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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삭아 가는 것처럼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다. 황성의 동편에 위치한 황태자궁의 옆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두 사람분의 그림자가 문을 지났다.
시종은 케이프를 입은 두 사람에게 따로 인사조차 하지 않고 버니언이 있는 침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촛불이 줄을 서 있는 회랑을 지나 문 앞에 서자 그제야 시종이 안에서 기다릴 버니언에게 알렸다.
“전하, 마탑주 재니스와 그 조수가 왔습니다.”
“들라 하거라.”
방금 전 찾아오겠다는 서신을 받은 것을 감안해도 늦은 저녁이고, 갑작스러운 방문이었기에 버니언은 가벼운 잠옷 차림이었다. 늘어져서 단단한 가슴이 다 드러났지만 그저 허리의 끈을 좀 더 조이는 정도로 옷을 갈무리한 그는 침대에 앉은 채로 마탑주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지, 재니스?”
물음에 일단 후드를 뒤로 넘겨 마탑주 재니스가 얼굴을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굴곡이 없어 이목구비가 흐릿한 데다 성별을 알 수 없을 만큼 중성적인 외모의 그가 잔잔히 미소 짓고 있었다.
조수인 마리엘과 함께 살며시 무릎을 굽혔다가 도로 몸을 세운 재니스가 기묘한 방식의 인사를 해 왔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뭐?”
버니언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의 인사를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지금은 단 한 명, 제 아버지뿐이기 때문이었다.
의문은 금세 풀렸다.
“황제 폐하께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게 무슨. 난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버니언에게 소식이 왔을 것이다. 게다가 이 시점에 소식이 당도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황제는 아이오딘에 가는 길에 서거했다는 이야기가 됐다.
하지만 재니스는 버니언의 의구심을 짧은 말로 불식했다.
“당연하신 일입니다. 단지 ‘제가’ 먼저 알았을 뿐이니까요.”
“무슨 뜻이지?”
“황성 결계의 기운에 변동이 있었기에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
“전하께서 오브라이언 제국의 새로운 태양이 되셨습니다.”
감축드린다는 말을 안 했을 뿐, 재니스의 말에는 이미 그런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버니언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희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 하하…… 그거 아주.”
잠시 말을 끊은 버니언의 한쪽 입꼬리가 선명하게 위로 올라갔다.
“즐거운데?”
재니스와 버니언의 웃음소리가 교차하다가 이내 하나로 합쳐졌다. 그렇게 방 안은 한동안 그들의 키득거림으로 가득 찼다.
마탑주한테서 저녁에 방문하겠다는 서신을 받았을 때만 해도 불쾌함과 불길함으로 짜증과 긴장이 올라왔던 버니언은 이제야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가 협탁에서 타오르고 있는 초 하나를 들어 다른 초에 불을 옮겨 붙이는 것으로 공간을 더 밝혔다. 그러자 조수로 따라온 마리엘의 얼굴 아래쪽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그 역시 드물게 양쪽 입꼬리가 단정히 올라가 있었다. 물론 저주로 인해 흉해졌다는 케이프 후드 아래의 얼굴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그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던 버니언은 허릿심을 빼고 몸을 살며시 늘어뜨렸다.
“그래서, 소식은 그것뿐인가? 더 용건은 없고?”
“있습니다. 기존의 황성 결계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것으로 다시 펼칠까 합니다.”
“갑자기?”
“현재의 결계가 그럴듯해 보여도 벌써 30년이 넘은 구식이니까요.”
재니스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조부 대에 설계된 황성 결계는 웬만한 마법사라면 해석조차 못 할 만큼 어려우면서도 완벽하다고 칭송받는 결계였다. 실제로도 30년간 황성 결계의 파훼법을 냈던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겸손이 지나치군.”
버니언의 중얼거림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재니스가 기분이 좋은지 가슴에 손을 올리며 허리를 살며시 숙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더 강력한 결계가 전하, 아니 폐하를 지키게 될 터이니. 다만 준비물이 있는데…….”
뒷말을 흐리며 눈치를 살피는 그에게 버니언이 얼른 대꾸했다.
“말하거라.”
“마법식을 완성하기 위해선 전하의 피가 필요합니다.”
“…….”
대답하는 대신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버니언의 반응에 재니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설마 제가 결계를 풀고 다시 펼치지 않을까 의심되십니까? 혹은 더 약한 결계를 설치할까 봐?”
당연히 그런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버니언은 금세 표정을 풀고 코웃음을 흘렸다.
“그런 것은 물론 아니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른 생각요?”
“오래 걸리는 게 아니라면 그 쇼, 즉위식 때 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기왕이면 화려한 것이 더 좋으니 말이다.
부황이 아파 침상에 누워 있었던 때부터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던 버니언이었다. 그러니 그간 보지 못했던 화려한 공연 하나가 더 펼쳐지는 것쯤은 문제없으리라.
그러한 욕망을 충분히 이해한 재니스는 거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을 휘어 미소 지었다. 촛불에 의지해 어둠을 밝혀 둔 탓인지 진한 그림자가 맺혀 평소 밋밋하게 보였던 재니스의 웃음이 더 선명하고 깊게 와닿았다.
“원하신다면 못 할 것은 없습니다. 저는 위대한 클로델 황가와 폐하의 종이니.”
“그래, 좋아.”
흔쾌한 승낙의 말에 버니언은 다시금 소리 내어 웃음을 흘렸다. 최근 들어 이렇게 어깨가 가벼워진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만큼 부황의 부고는 안타까움보다는 홀가분함을 주었다.
부황이 실낱같은 목숨을 지지부진하게나마 계속 이어 가면 자신이 늙은이가 될 때까지 즉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 드디어 제거된 느낌이었으니까.
“야밤에 웬일인가 했더니 피로가 다 가실 정도의 좋은 소식이었다, 재니스.”
“과찬의 말씀을. 나중에 제게 당근이나 많이 주세요.”
재니스의 말투가 심히 격의 없어지고 있었지만 버니언은 그조차 당장은 신경 쓰지 않고 넘겼다.
“당근이라, 뭘 원하지? 내 지금 기분이면 뭐든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마탑주 최초로 작위라도 내려 줄까?”
재니스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또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저한테 재물이나 작위는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원하는 시점에 제가 가장 바라는 소원을 들어주는 것보다 더 큰 대가가 있겠습니까?”
“내 목숨을 달라거나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만 아니면 그리해 주겠다.”
“물론 아니지요. 이 몸은 클로델 황가에 절대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깨지지 않을 맹약입니다. 아니, 목숨을 다해도 제 뜻을 잇는 다른 누군가가 클로델 황가를 지킬 것입니다.”
그 다른 누군가가 제 옆에 선 이라는 양, 재니스의 시선이 마리엘에게 향했다. 그러나 목전의 일이 아니다 보니 버니언은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군. 그래서 말인데…….”
“더 하문하실 것이라도?”
버니언이 그답지 않게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재니스가 뒷말을 재촉했다.
“황제가 되면 하루라도 빨리 황후 역시 맞이해야 하지 않겠나?”
“지당하신 말씀이시지요.”
“그러니 저번에 하다 만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
돌려 하는 이야기에 재니스가 머릿속을 뒤지는 척 눈을 새침하게 치켜올려 어둠으로 가득 찬 천장을 쳐다보았다.
“하다 만 이야기라…… 무엇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고작 며칠 전 일인데 기억 안 날 리가.
일부러 화제를 피한다 직감한 버니언이 하는 수 없이 제 입으로 못 박아 주었다.
“이온 크레이거의 저주에 관한 것 말이야.”
“아아…….”
그제야 생각났다는 양 재니스가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때 제가 한 발언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정말 모르나? 증거가 없지 않나, 증거가. 그대가 이온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그때 나눈 대화인즉, 지금 그의 옆에 있는 조수 마리엘이 이온과 황궁 밖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야기였다. 상태가 안 좋은지 비틀거리는 이온에게 마나를 주입해 주었고, 덕분에 이온의 저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파악하게 되었다고.
버니언이 이온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웬만한 호사가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이다. 마탑이 소식이 느리긴 하지만 벌써 몇 년이나 된 일을 모를 리 없었으므로, 재니스는 버니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며 제 의견을 덧붙였다.
버니언은 듣자마자 이거다 싶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아무도 믿지 않으리란 것.
한데 버니언의 지적을 재니스는 아주 가볍게 넘겨 버렸다.
“그런 것치고 이미 청혼서를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능구렁이.’
역시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듯이 보여도 이것저것 훤히 다 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은 버니언이 살짝 노려보자 재니스의 태도가 조금 진지해졌다. 그는 아까보다 엄숙해진 말투로 설명을 해 왔다.
“그리고 말씀대로 제가 보지는 않았으나 마리엘이 워낙 소상히 알려 주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버니언은 그의 말에 있는 허점을 재빨리 파고들었다.
“저주의 해제 방법도 모르는 자가 그게 무슨 저주인지는 다 해석했다?”
버니언의 날카로운 시선이 마리엘에게 향했다.
“마르, 심지어 너는 처음 봤을 때 그 저주가 뭔지 특정도 못 하지 않았나?”
“…….”
수년 전 이온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듣고 공작 저로 데리고 갔을 때, 마리엘은 분명히 잘 모르겠다는 결론밖에는 도출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케이프 아래의 얼굴을 푹 숙일 뿐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재니스가 대신 변명을 입에 올렸다.
“두 가지가 연관된 것은 맞으나 명백히 다릅니다. 애초에 난도 자체가요. 그리고 처음 본 이후로 벌써 1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그간 갈고닦은 마리엘의 통찰력이 그 정도로 진일보한 것이지요.”
의문을 완벽하게 해소해 주는 답은 아니었으나 현존하는 최고의 마법사인 마탑주가 그렇다고 하니 버니언으로서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짜증이 났지만 일단 그 문제는 차치하기로 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그 저주는 무슨 저주지? 무슨 저주길래…….”
무례하게도 재니스가 빙빙 돌려 말할 것이 뻔한 버니언의 발언을 중간에 끊고 들어왔다.
“사내의 몸으로 애까지 낳을 수 있게 해 주냐고요?”
순간 침실에 깊은 고요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