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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41)화 (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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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가장 규모 있는 장소는 결국 영주인 카밀루스의 저택뿐이었다. 사냥을 성공한 기념으로 저택 전부를 개방하자 온 마을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곳곳에서 불이 피워지고, 무언가를 익히는 냄새가 풍겼다.

카밀루스는 제게 감사 인사를 하기도 하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건네기도 하는 이들 틈 속에서 한동안 버티다가 결국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온 참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카밀루스는 잠시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손에 든 잔을 기울이며 저녁에도 은은한 푸른빛을 뿜고 있는, 아이오딘 성에 쳐진 결계의 마법진을 올려다보았다.

황성의 결계를 떠올리며 모방하고, 제가 원하는 기능 몇 개를 더 추가해서 설계한 것이었다.

복잡한 마법진은 설계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고, 그만큼 막대한 양의 마나를 쏟아부어야 했다.

그래도 이 결계 덕분에 자신이 떠나도 아이오딘의 성내는 안전지대가 될 터였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카밀루스가 얻어 낸 결론은 카밀루스 클로델이라는 돌연변이의 몸이 드디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하고,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었다는 사실이었다.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몰라도 그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돌연변이든, 괴물이든. 자신에게 붙는 수식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카밀루스는 지금은 곁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난 후회 안 해.”

“누구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

갑자기 들려온 말에 카밀루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제 부관인 페드로가 시야 안에 쑥 들어오더니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손엔 와인 한 병이 들려 있었다. 멋대로 챙, 하고 카밀루스가 들고 있는 와인 잔의 립에 병의 입구를 맞부딪친 그가 찡긋 웃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해 보이셔서 따라왔습니다.”

그러고 병나발을 부는 페드로를 보면서 카밀루스가 쏘아붙였다.

“그럴 때는 가만히 놔둬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아저씨?”

부관이라고는 하지만 페드로와 카밀루스는 거의 삼촌과 조카 사이 정도의 나이 차가 났다. 갑작스러운 아저씨 호칭에 페드로는 헛웃음을 쳤다.

“안 듭니다, 각하. 이곳에선 서로 가족 없는 처지지 않습니까? 저는 그럴 때 누구랑 얘기해서 풀어야 덜 답답하거든요.”

“하아.”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 카밀루스가 실소를 흘렸다. 그런 자신을 정말 조카 보듯이 부드러운 눈으로 살피는 페드로를 향해 카밀루스가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런 느끼한 눈으로 보지 말고, 할 말 해.”

“폐하께서 오시는 것 때문에 그리 심란해하시는 겁니까?”

“없다고는 못 하겠군.”

“90퍼센트 정도의 영향력이라는 거네요.”

“아니…….”

제 말을 멋대로 해석해 버리는 부관을 카밀루스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래서 아저씨들은 못 당하겠어. 나이 들면 다 그렇게 돼?”

“설마요. 제가 특별한 겁니다. 항상 각하의 걱정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본분을 잊었어? 원래는 황도에서 날 감시하기 위해 따라온 거였잖아.”

“몇 년 지난 이야기를 하는 건 비겁한 짓입니다.”

“그래, 알겠어.”

카밀루스는 되지도 않는 농담은 그만 접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저택의 너른 정원에서 가족들과 웃고 있는 한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8년 전, 황제가 감시자로 붙인 기사들 중 몇몇은 고생길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굳이 아이오딘으로까지 따라왔었는데 저 일가가 그중 하나였다.

귀환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황제도 그 나름의 배려를 한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 배려가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기사들을 위한 것인지 조금 헷갈렸지만.

카밀루스는 어쩐지 부러움을 일으키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페드로에게 말했다.

“그래, 그대는 황도에 가족들을 두고 왔었지?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황도로 보내 줄게.”

그에 술을 홀짝거리던 페드로가 와인 병에서 입을 뗐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제가 각하를 두고 어딜 갑니까?”

“매번 말하지만, 난 이제 열여섯 어린애가 아니야.”

잘라 말하며 카밀루스는 페드로가 저를 처음으로 안아 주었던 어떤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혈육에 의해 타지로 추방되고, 이온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저를 향한 수많은 감시의 눈을 피할 수도 없이 매일을 살다 보니 이대로는 미쳐 가는 게 아닐까 싶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당시 가장 가슴 아파 하던 것이 바로 이 페드로였다.

그는 어느 날엔가 제 눈앞에서 몬스터에 의해 처참히 찢겨 죽어 버린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제 무능함에 좌절하며 오열하는 카밀루스를 보면서 같이 울며 속삭여 주었었다.

〈괜찮아. 그래, 괜찮아, 아이야. 이젠 이 아저씨가 널 지켜 주마. ……너에겐 죄가 없어. 죄가 없어.〉

그렇게 당시 카밀루스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해 주었던 그는 그날을 기점으로 카밀루스를 마치 아들 대하듯이 돌봐 주었었다. 그때부터 다른 기사들이 하나둘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니 조금만 과장을 보태면 그는 카밀루스에게 가족을 준 사람이었다. 게다가 페드로는 그의 힘을 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데도 카밀루스를 아직도 어린아이 취급했다.

“제 눈엔 아직도 불안합니다. 여태 장가도 안 가셨으니 어른이라고 하기도 이르고요.”

“장가?”

카밀루스가 중간에 나온 단어에 눈썹을 들썩였다.

“지금 나한테 그런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건가?”

그러자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페드로가 허리를 굽실거렸다.

“아, 예, 한 사람한테 순정을 바치셔서 평생 못 가시는 몸이라는 거 이제 기억났습니다. 황도의 누굽니까, 대체? 납치든 뭐든 해 오라고 하게 이름이라도 말씀해 주시지요.”

이온 크레이거.

아직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그 이름을 카밀루스는 속으로만 뇌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페드로가 채근하는 의미로 그를 불렀다.

“각하?”

카밀루스가 그만 물으라는 양 눈을 휘어 웃음기를 띠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황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야.”

“하면 각하께서는요? 정말로 저희만 보내시려고요?”

“물론 나도 갈 거고.”

자연스럽게 자신도 떠날 거라는 결론을 읊자 페드로는 좀 놀란 눈치였다. 이제야 진지해진 그가 얼굴에 수심을 드리웠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서는 가리지 않아도 돼.”

“폐하께서 실로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전부터 소문으로 버니언 황태자가 곧 섭정을 시작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럼…… 각하께서 황도로 가는 길이 더 요원해지시는 것 아닙니까?”

버니언이 카밀루스를 경계한다는 건 단지 황도 내에서만 도는 소문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권력을 잡으면 당연히 카밀루스로 하여금 수도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조치하리라는 것은 생각을 조금만 해도 충분히 추론 가능한 범위의 결론이었다.

게다가 황제는 오늘내일하는 처지인지라 아이오딘에서의 혹한을 견딜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오는 길도 여의치 않겠지만, 돌아가는 길은 더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그가 짚은 가능성을 완전히 배격했다.

“그럴 일은 없어.”

“어떤 게 말입니까?”

“현 황태자가 섭정을 하는 것. 그리고 내가 황도로 가지 못하는 것. 두 가지 다, 없을 거라고.”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무슨 근거라도 있느냐는 듯, 페드로가 의문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카밀루스는 그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어딘지 쓰게 보이는 미소였다.

카밀루스는 반 모금 정도 남은 와인을 흔들다가 머금고는 천천히 목으로 넘겼다.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린 뒤, 그가 조금 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바꾸지 못하는 몇 가지가 있거든.”

“……?”

“운명, 같은 것들.”

말하면서 카밀루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오딘의 하늘은 하루도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적어도 이 결계 안은 늘 평온했다.

다만 이만큼이라도, 난 너에게 평온을 전해 주고 싶다.

하루하루 죽음을 바라봐야만 하는 너를 운명에서 해방해 주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내가 바꾸고 싶은 건 딱 하나뿐이고, 다른 건 관심 없어.”

나는 기꺼이 목숨도 바칠 것이었다.

앞으로의 네 삶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줄 터였다. 작은 한 톨이라도 남김없이 모두 다.

“전혀 못 알아듣겠는데요.”

초를 치는 페드로의 지적에 카밀루스가 픽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모르겠으면 하나만 기억하면 돼. 우리가 곧 수도로 돌아간다는 거.”

“수도로 돌아가면 각하께서 마음에 품으셨다는 그분도 볼 수 있겠네요.”

“그렇겠지?”

“어떤 분입니까?”

카밀루스는 조금도 주저 없이 제 마음속의 단어를 꺼내 놓았다.

“구원자.”

“굉장히 거창한데요?”

“그럼 이건 어때?”

“어디 말씀해 보십시오. 듣고 평가하지요.”

다음에 그가 중얼거린 것은, 한 번도 입에 올린 적 없는 단어였다.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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