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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40)화 (40/317)

생각보다 이른 결론에 아스타틴이 당황한 것도 잠시, 딱히 죽이는 데는 목적이 없었던 에렌스트 경은 뒤로 물러나며 이온을 한 팔로 안았다.

도망치려는 것을 눈치챈 아스타틴이 벼락처럼 외쳤다.

“서라!”

그러나 에렌스트 경은 이온을 안은 채 마나의 기운을 써 지붕으로 도약했다. 부단장의 외침에 뒤늦게 몇몇이 건물 밖으로 나왔으나 둘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에렌스트 경은 지붕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점점 멀어지는 거리를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앞으로 주의하셔야겠습니다, 소공작.”

이온은 그러겠다는 대답 대신 웃으며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 알렉.”

“……더는 주군을 지키지 못하는 기사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응, 믿음직스러워.”

에렌스트 경이 희미하게 미소를 그리다가 이온의 흠뻑 젖은 망토를 보고는 한마디 했다.

“저택엔 아무래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셔야겠습니다.”

안 그래도 조금씩 하얀 입김을 내뱉기 시작한 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러고 아직 열지 않은 약물 병을 꼭 쥐었다. 안의 붉은색 액체가 제 저주를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껏 그 어떤 약물을 삼켰어도, 효과는 마나석 하나만 못했다.

이온은 제 옷 안에 걸린, 누군가의 피를 쏟아 만들었을 마나석의 존재감을 느끼며 이를 꽉 물었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의 재회(2/3)]

8년째 멈춰 있는 퀘스트 수행 횟수를 이온이 지그시 노려보았다.

언젠가 이루어지긴 하는 걸까?

다만 나의 삶은 여전히 네 건넨 호의와 희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수년간 스스로가 쌓은 안전장치 속에서 다행히 목숨은 건져 놓고 있지만…….

완전한 답은, 아직이었다.

* * *

우어어어어어!

1년 내내 겨울인 아이오딘. 그곳에 위치한 삼면의 산을 울리며 우렁찬 소리가 퍼져 나갔다.

아이오딘의 북쪽에 사는 몬스터들이 긴 시간의 굶주림으로 인해 마침내 우두머리인 거대 오우거의 뒤를 따라 내려온 지 고작 3일. 그 최후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얼음 창들이 오우거의 전신에 꽂히며 검은 피가 온통 눈뿐인 하얀 땅을 적셨다.

쿠구궁!

이내 얼음 창이 녹아내리고, 거구가 쓰러지자 땅이 흔들렸다.

아이오딘의 주인인 변경백 카밀루스 클로델은 그렇게 제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몬스터를 무표정하게 확인하고는 뒤돌아섰다. 그러자 숨죽여 일전, 아니 다소 일방적인 사냥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역시 대단하셨습니다, 각하!”

“이번에는 크게 당했으니 앞으로 또 한동안 조용하겠네요.”

여러 사람들이 입에 발린 칭찬을 하는 가운데, 카밀루스는 부관인 페드로가 걸쳐 주는 털 망토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성을 향해 걸었다.

그의 뒤를 따라온 기사들은 각자 사냥한 짐승들과 몬스터의 시체를 수레에 싣기 시작했다. 그들은 방금 막 사냥한, 오우거 중에서도 유난히 큰 녀석을 조각 내며 환성을 질렀다.

“이 녀석 한 놈이면 적어도 200명은 먹겠어.”

“이런 게 저절로 굴러들어 왔으니 재수도 좋지, 하하…….”

뒤에서 신나서 떠드는 소리를 듣다가 걸음을 멈춘 카밀루스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서둘러 챙기고 돌아가지.”

“예, 예, 각하!”

짧은 문장을 내뱉는데도 하얀 입김이 흘러나오고, 입가가 얼어붙을 것 같은 날이었다.

그러나 아이오딘에서는 이런 날씨가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오브라이언 제국에서 가장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아이오딘. 땅덩어리는 넓지만 극한의 환경 때문에 사는 인구는 고작 천여 명밖에 안 되는 소도시였다.

카밀루스가 온 뒤로 인구가 조금 늘긴 했어도, 그저 그가 수도에서 데려온 기사들과 그 가족들의 머릿수가 보태진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그를 따르는 기사들은 처음엔 오브라이언의 황제, 그러니까 카밀루스의 아버지가 그를 감시하기 위해 붙인 기사들이었지만 몬스터와의 수없는 전투는 그들에게 묘한 유대감을 주었고, 마침내 온전한 동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카밀루스는 빨리 가자고 해도 저희들끼리 고기를 먹을 생각에 신나서 떠들어 대는 아이오딘의 기사들을 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다 한 가지가 생각나 자신의 옆에 있는 페드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도착하시기까지 이제 이틀 정도 남은 건가?”

“그렇습니다, 각하.”

카밀루스의 발이 다시금 하얀 눈밭에 자국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제 꼬맹이 딱지도 뗀 스물넷이었다. 그동안 키가 커지고 수없이 빙산을 오르내리며 사냥을 해 댄 덕에 근육이 붙어 이제 몸무게도 제법 나갔다. 그에 짓눌린 눈이 뿌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깊게 파였다.

카밀루스가 생각에 잠긴 듯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만 있자 페드로가 질문을 해 왔다.

“폐하께서 갑자기 아이오딘으로 오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카밀루스가 고개를 들었다. 황가의 피를 타고났다는 증거인 짙은 파란 눈이, 하얀 바람에 휩싸인 아이오딘의 성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글쎄, 죽을 만큼 몸이 아프니까 박대했던 아들이 떠오른 모양이겠지.”

실제로 황제는 그를 늘 이중적으로 대했었다. 저를 죽이지 못해 안달을 내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때로는 지극히 사랑스러워하는 눈으로 보았고, 북부로 쫓아내면서도 결코 맨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래, 착하구나.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 자작에게 아이오딘 일대의 영지를 내리고 변경백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겠노라. 그 척박한 땅을 지키기 위해 황도를 떠나는 그대의 등 뒤에 오브라이언의 모든 기사들이 경의를 표할 것이다.〉

실제로 그때의 선언은 말뿐이 아니었다. 카밀루스가 황도를 떠날 적에 황실 기사단인 그레나 기사단과 노아 기사단의 모든 기사들이 직접 황성의 문을 열고 양옆에 도열하여 황제의 사생아인 그의 떠나는 길을 지켜보았다.

황제는 비록 그 자리에 없었으나 카밀루스가 황성을 벗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태양궁의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쇼 때문에 누군가는 황제의 복심이 카밀루스에게 있는 게 아니냐고 수군대기까지 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후 카밀루스를 전혀 찾지 않았다. 심지어는 흔한 서신 한 장 스스로의 이름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에게 용건이 있다고 해도 언제나 재상의 입을 통해서만 전했다.

심지어 1년 전, 마지막으로 보낸 서신의 내용은 이랬다.

황제의 적통으로서 대를 이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아들은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뿐이니 그에게 자신이 쓰고 있던 영광의 관을 비롯한 모든 것을 물려주고, 혼외자인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은 변경백의 지위를 세습 작위로 하여 그 아들 혹은 딸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처리하라 선언하셨습니다.

이러한 뜻을 오브라이언 제국을 수호하는 태초의 존재인 블랑셰의 앞에서 전하노니, 이 시각 이후로 바뀌지 않을 금과옥조로 여기라 하였으므로 변경백께서는 이러한 폐하의 뜻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병상에 누운 뒤 보낸 것이라고 했으니 아마 유언 비슷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돌려 이야기는 했지만 요는 네게 줄 것이란 알량한 세습 작위 하나뿐이니, 나머지는 탐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래 놓고, 다 죽어 가기 직전에 8년 내내 외면해 왔던 아들을 보기 위해 아이오딘행을 결정했으니 어찌 이중적이지 않다고 할 수가 있을까.

카밀루스는 제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도무지 황제의 속만큼은 훤히 알 길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한데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카밀루스를 벌써부터 헉헉거리며 따라온 페드로가 질문을 던졌다.

“폐하께서 그냥 얼굴이나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오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갖다 붙일 수 있는 합당한 이유가 있기나 한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짧은 대화를 하는 동안 그들은 금세 성문 앞에 도착했다. 선두에 선 카밀루스가 성루를 올려다보며 얼른 외쳤다.

“아이오딘의 변경백 카밀루스 클로델이 명한다! 몬스터 사냥을 무사히 마치고 왔으니 어서 문을 열고 기사들을 환영하라!”

“각하께서 오셨다! 성문을 열어라!”

내내 기다리고 있었는지 성루에서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오딘의 성문은 혹한에 얼어 버릴 법도 했지만 의외로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순조롭게 열렸다. 덕분에 카밀루스를 필두로 한 사냥 인원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그들이 성문을 지나자 즉시 주위의 공기 달라졌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추웠던 성 밖과 달리 카밀루스의 결계가 쳐진 성내는 비록 5도 안팎의 차이일 뿐이지만 비교적 온도가 높았다. 덕분에 결계를 지나는 순간 사냥을 나갔다 돌아온 기사들은 하나둘씩 한숨을 돌리기 시작했다. 약간의 온기가 주는,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기사들 중 누군가가 벌써 성루에서 말을 끌고 와 안장에 올라타는 카밀루스를 올려다보면서 농담을 던졌다.

“각하, 어서 돌아가서 잠이나 주무시죠?”

“잠이야 죽으면 평생 자는데 무슨 소용이야? 술을 마셔야지!”

“그래, 잠이든 술이든 좋으니 서둘러 돌아가지.”

카밀루스를 비롯한 기사들은 익숙한 일을 하는 듯이 즉시 성루에 맡겨 두고 갔던 말을 끌고 와 분주히 카밀루스의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마차에 성내의 사람들이 앞으로 며칠간 먹을 식량을 실었고, 그 뒤 각자 말을 타고 달리는 기사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거대 몬스터군이 왔다는 소식에 은근히 걱정했던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웃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이 평화로운 마을에 잠시간 먹거리가 가득한 축제도 열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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