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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서거에 대한 이야기는 즉시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선황은 사생아로 알려진 첫째 아들에게는 잔혹했을지 몰라도 합리적인 통치를 해 왔기에 제국민들 대부분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황도와 가까운 곳에 영지가 있는 귀족들은 선황의 시신이 든 관을 멀리서라도 보기 위해 즉시 황도로 올라왔다. 혹은 같은 날 대관식을 치르는 버니언의 눈에 들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오브라이언은 제국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전설의 동물인 블랑셰를 존중하되, 신을 섬기지 않는 나라였으므로 선황의 장례식과 예비 황제의 대관식은 황태후궁에서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드디어 황성에 선황의 시신이 드는 날이었다. 아이오딘과 황도의 거리가 상당했던 만큼 최대한 운구를 서둘렀음에도 선황제가 눈을 감고 10일 이상 지난 시점이었다.
아침부터 황실은 황성의 문을 활짝 열고 장례식과 대관식에 참석할 이들을 맞이하였다.
옛 주인을 만난다는 생각 때문인지 오늘따라 데려가 달라고 심하게 떼를 쓴 욤뇽이를 주머니에 넣은 채, 이온 또한 아버지와 함께 자리를 채웠다.
선황의 운구 행렬과 대관식을 치를 새 황제가 걸을 붉은 카펫 길이 황태후궁 앞의 작은 마당에서부터 홀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단차를 낸 길의 끝에는 하얀 꽃으로 가득 찬 유리관이 놓여 있었는데, 이는 선황의 영면식이 먼저 치러질 걸 고려한 것이었다.
얼마 안 가 식의 개시를 알리는 태후의 입장이 시작되었다. 아직 대관식을 치르기 전이기에 모든 호칭은 이전에 준했다.
“황후께서 입장하시니 모두는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십시오.”
말과 함께 태후궁의 깊은 안쪽에서 버니언의 어머니이자 선황의 정실이었던 황태후가 걸어 나왔다.
아들의 기쁨보다는 지아비의 슬픔을 우선하여 차분한 분위기의 드레스를 입고, 검은 레이스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홀의 가장 높은 곳에 그녀가 올라서서 유리관 앞으로 가자 황태후궁에서부터 앞의 마당까지 가득 채운 수많은 귀족들의 선두에 서 있던 크레이거 공작이 그 앞으로 나섰다.
그가 대표로 한쪽 무릎을 꿇고 태후의 앞에 예를 올렸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이어 그를 복창하는 소리가 온 태후궁을 울렸다. 인사를 받은 태후는 관의 왼쪽으로 걸어갔고, 크레이거 공작은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 옆에 자리하고 있던 이온은 왠지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크레이거 공작을 지켜보다가 잠깐 생긴 틈에 그의 어깨를 풀어 줄 겸 작게 물었다.
“아버지는 선황 폐하와 어렸을 적부터 친구로 자랐다고 하셨죠?”
크레이거 공작은 곁눈으로 잠시 이온을 확인했다가 도로 정면으로 시선을 향하며 답했다.
“그래, 나이도 같아서 귀족 아이들 중에서는 폐하와 가장 가깝게 지냈다.”
나이가 같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한데 그 친구가 병환으로 죽었다는 데서 격세지감이라도 느끼는 것인지 공작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느 시점부터 성격이 변해 갔지만 어렸을 때는 폐하께서도 꽤 순수했었단다.”
“……상상이 안 되는데요.”
이온은 버니언을 이용해 카밀루스의 북부행을 종용했던 황제의 냉혹함만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순수’라는 말이 유난히 낯설게 들려왔다. 하지만 크레이거 공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선선대 황제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어.”
“무슨 큰일이 있었던 건가요?”
“…….”
이온이 물었으나 공작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웅.
그 소리를 알아들은 몇몇이 홀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시니 모두 엄숙히 묵례하며 맞이하십시오.”
두우웅.
두 번째 북소리가 울렸을 때 버니언이 마당의 카펫 끝으로 올라와 태후궁의 홀에 입장했다.
이온은 지시에 따라 고개를 숙인 채 제 앞을 지나가는 버니언의 발소리를 들었다. 평소에도 자신감이 가득 찬 그의 발소리가 무척 거슬렸었는데, 오늘은 더했다.
계속해서 운구 행렬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의 발은 황태후의 맞은편인 관의 오른쪽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황성의 한가운데 있는 태양궁의 후문이 양옆으로 열리면서 태후궁의 마당에 선황의 운구 행렬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실 기사단인 노아 기사단이 여러 개의 휘장을 들고 관을 둘러싼 가운데, 이온은 그 선두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아…….’
그렇게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닌데.
보는 순간 이온의 시야는 오롯이 그 하나로 가득 차 버렸다.
눈부시도록 환한 빛이 드리운 궁정. 머리 위의 태양 빛이 그 사내의 몸에 내려앉자 어깨의 노란 견장과 검은 옷에 과하지 않게 들어간 장신구들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반짝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빛이 나는 건 예의 사내 자체였다.
솜털이 나 있던 열여섯의 소년은 도무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커다래진 체구에, 웬만한 사내들이라면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길어진 몸체, 북부에서의 활약을 드러내듯 옷으로도 가릴 수 없이 단단하게 차오른 근육까지. 그러면서도 호리호리하다는 느낌을 줄 만큼 선이 곧은 자세는 몹시 기품 있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많이 바뀐 건 앳되고 부드러웠던 얼굴이었다. 길어진 얼굴형과 살이 빠진 볼, 전체적으로 선이 굵은 이목구비는 그가 성인이 되었음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한데 그러면서도 깊은 바다를 품은 눈과 단정하고 조화로운 느낌을 더해 주는 콧대 때문인지 아름답다는 감상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
곧 제위에 오를 버니언을 제외한 선황의 유일한 핏줄이며 사생아인 그가 선황이 잠들어 있을 기다란 관을 이끌며 장내에 들어섰다.
그 순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이온과 카밀루스의 시선이 얽혔다. 자신을 향해 있는 듯 보이는 그의 눈길에 이온은 마구 뛰려고 하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착각일지도 몰라.
이런 곳에서 단번에 알아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잠시, 차갑다고 느껴질 만치 굳어 있던 카밀루스의 얼굴이 변화했다. 부드럽게 풀리면서 살며시 웃는 상이 된 것이었다.
……자신을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이온은 스스로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랐다. 누군가 제 심장을 짓밟는 듯이 가슴이 쿵쿵거리려는 찰나,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황제 폐하께 마지막 예를 올리십시오…….”
순서를 안내하는 시종의 목소리 또한 슬픔이 가득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제 위치를 상기해 낸 이온이 시선을 홀의 가운데로 향했다. 그리고 크레이거 공작의 말을 따라 하얀 천으로 덮인 관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오브라이언의 빛을 뵈옵니다.”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온 그 말이 길게 메아리치는 홀을 묵직한 발소리가 가로질렀다. 등 뒤의 검은 망토를 흔들며 단 바로 앞까지 걸어간 카밀루스가 이내 절도 있게 한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췄다.
울림 있는 저음이 황태후궁의 홀 안에 퍼졌다.
“비렌시움 대공,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이 오브라이언의 위대하신 42대 황제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자 왔습니다.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러고 카밀루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설마 당당히 나타날 줄은 예상치 못했는지, 황제의 관을 맞이하기 위하여 홀 중앙으로 나와 있던 버니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질 뻔하였음은 물론이었다.
다만 이 많은 이들 앞에서 티를 낼 수 없었던 버니언은 억지로 눈웃음을 그리며 맞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카밀루스도 마주 눈웃음을 그려 주니 버니언은 겉으로나마 그를 환대하는 척 단에서 내려와 몸까지 낮추었다. 8년 만에 보는 카밀루스의 넓은 어깨를 살며시 팔로 감싸며 자세를 가까이한 버니언이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버니언은 주변 사람이 내용을 짐작할 수 없게 입술을 최소한으로만 움직이며 말했다.
“황도로 돌아오다니 미쳤어? 일찍 죽고 싶은가 보지?”
여전히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으나 내용은 살벌하기만 했다. 카밀루스는 그에 축하의 말이라도 들었다는 양 얼굴을 환하게 했다.
“그동안 네가 얼마나 멍청하게 살아왔는지 잘 아는데, 과연 그럴 수 있으려나 의문이 든다.”
“이 개새끼가…….”
“표정 유지해. 사이좋은 형제인 척해야 하니.”
카밀루스의 일침에 버니언이 구겨지려는 미간을 간신히 수습했다. 그러고 카밀루스를 더 깊게, 꼭 안아 주었다.
“말년에 변덕스러워진 늙은이 때문에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널 조련할 방법이야 이미 잘 알려진 바라…… 안 그래?”
조련할 방법. 이온을 가리키는 것임을 눈치챈 카밀루스가 손으로 감싸고 있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마치 이로 물어뜯는 듯 강한 힘이었다. 버니언이 저도 모르게 윽, 하는 소리를 냈으나 카밀루스는 힘을 풀지 않았다.
“조련하다가 목덜미 물려서 죽지 마라. 맹수는 조심해야지. 그렇지?”
“하하하하하하…….”
덕담을 나눈 양 버니언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밀루스가 어깨에서 손을 떼 주자 몸을 세운 그는 정면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지금부터 영면식을 거행한다.”
비록 얼굴 한쪽엔 화가 가득했지만 일단은 제법 평화로운 식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