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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43)화 (43/317)

카밀루스는 지금껏 제 아비는 아무도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다. 단지 이용할 방법만 아는 사람이라고.

차라리 그렇게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와서 하는 말이 카밀루스의 어미는 사랑했고, 사랑한단다.

그런데 이 아비라는 작자가 그 사랑했던 여인의 아들에게 뱉는 것은 이유도 없는 증오의 말이었다. 정말로 독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아들일진대, 죽기 직전에 찾아와서는 하는 말이 이런 것이라니.

기억에 평생 각인시킬 요량이었다면 그 효과는 확실했다.

카밀루스는 아직도 제 얼굴을 곳곳을 쓸고 있는 황제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그의 눈에서는 또 한 방울의 눈물이 굴러떨어져 턱에 맺혔다.

“그래서 날 가뒀어? 겨우 그런 말로 정당화가 될 것 같습니까?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대체 뭘 잘못했길래 난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았어야 했어?”

“아이야.”

“닥쳐!”

결국 견디지 못한 카밀루스가 벌떡 일어났다. 순간 현기증에 비틀거릴 뻔했으나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는 뒷걸음으로 물러나다가 아비의 눈이 저를 좇는다는 걸 알아챈 순간, 시선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손이 창문턱을 짚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카밀루스는 한순간에 목이 답답해지는 느낌에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그럼에도 목이 멘 건 가시지 않았다.

“난, 나는 역시 당신을 용서 못 할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안 돼. 안 된다고.”

“용서하지 마라. 구하지도 않을 테니.”

뻔뻔한 인간.

죽기 직전만 아니었다면 욕설을 쏟아 낸 뒤 침을 뱉었을지도 몰랐다. 저런 사람이 제 아비라니 끔찍하기만 했다.

“그럼 여긴 왜 왔습니까? 미안하다는 소리를 할 게 아니라면.”

“네게 줄 것이 있어서 왔다.”

카밀루스는 그가 줄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것이든 받는 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아니, 저한테 필요한 건 제가 직접 찾아서 가질 겁니다.”

그러나 황제는 덤덤히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황도에서 아이오딘까지, 제 나름대로 먼 길을 목숨을 태우면서 온 이상 그로서도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이건 나의 마지막 유언이다. 다섯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니 이제 그만 사람들을 불러 다오. 칼은 우직한 자이니 그를 다섯 중에 포함해야 모두가 믿을 것이다.”

카밀루스는 미간을 좁혔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냉기가 서렸다.

“제멋대로인 건 여전하시군요, 폐하. 하지만 싫습니다.”

“…….”

“당신이랑은 여기서 끝일 것 같으니 저도 한 번쯤은 제멋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

눈에서 물기를 거두어 낸 그의 얼굴에는 이제 슬픔의 흔적 대신 비소가 자리했다. 카밀루스는 창문턱을 등지고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제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증인 따위 부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똑바로 생각하고 얘기하십시오.”

“무슨 질문을 말이냐.”

뒤에 나올 말을 예측했을 텐데 황제는 시치미를 뗐다. 카밀루스는 단지 제 아비가 이 주제를 불편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비틀린 쾌감을 느꼈다.

그러니 제 호기심을 거둘 이유는 아무 데도 없었다.

“제 어미는 누굽니까. 당신이 그렇게 그리워하고 사랑해서 죽기 직전에 닮은 이 얼굴 한 번 보기 위해 엄동설한까지 뚫고 찾아오게 하는 그 사람 말이에요.”

느리게 깜빡여지는 황제의 눈꺼풀이 떨리는 것이 육안으로도 잡혔다.

“대답, 안 하십니까? 나 따위는 어미가 누군지 알 자격도 없나? 아니면 이름조차도 공유하고 싶지 않을 만큼 내가 싫은 건가?”

“그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란다.”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왜 당신이 판단하지?”

일침을 두는 말에 황제의 얼굴이 카밀루스 쪽으로 돌아왔다. 그는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들어왔을 때보다 가슴을 크게 들썩이는 중이었다. 음성에 쇳소리가 섞였다.

“아이야.”

그러나 카밀루스는 그가 전혀 가엾지 않았다.

“그 역겨운 호칭 그만두십시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밀루스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제 아비가 제게서 원하는 답을 기다릴 때 자주 쓰는 방식이었다. 결국 급한 사람이 입을 열게 하는.

황제는 몇 번 큰 숨을 들이켰다 내쉬기를 반복하다가,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그래, 좋다……. 증인을 먼저 불러 주면 그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해 주마.”

그러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카밀루스는 쉽게 믿지 않았다. 평생을 제게 낙인을 찍어 두고 사람들 앞에서 손가락질받게 한 원흉이 바로 제 아비였기에.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겁니까. 설마 마지막까지 마녀의 아들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해서 내 인생 망치고 싶어 그러나?”

황제는 하아, 하고 불편해진 숨소리를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실로 알려 주겠다. 그러니 그만 불러 다오. 내 시간이, 얼마 없구나.”

“…….”

“착하지, 아가?”

카밀루스가 말없이 기대어 있던 몸을 세웠다. 달래는 말에 설득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말로 황제가 곧 죽을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카밀루스는 황제가 누워 있는 침대를 지나쳐 방문을 열어 놓고 밖으로 나섰다. 명대로 다들 저택 밖으로 나간 관계로 사람을 부르려면 제가 직접 현관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달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제일 먼저 노아 기사단의 칼 단장과 자신의 부관인 페드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두 사람을 포함한 다섯 명을 이끌고 도로 방으로 올라갔을 때, 황제는 각혈을 하는 중이었다.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에 칼이 놀라 그 곁으로 당장 달려갔으나, 황제는 잠시 고통을 덜어 주는 마법조차 거부했다.

숨소리가 쌕쌕 새는 가운데, 그가 천천히 유언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오딘의 변경백,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에게 전하노니 아이오딘을 비롯한 비아트리스, 템퍼스, 이엘라엠 등의 오브라이언의 북부라 일컬어지는 모든 지역을 영지로 하사한다. 또한 대공의 작위와 비렌시움이라는 이름을 내려, 그 이름을 후세에도 영원히 빛낼 수 있도록 하겠노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인 채 카밀루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정작 방금 대공으로 임명된 당사자의 얼굴은 덤덤하기만 했다. 황제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카밀루스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침대맡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고개 숙인 채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그를 처음으로 야속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이야, 넌 이제 자유다. 앞으로는 네가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야.”

반시체가 되어 찾아온 뒤에야 하는 말과 행동이 카밀루스에게는 오히려 상처였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그의 마음을 돌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연이어 이기적인 바람을 읊었다.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련……?”

결국 그런 부탁을 들은 뒤에야 카밀루스가 얼굴을 들었다. 황제의 손끝이 그의 넓은 이마와 순한 눈, 곧은 코, 단단해 보이는 광대와 부드러운 입술, 마지막으로 날카로운 턱선까지 차례로 쓸었다.

그 안에서 자신이 지극히 사랑했던, 그러나 자신은 지킬 수 없었던 옛 연인의 흔적을 하나하나 발견해 나가는 황제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퍼 보였다.

“너를 미워하는 것이 짐의 죄업이다.”

“…….”

“하지만 너에겐 이 아비가 원망스럽기만 하겠지. 마음껏 하렴……. 너에겐 그럴 자격이 있으니.”

카밀루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분명히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아버지의 관심 한마디가 필요한 그는 분하지만 제 얼굴을 만지는 부황의 손을 잡았다.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아이야.”

“내가 더 불행해지지 않길 바란다면, 제발…….”

그러나 황제는 끝내 그 말을 해 주지 않았다. 대신 카밀루스에게 한 마지막 약속은 지켰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들으라. 황자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어미는…….”

어느새 눈물이 어린 카밀루스의 눈에 헉, 허억, 숨을 몰아쉬는 부황의 모습이 들었다. 그렇지만 곧 사랑하는 사람의 곁으로 간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의 표정만은 편안했다.

곧 그녀의 이름이 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로제니아 미아블레다.”

마침내 듣고야 만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인식한 순간, 카밀루스는 넋이 빠져 버렸다.

로제니아 미아블레.

카밀루스는 그 이름을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현 황제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

그리고 카밀루스가 갇혀 있던 황성의 탑에서 뛰어내려 죽은 불운의 황후였다.

함께 있는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카밀루스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몰아붙이려고 했으나 기회는 없었다.

황제가 죽음 직전의 마지막 문장을 토해 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뜻을 오브라이언 제국을 수호하는 태초의 존재인 블랑셰의 앞에서 전하노니, 이 시각 이후로 바뀌지 않을 금과옥조로 여기라…….”

그리고 오브라이언의 42대 황제가 서거했다.

평생을 학대하고, 평생을 증오했던 아들의 앞에서 맞은 초라한 임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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