도 제법 자신이 있는 듯 역시나 반대쪽 팔로 막아 낸 아스타틴이 이어 다리를 휘둘렀다.
퍼억, 하고 제법 강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다리가 어깨 높이에서 교차했다. 그리고 비틀거린 쪽은 아스타틴이었다. 에렌스트 경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칼을 휘둘러 그의 목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