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가 일시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남은 시간 47분.]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2%입니다.]
잠깐의 휴식 뒤 일어났을 때, 머리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무형의 것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 사라져 의아해하던 중, 시야 한구석에서 시간이 카운트다운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확인해 보니 잘 때는 없었던 버프가 붙은 채였다.
‘누군가 왔다 갔어.’
이온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에 코골이마저 하며 세상모르고 자는 욤뇽이를 툭툭 쳐 흔들었다.
“욤뇽아?”
“꾸우우.”
작게 신음 소리는 냈지만 날이 갈수록 게으름과 식욕만 느는 드래곤은 움쩍도 안 했다. 이온은 녀석의 귀에 바짝 입을 갖다 대고서 속삭였다.
“욤뇽아, 네 주인 왔어.”
주인이 왔다고 하니 평소 싫어하는 척하던 녀석이 작은 날개를 활짝 펼치며 벌떡 일어났다.
“꾸우! ……꾸?”
그러다 앞에 이온밖에 없는 걸 확인하고는 욤뇽이가 미간을 좁혔다.
“꾸.”
왜 거짓말하냐는 소리였다. 이온은 욤뇽이의 작은 손에 제 검지를 걸며 이야기했다.
“거짓말 아니야. 누가 나한테 마나를 주고 간 것 같아, 욤뇽아.”
“꾸……?”
욤뇽이는 이온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면서 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녀석에겐 마나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있으니, 이온의 상태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챘을 터였다.
‘하지만 대체 언제 주고 간 거지?’
그는 오늘 행사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니 올 틈이 없었을 텐데…….
생각하다 보니 찝찝한 구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몸이 가벼워진 것은 호재였다. 황성에 오랜 시간 계속 있다가는 저주 강화 효과를 얻을 가능성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전에 저주 강화 효과 때문에 꽤 오래 고생한 적이 있는 이온은 그런 무서운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쉬었으니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야 할 때도 맞았다. 내내 자리를 비울 순 없는 법이니.
이온은 아직 잠이 덜 깨 도로 눈을 반쯤 감은 욤뇽이를 주머니에 넣고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 * *
황태후궁으로 돌아가자 선황의 장례를 모두 치렀는지 노아 기사단이 관을 들고 다시 태양궁을 지나고 있었다.
본래라면 태양궁에 관을 두고 그 앞을 선황의 핏줄들이 지키고 서서 죽음을 슬퍼하는 절차가 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번엔 본인의 침대가 아닌 황성 밖에서 서거한 탓에 장례가 열흘 이상 지체되었다. 하여 곧장 운구한다는 설명은 이미 들었다.
여러모로 예외가 많은 장례식과 대관식이다. 이런 형식 없는 대관식이 이루어진 것 자체가 서둘러 황위에 오르고 싶어 하는 버니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일 테지만…….
이온은 다시금 어두운 회랑을 통해 홀 안으로 들어갔다. 대관식은 벌써 시작되어, 절차에 따라 의식을 치르는 중이었다.
“다음은 오브라이언을 통치한 위대한 선황제들의 앞에서 숭고함을 맹세하기 전, 몸을 정결히 하는 순서입니다.”
아버지인 크레이거 공작 옆으로 가자,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확인한 그가 다정히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으로 안심이라는 뜻을 전했다.
이온은 버니언이 홀 가운데에서 손을 씻는 장면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리고 흠칫해 버렸다.
‘카밀루스.’
맞은편의 선두에 서 있는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마치 자신에게 시선을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카밀루스를 응시하는 이온의 초록빛 눈이 흔들렸다.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이것으로 벌써 두 번째였다. 아까 눈길이 닿았다고 생각한 것이 착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카밀루스는 이번에도 눈매를 살짝 휘었다.
그 모습이 이쪽을 희롱하는 의도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외려 너그럽고, 다정해 보였다.
[상태 이상: 호의]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이 플레이어에게 극도의 호의를 느낍니다.]
이온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같은 메시지가 뜨는 것을 보며 괜히 얼굴이 홧홧해질 것 같았다. 아니, 벌써 귀 끝이 뜨거워진 게 아닐까 싶었다.
8년이나 지났는데도 카밀루스는 여전했다.
여전히 자신에 대한 마음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이온은 단숨에 깨달아 버렸다.
그러나 고개를 숙여 살며시 눈길을 피하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안 돼.’
더는 그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강해지기 위해서 그토록 노력해 오지 않았던가.
자신의 몸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일을 다 벌여 두었다. 제 모든 돈과 정신력, 시간을 쏟아부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이온이 마음을 다잡을 무렵이었다. 대관식의 핵심인 관과 레갈리아를 건네는 의식이 진행될 차례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으로 황후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영광의 홀을 건넬 것입니다.”
이때만큼은 잠시 딴청을 부리던 귀족들도 집중했다. 방금까지 식이 길었던 관계로 다소 심드렁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버니언 역시 눈빛이 살아나는 것이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잠시 후 황태후의 고운 손에 잡힌 관이 버니언의 머리에 얹히고, 금과 각종 보석으로 화려히 장식하고 투명한 다이아몬드를 그 가운데 박은 레갈리아가 버니언의 손에 건네어졌다.
이어 어깨에는 두꺼운 털 망토가 둘리고, 붉은색의 긴 망토 자락이 홀의 가운데에 펼쳐졌다.
많은 이들의 시중을 받으며 돌아선 버니언의 표정은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자의 것이었다. 그가 돌아보자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알리는 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졌다.
“오브라이언의 위대한 43대 황제께서 등극하셨음을 온 제국에 선포하니, 모두는 새로운 황제께 예를 갖추십시오.”
그러자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커다란 외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제국의 새로운 태양을 뵙습니다.”
소리가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홀 안을 묵직하게 울렸다. 이온은 기쁜 듯이 손을 흔드는 버니언의 모습을 곁눈으로 살폈다.
꽤 오랫동안 황위 계승을 기다려 온 만큼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환했다. 그래 봤자 이온의 눈에는 야비해 보이기만 했으나.
잠시 뒤 소리가 잦아들고, 다음 의식으로 넘어갔다.
“이어서 마탑주는 황제의 앞으로 나와 황성 결계의 해체 및 새로운 결계 시전을 행하십시오.”
그 내용에 잠시 홀이 웅성웅성해지기 시작했다. 대관식에 이런 차례가 있다는 것을 사전에 듣지 못했던 이온이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뭐죠?”
그러나 공작도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다. 나도 못 들었던 일이다.”
“…….”
잠시 혼란해진 사이 홀 가운데로 마탑주 재니스가 걸어 나왔다. 회랑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그는 케이프를 벗고 몸에 새하얀 정복을 걸친 채 당당한 걸음으로 버니언의 앞으로 나섰다.
이온은 그런 모습을 보고서 참으로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 봤을 때도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안 되었는데, 케이프를 벗은 지금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목울대는 안 튀어나왔는데 가슴은 없고, 전체적인 몸의 선은 여성에 가까운데 얼굴의 인상엔 묘하게 사내다운 면이 섞여 있었다.
그런 그가 버니언의 앞에서 미소 지으며 두 손을 모았다.
“클로델 황가의 종이 위대한 오브라이언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마탑주의 인사말에 작게 탄식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정치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해 왔던 마탑이 선선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였으나, 그럼에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런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버니언이 마다할 리는 없었으므로 그는 선선히 웃었다. 그가 옆을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칼을.”
명에 따라 버니언의 손에는 단도가 쥐어졌고, 금빛의 그릇이 앞에 내밀어졌다.
버니언은 왜인지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손으로 단도의 칼집을 벗긴 뒤 손바닥에 칼날을 대었다.
뚝, 뚝…….
직접 상처를 내 그릇에 피를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의식을 보던 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황제가 지금 뭐 하는 짓이냐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의는 제기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카밀루스도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피가 채워지자 재니스가 알렸다.
“결계를 해체하는 데 폐하의 허락을 구합니다.”
“이행하라.”
그러자 홀의 바깥쪽에 서 있었던 이들의 시선이 문 너머로 향했다.
제니스의 손짓과 함께 황성을 감싼 결계가 발하는 희미한 빛이 서서히 거두어지기 시작했다.
[황성을 둘러싼 결계의 억지력으로 인해 제한되었던 마나의 흐름이 정상화됩니다.]
30년이 넘도록 황성과 클로델 황가를 지켜 온 결계가 사라지는 모습을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중이었다.
재니스는 이어 심호흡을 하고 작게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전의 결계는 황성의 탑을 중심으로 마법진이 있었으나, 이번 결계는 달랐다. 그의 중얼거림에 따라 천천히 태양궁 위에 마법진이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바로 뒤에 있는 태후궁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기에, 그 모습을 자리에 있는 거의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버니언은 바뀐 위치가 마음에 드는지 제 손이 아픈 줄도 모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중이었다.
그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멀리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결계의 힘이 화악 퍼져 나갔다. 이온의 눈앞에 이전과 같은 메시지가 다시 떴다.
[황성을 둘러싼 결계의 억지력으로 인해 마나의 흐름이 제한됩니다. 특정 시점이 지나면 저주 강화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새로운 황성 결계를 올려다보며 탄성을 질렀을 때였다.
홀 안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 것은 카밀루스였다. 그가 돌연 자리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온 것이었다.
“황제 폐하, 비렌시움 대공이 폐하께 아뢰옵니다.”
“……?”
그의 돌발행동으로 결계에 쏠렸던 주위 시선이 카밀루스에게로 향했다. 버니언이 갑자기 뭐냐는 듯이 눈썹을 꿈틀했다.
그 앞에 있던 재니스의 시선 역시 그를 향했다. 은근히 경계하는 듯한 그 눈빛을 받으며 카밀루스는 태연히 몸을 조금 틀어 황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버니언은 그 모습을 보고 마지못해 물었다.
“무슨 일이지?”
“감히 오브라이언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충언을 바치고자 함이니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카밀루스의 화법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귀족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감히 청을 거절도 하지 못하도록.
하여 버니언도 어쩔 수 없이 성군 흉내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대는 나의 혈육이니 편히 말하라.”
“황성의 결계는 이 나라의 명운을 가를 수도 있으니 누구도 파훼하지 못하도록 함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한데?”
버니언의 반문에 카밀루스가 고개를 들고 그를 마주 보았다.
카밀루스의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성에 오기 전부터 계획했던 일 하나가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가장 극적으로 이루어질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가장 먼저 변화를 감지한 재니스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뒤를 돌아보았고, 홀의 끝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외쳤다.
“결계의 마법진이……!”
너무 놀랐는지 채 문장을 마치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온 역시 돌아보았다가 상상도 한 적 없는 광경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쩌저정!
마법진이 굉음을 울리며 강제로 파훼되었다. 태양 빛이 내리쬐는 황태후궁의 정원에 빛 조각이 반짝거리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낭만적인 광경을 배경 삼아 카밀루스가 이어 말했다.
“그 결계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황제 폐하이시여.”
선황의 미움을 받던 사생아, 카밀루스 클로델이 현존하는 오브라이언 최고의 마법사가 되어 버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