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45)화 (45/317)

* * *

“욤뇽아.”

“꾸웁.”

와작, 와작, 와작.

버틀러가 이온에게 가져다준 쿠키는 대서재의 귀신이 몽땅 먹어 치우는 중이었다. 햇살이 들어오는 책상의 명당자리에 게으르게 엎드려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는 욤뇽이의 모습에 이온이 그 통통한 볼을 꼬집었다.

“욤뇽아아.”

두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하얀 드래곤이 안쪽이 반짝거리는 보석안을 굴려 이온을 바라보았다.

“꾸?”

이온은 녀석의 앞에 보라색 액체가 찰랑이고 있는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어제 가지러 갔다가 돌아왔더니 자기를 두고 갔다고 욤뇽이가 잔뜩 삐져 있어 미처 보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 제 몸으로 실험 따위 절대로 하지 않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로, 이온은 수상한 약의 경우 욤뇽이에게 먼저 보여 주었기에 이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거 이번에 새로 가져온 약인데 이건 어때? 먹어도 되겠어?”

질문을 받은 욤뇽이가 바닥에 몸을 붙인 채로 슥슥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날로 게으름만 늘고 있는 옴뇽이가 최근 애용하는 이동 방식이었다.

“꾸…….”

“마셔도 이상 없을까?”

욤뇽이의 눈동자에 보랏빛이 반사되어 비쳤다. 연신 갸웃거리며 약을 살피던 욤뇽이가 홱 고개를 돌렸다.

“뀨우!”

“이번에도 아니야?”

끄덕끄덕.

“조금 마셔 보는 것도 안 돼?”

끄덕끄덕끄덕.

순수한 아기 드래곤인 욤뇽이는 제 행동에 거짓을 섞지는 않았다. 먹지 말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실제로 한 번은 하도 답답해 홧김에 마시면 안 된다는 걸 삼켰다가 저주 강화 효과를 얻어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깨어나고 한동안 눈이 잘 안 보여서 꽤나 고생했던 기억이 있었다.

단호한 반응을 본 이온은 결국 약병을 구석에 밀어 놨다. 지난번에 아스타틴과 만난 이후로 사사건건 노아 기사단이 선수를 치거나 훼방을 놓아서 일이 꼬이는 와중 어렵게 가져온 물건인데 심히 아쉽게 됐다.

“약을 또 어디서 구하나.”

그리 한숨을 내쉴 무렵이었다. 이온의 집무실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소공작, 접니다.”

에렌스트 경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이온이 얼른 책상에서 약병을 치우고 욤뇽이를 제 허리 뒤에 끼워 버렸다. 의자와 이온 사이에 눌린 욤뇽이가 버둥거렸지만 무시하고 밖의 사람에게 대답했다.

“들어와.”

달칵,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문을 여닫고 안쪽으로 들어선 에렌스트 경이 허리를 굽혔다.

“급한 소식이 있어서 왔습니다.”

급하다는 것치고 상대의 표정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기에 이온은 여유롭게 대꾸했다.

“왜, 노아 기사단에서 내 꼬리라도 잡았대?”

“그럴 리가요. 급하긴 해도 심각한 건 아닙니다.”

“그럼 차를 마시면서 들을까.”

“예, 소공작.”

이온은 집무실 가운데의 탁자 앞 소파로 가 종을 달랑달랑 울렸다. 잠시 후 김이 올라오는 찻잔이 그들의 앞에 각각 놓였고, 이온은 옅은 농도의 홍차를 홀짝인 뒤 입을 열었다.

“말해 봐, 급하지만 심각하지 않은 그 일.”

“황제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잠시 손을 멈칫하긴 했으나 이온은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황제의 죽음은 시기와 장소가 문제일 뿐, 거의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다만 이 일이 공식적으로 알려지면 한동안 꽤 바빠질 터였다. 황제와 버니언의 성향이 크게 달랐기 때문에 정국 또한 요동칠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쯤 아이오딘에 도착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설마 아이오딘에서 숨을 거두었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나가 해결되자 다른 의문이 연속해서 떠올랐다.

그럼 북부로 추방됐던 카밀루스는 어떻게 되는 거지?

카밀루스의 북부 추방은 사실상 구금령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겉으로는 자진해서 변경으로 간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버니언은 카밀루스에게 감정이 좋지 못하니 그가 등극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계속 그곳에 묶어 두려고 할 터였다.

‘어쩌면 죽여 버리려고 할지도.’

누명을 씌워 사형대에 올리는 방법이 가장 쉬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카밀루스를 한 번쯤은 구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에게 목숨을 기대고 사는 처지인 자신이기에.

드물게도 선뜻 뒷말을 잇지 못하는 이온을 에렌스트 경이 지그시 보고 있다가 벌써 비어 버린 찻잔을 채워 주며 다시 화제를 이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지?”

“클로델 변경백이 대공위를 받았습니다. 폐하께서 서거 직전에 비렌시움 대공으로 작호를 내리셨다고 하는군요.”

잔을 들어 올리려던 이온의 손이 움찔하면서 찻잔이 덜컥거렸다. 찻물이 살짝 넘친 것을 보고 에렌스트 경이 얼른 손수건을 꺼내 손을 감싸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아, 어.”

이온은 손을 빼다가 자신의 대답이 몹시 어설펐음을 깨닫고 뒤늦게 수습하려 애썼다.

“버니언의 즉위식이 곧 있겠네…… 혹시 그럼 카, 아니, 대공도 오나?”

말실수가 연이어 났다. 오래 봐 온 만큼 제가 동요하였음을 훤히 알고 있을 에렌스트 경은 그러나 모르는 척했다.

“예, 이미 아이오딘을 출발해 황도로 오고 있습니다. 대공께서 직접 운구해 온다고 하더군요.”

“황도로 오고 있다고……?”

전 황제의 장례식과 버니언의 즉위식. 두 자리에는 틀림없이 카밀루스도 참석할 테고, 그럼 당연히 두 사람도 만나게 될 것이었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의 재회(2/3)]

그간 카밀루스를 간간이 생각할 때마다 어서 깨 달라는 듯이 반짝거리던 퀘스트창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반응했다.

〈그러니까 이온, 너 또한 나의 기적이야.〉

어렸을 적 그런 말을 하면서 얼굴을 붉혔던 카밀루스의 모습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갔다.

각자의 지위가 있으니 이제 예전처럼 그토록 순수하게 서로를 대하지는 못하겠지. 이제는 이온도 멋모르고 그의 호의를 덥석 받아들이는 어린아이가 아니듯이.

“소공작?”

한데 상념이 길어졌던가. 에렌스트 경이 부르는 소리에 이온이 정신을 차렸다. 눈의 초점이 돌아온 것을 보고 에렌스트 경이 살짝 미소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속을 들켜 버렸다.

이온은 급격히 어색해진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 변화를 들키지 않으려 뒤돌아 창문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또각, 또각 구두 굽 부딪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다행히 그 규칙적인 소리가 이온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재빨리 머릿속을 정리한 이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버니언도 황제가 되면 더는 혼인 시기를 미룰 수 없을 거야. 이젠 날 따라다니지 못할 테니 차라리 잘됐어.”

일전에 말했듯이 이온에게 대의는 없었다. 비실비실한 몸 때문에 제 목 하나 간수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판국에 단지 황태자가 좀 미친놈 같다는 이유로 국가 전복을 꿈꿀 리가 없었다.

그런데 에렌스트 경이 불길하게 다른 가능성을 가늠했다.

“하지만, 오히려 더 집요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전 걱정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좀…… 상식으로는 헤아리기 쉬운 분이 아니다 보니.”

“내가 진짜로 애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런 식으로 계속 크레이거가를 모욕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

“계획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지금 시점에 구체적인 계획이 있을 리가.

다만 이온은 자신이 적어도 버니언보다는 똑똑하다고 믿는 중이었다.

“녀석은 욕심이 많아서 분명 즉위하면 뭔가 큰 걸 시작하려고 할 거야. 그 계획을 망쳐 버려야지, 철저히.”

그리고 말을 마쳤을 때였다. 에렌스트 경이 뭐라 대꾸하기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온, 아비다.”

이온에게 가문의 일 대부분을 맡겨 둔 공작은 최근 덜 바빠져서인지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 낮 시간이었으나 새삼스러운 방문은 아닌지라 이온은 당황하지 않고 직접 걸어가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아들이 보이는 것을 보고 크레이거 공작은 곧바로 환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몸이 괜찮은 모양이구나.”

이온은 눈을 휘어 해사하게 웃었다.

“네, 아버지. 컨디션 좋아요.”

그러고 시선을 살짝 내리니 아버지의 손에 들린 실이 뜯어진 편지가 보였다. 황가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순간 미간을 구길 뻔한 이온이 천천히 옆으로 비켰다.

아들의 호전된 상태에 기뻐하던 공작은 왠지 금세 얼굴이 굳어서는 방 안으로 들었다. 반면 에렌스트 경은 본인이 피할 자리임을 기민하게 알아채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이유 모를 불길한 느낌에 조금 긴장한 이온이 천천히 공작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곧장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공작, 거짓 없이 솔직하게 말하거라.”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공작의 손안에 있던 편지가 탁자에 던져졌다. 이온은 눈치를 보다가 그것을 가져와 확인했다.

첫 줄부터 개소리가 적혀 있었다.

공작도 알다시피 그대의 영식은 내게 무척 특별한 이요.

“황태자가 너에게 청혼서를 넣었다는 게 사실이냐?”

“…….”

턱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 미친놈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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