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결계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황제 폐하이시여.”
버니언은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양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그는 결계가 부서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황성의 결계가 이렇게 쉬이 깨지다니? 심지어 이는 마탑주가 직접 펼친 결계였다.
현존하는 최고의 마법사라고 평가받는 재니스가.
30년 전에 펼친 결계조차도 파훼한 사람이 없었는데, 방금 막 제 피를 뿌려 얻은 결계가 무너져 버리다니.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가다듬은 버니언이 질문을 던졌다.
“……지금 대공은 황실의 안위를 위협하려는 건가?”
그에 떠들썩하던 홀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방금 카밀루스가 한 짓은 분명 그 저의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대공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크레이거 공작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이온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
이온은 그것이, 유사시에도 절대 나서지 말라는 의미로 읽혔다.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그러나 카밀루스에게서는 전혀 긴장의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폐하의 안위를 지켜 드리고자 함일 뿐입니다.”
“대공.”
“이자에게 폐하를 마주 보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한술 더 떠 그러한 요청을 하자 버니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이번만큼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머리를 깨 버리는 상상을 하던 버니언은 제 속을 충동질해 대는 욕망을 억누른 채 허락의 말을 흘렸다.
“고개를 들어 가까이 와도 좋다.”
결계가 깨져 버렸으니 카밀루스를, 눈앞의 괴물을 억제할 수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아까 전 말했던 것처럼.
〈맹수는 조심해야지.〉
그는 현재 아주 위험한 짐승이었다.
고개를 들고, 이어 서서히 일어난 카밀루스가 버니언의 앞에 섰다. 버니언이 아직 피가 멎지 않은 손을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카밀루스의 파란 눈동자가 향한 곳은 버니언의 피가 모인 접시였다. 그가 손을 그 위에 올리고 마나를 집중시켰다. 그러자 미세하게 빛이 일었다.
“앞으로 이 황성의 결계는 클로델 황가의 의지가 없으면 깨지지 않을 겁니다.”
“…….”
카밀루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방금 전 재니스가 결계 마법진을 그린 곳에 그대로 다른 형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결계의 막이 서서히 퍼지는 것을 보며 이번에도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하지만 버니언의 외침이 그 모두를 금세 가라앉혔다.
“재니스!”
엄격한 부름에 재니스가 얼른 자리에 무릎 꿇고 앉았다.
“예, 폐하.”
“……비렌시움 대공의 결계를 그대는 파훼할 수 있나?”
물음을 들은 재니스가 활짝 열린 문 가운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참을 관찰하던 재니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그도 지금은 갑작스러운 공황 상태일지도 몰랐다.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했던 제 마법이 깨져 버렸으니, 마법 연구에 평생을 몸 바쳐 온 재니스로서는 충격적인 일임이 분명했다.
“저것의 파훼법은…….”
재니스가 어울리지 않게도 말을 흐렸다. 잠시 후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버니언이 원하던 말과 정확히 반대의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군요?”
왜인지 끝이 의문문으로 맺어졌다. 버니언이 계속해서 물었다.
“재니스, 저 마법을 읽을 수는 있나?”
혹시 이상한 기능이 있으면 서둘러 말하라는 의미였다. 대충 지어내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기만 한다면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 텐데, 늘 의뭉스럽게 굴던 재니스가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예, 폐하. 제가 펼치는 황성 결계와 기능이 같습니다.”
재니스의 시선이 카밀루스에게로 향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공. 마탑주인 제가 마탑의 체면을 구겼습니다.”
버니언은 들끓는 화를 억누르려 눈을 감았다. 오늘이 인생 최고의 날이 될 줄 알았는데 끝물에 시커먼 구정물이 튀어 버렸다. 그렇지만 대관식 중에 이대로 모든 것을 멈추고 있을 수는 없었다.
버니언은 눈을 떴다. 그러자 카밀루스의 유난히도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당장 목을 쳐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는 대신 카밀루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카밀루스가 뜻을 눈치채고 그릇을 내려놓으니 버니언이 그를 두 팔 벌려 안았다.
그러자 약 올리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목적이 뭐야, 너? 황위에라도 앉고 싶어?”
버니언의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의 등을 어린아이 어르듯 두드렸다.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한 것뿐이야. 황위는 관심 밖이고.”
버니언이 이번엔 금세 떨어졌다. 도로 단을 올라가 지그시 내려다보자 카밀루스가 그 앞에서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오브라이언의 영원한 빛이 되소서, 황제 폐하.”
적어도 겉으로만은 평화로운 대관식이었다.
* * *
“대체, 대체!”
쨍그랑!
재니스가 제 발 옆에서 산산조각 나는 꽃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늘 그랬듯이 심드렁해 보였다.
대관식이 끝난 후 태양궁으로 든 버니언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손에 잡히는 집기들을 전부 깨부수고 있었다.
그가 재니스를 마주 보며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저 새끼가 대체 어떻게 네 마법을 파훼할 수가 있지?”
재니스는 버니언이 무섭지도 않은지 태연히 대꾸했다.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돌연변이입니다. 규격 외의 인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건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하필 오늘이고.”
“그것은, 유감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너도 이제 저놈을 통제할 방도가 없다는 말인가?”
재니스는 눈을 도로록 굴렸다. 마나 운용을 해 보려고 했으나 억눌린 듯 제대로 기운이 돌지 않았다.
애초에 제가 설계했던 마법인데, 그것에 도리어 당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드물게도 불쾌하다는 감정이 올라왔다.
그렇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공의 능력치를 가늠하지 못하겠습니다.”
“씨발!”
마녀의 아들.
카밀루스 클로델의 그 별명은 아마 선황이 지어서 퍼트린 것일 터였다. 버니언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몇 가지 근거가 있었다.
카밀루스를 싫어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출생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선황은 언어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다. 어미가 누군지 추측만 난무하도록 빈자리로 남겨 두기보다는 추상적이나마 마녀라는 대상을 두는 편이 호기심을 잠재우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으리라.
심지어 마녀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모친이 누군지 밝히지 않으면서도 그 정통성을 배격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가.
마지막으로, 카밀루스의 저 악마적인 능력이 모계임을 드러내어 황실에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하는 것까지.
그 나름대로 선황으로서는 써먹을 데가 많은 별칭이었다.
분노로 숨을 색색대던 버니언이 한마디 툭 던졌다.
“카밀루스, 그 녀석의 어미를 찾아야겠다.”
재니스가 눈썹을 들썩였다.
“찾아다 뭐에 쓰시렵니까?”
“카밀루스의 저 능력이 황실의 것은 아니니 모계에서 온 게 틀림없어, 그렇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럼 그 어미도 저 정도로 강하다는 의미인데 숨어 있는 것을 괜히 잡았다가 벌집을 쑤시는 꼴이 되진 않을지……?”
제니스의 지적은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합당했다. 그러나 정곡이 찔린 버니언은 화를 내 버렸다.
“그렇다고 저런 분란 덩어리를 가만히 놔둬? 마탑주, 그대도 통제를 못 하는 힘인데!”
“하면 폐하께서는 통제할 방법이 있으시단 말씀이십니까?”
“어미가 살아 있다면 데려와서 첩으로 삼아야겠다.”
재니스는 눈살을 찌푸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카밀루스의 친모라면 적어도 나이가 마흔이 넘었을 것인데 뜬금없이 첩이라니?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실로 기괴했다.
“폐하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황실 계보에 입적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이번에도 버니언이 답답하다는 듯 벌컥 소리쳤다.
“내가 역겹게 그 새끼랑 같은 핏줄을 왜 품어? 인질이다. 그러니 잡자마자 힘을 억제할 수단을 마련해 놔, 선황의 명으로 그 새끼를 탑에 가둔 게 그대이니 방도가 있을 것 아냐!”
다행히 갈 데까지 가진 않은 모양이다. 재니스는 과연 안심해도 되는 상황인지 의아했으나 버니언이 그렇다고 하니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예,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인질은 이온 크레이거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황후 삼으신다면서요?”
마침내 이온의 이름까지 끌려 나오자 급격히 불쾌해진 버니언이 재니스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재니스.”
“예?”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왜 사사건건 시비지?”
벌집은 여기에도 있었군.
예전부터 이온 얘기가 나오면 민감하게 반응하더니,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보니 이제는 진짜로 그를 사랑하게라도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차마 지적할 수 없었던 재니스가 얼른 한 발 뺐다.
“그냥 의문 나는 것을 즉석에서 말한 것뿐입니다. 제가 너무 주접스러웠던 모양이군요.”
그런데도 버니언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두 손을 공손히 모은 뒤 무릎을 굽혀 살며시 몸을 낮췄다.
“이 몸은 클로델 황가의 종입니다. 주인께 불만이 있을 리가요.”
그러고 두 눈을 휘어 사르르 미소 짓는데, 버니언이 날카롭게 잘랐다.
“지금은 꼴도 보기 싫으니 이만 꺼져라.”
“송구합니다. 물러나지요.”
“…….”
재니스가 그때까지 존재감 없이 가만히 있던 조수 마리엘과 함께 뒷걸음을 살살 치며 깨진 도자기들이 나뒹구는 방 안을 빠져나갔다.
탁, 문을 닫은 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넓은 태양궁의 회랑을 도는 동안 재니스는 무표정한 채로 묵묵히 걸었다. 세 사람분의 발소리가 지루하게 울리는 가운데, 재니스의 옆에 있던 마리엘에게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초조한 모양이군.”
“…….”
재니스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