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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51)화 (5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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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멋진 신고식이었습니다, 대공 전하.”

상대의 말투가 노골적으로 비꼬는 투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지금 제가 마시는 차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다행이라 여겨질 만큼 혀끝의 칼이 날카로움을 느꼈다. 그를 느낀 것은 비단 자신만이 아닌지, 부관인 페드로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곧바로 무례를 지적하기보다는 손가락을 느슨하게 해 달칵,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려놓은 카밀루스가 약간은 피곤함이 담긴 얼굴로 상대를 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황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증명하는 그의 짙은 파란 눈이 찌를 듯이 눈앞의 사내, 노아 기사단의 단장인 칼 나르바에스를 바라보았다.

수도로 오면서 카밀루스도 제 나름대로 계획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움직이려 했으나 칼이 집요하게 앞길을 막은 탓에 결국 이곳으로 와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연되는 것에 슬슬 짜증이 일고 있었다.

게다가 눈앞에는 칼 단장 말고도 거슬리는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아스타틴 딜런.’

동그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칼 단장 옆에 서 있는 사내. 예전에도 느꼈지만 다시 봐도 곰같이 둔중해 보이는 인사였다.

잠시 그에게 시선을 둔 카밀루스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당장 그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 내는 중이었으나, 빨리 용건을 말하지 않으면 언제 이 방 안을 엉망으로 만들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그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상대가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대공께서 황도로 올라오면서 어떤 계획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저희 노아 기사단은 궁극적으로는 황제 폐하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워낙 변죽만 울려서 조금만 무식했더라면 못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

수도 인간들은 다 이런가, 그런 생각을 하며 카밀루스가 빈정댔다.

“분란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를 너무 빙빙 돌려 하는 것 아닌가?”

“…….”

“아무래도 내 출신 때문에 우려가 된 모양이지?”

‘출신’이라고 돌려 말했지만 선황의 유언을 들은 다섯 명의 증인 중 한 명인 칼은 무엇을 말하는지 곧장 알아들었을 터였다.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카밀루스는 일부러 이름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선황의 첫 번째 부인인 로제니아 미아블레라는 그 이름을 말이다.

카밀루스는 그 이름을 듣고 잠시 충격을 받았고, 또한 선황이 그동안 자신에게 해 왔던 만행들이 더더욱 이해가 안 되었던 것과 별개로 그것에서 파생될 피곤한 일들과는 멀어지고 싶었다. 하여 그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난 황위 따위는 관심 없다. 그냥 하던 일을 하던 중에 저절로 떨어진다면 모르는 일이겠지만…….”

그러나 자신의 시간을 빼앗은 데 대한 심술을 부리기 위해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말하자 칼이 경고하듯이 불렀다.

“대공 전하!”

무례하기는.

제아무리 선황의 지극한 총애를 받은 황실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라고 해도, 신분 차가 있는데 화법이 상당히 좋지 못했다.

그래서 카밀루스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몸을 살짝 늘어뜨리며 일부러 건들거렸다.

“내가 황제를 시해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과민반응을 하지? 심지어 황제를 지키기 위한 황성 결계도 내가 다시 시전해 주지 않았나.”

“……어찌 되었든 전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카밀루스는 상대의 말허리를 끊고 제가 대신 뒷말을 이어 붙였다.

“황제 폐하의 유언은 무덤까지 가져가도록.”

“…….”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 아니었나?”

고개를 끄덕인 칼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고 긴장한 눈으로 카밀루스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다른 속셈이 없는 것인지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카밀루스는 다시 차를 홀짝이며 여유를 보였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 그냥 밖에서 말했어도 큰 지장은 없었을 텐데 괜한 수고를 했군.”

물론 상대방이 최악의 최악을 생각하며 제 앞을 막았을 거라는 짐작은 충분히 되었다. 제가 오늘 한 짓이 황도를, 아니 정확히는 새 황제가 된 버니언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는 사실쯤은 자각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카밀루스의 목적은 어차피 황위가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이온만 지킬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상관없었다.

“그대가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난 황도로 귀환한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목적을 이루었어. 그 점에 대해서는 그대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어쨌든 증인이 되어 준 덕분에 일이 순조롭게 풀린 셈이니.”

선황의 말대로 칼 단장은 유언의 증인으로서 나서서 카밀루스의 황도 귀환을 도왔다. 우직한 자라는 말 그대로였다.

한데 그는 의심이 많은 모양인지, 카밀루스의 말을 듣고도 미간의 힘을 풀지 않았다. 그의 앞에도 차가 놓여 있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카밀루스의 행동 하나하나를 뜯어보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요란한 등장이 필요하셨던 것입니까?”

“그건 그냥 날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한 것에 불과해.”

중간에 웃음소리를 섞은 카밀루스가 말을 이었다.

“황도의 법칙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힘 있는 자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법이지. 심지어는 황제조차도 그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해. 안 그런가?”

“그런 발언은…… 역심을 드러내는 것 아닙니까?”

칼이 날카롭게 반문해 왔다. 실제로 카밀루스의 발언은 은근히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말은 흘리지 않는 식으로 제법 줄타기를 잘하는 중이었다.

“역심과는 달라.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 그대의 옆에 있는 그 곰 같은 사내보다 내가 더 강하다, 라는 걸 보여 주는 거야. 일종의 서열 정리랄까?”

카밀루스가 턱짓으로 아스타틴을 가리키자 칼의 시선도 잠깐 그에게 향했다.

아스타틴은 두 사람의 피곤한 대화를 묵묵히 듣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자 당황스러워했다.

“이해했나, 아스타틴 딜런 경?”

“…….”

이어서 카밀루스의 입에서 제 이름이 정확히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순간 표정이 굳는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카밀루스는 픽 웃었다. 이전에 저 자식 때문에 이온이 죽을 뻔한 것을 생각하면 속이 다 뒤틀렸지만, 당장은 그 감정을 억눌렀다.

“딜런 경, 그대의 검이 제법 날카로웠었지. 아무리 치유 마법을 써도 꿰뚫린 어깨의 흉터가 사라지질 않더군.”

그에 아스타틴이 무어라 말하고자 입을 열려고 하는데, 칼이 손을 들어 막았다.

“대공 전하, 과거의 일을 논할 자리는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어렸을 적 일 때문에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진짜냐고 묻는 듯이 칼이 쳐다보았으나, 카밀루스는 빈 찻잔을 내려 두며 그만 몸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어쨌든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다 들려준 것 같은데. 이만 가도 되나?”

물론 대답은 필요치 않은 질문이었기에 카밀루스는 말이 끝나자마자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막 뒤돌아서려고 하는데, 칼의 나직한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질러왔다.

“죄송합니다만 아직 다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또 뭐가 필요한…….”

말이 미처 끝나기 전이었다.

차앙, 하고 금속성의 소리가 들려와 카밀루스가 몸을 옆으로 비켰다. 그러자마자 옆으로 잘 관리된 예리한 칼날이 지나갔다. 하지만 목표는 카밀루스가 아니었다.

내내 조용히 서 있던 페드로가 칼을 피해 몸을 물렸다. 둘 사이가 벌어진 틈에 다시 칼 단장이 제 검을 휘둘렀다. 그에 카밀루스가 제 허리춤의 칼을 뽑아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카앙!

꽤 거센 부딪침과 함께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렸다. 카밀루스가 검을 맞댄 채로 갑작스럽게 공격해 온 단장을 향해 이를 갈았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칼 단장은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며 제 검을 밀어붙여 카밀루스와 거리를 좁혔다. 키긱, 하고 날이 마찰하며 우는 소리를 냈다.

“단지 후환을 없애려는 겁니다.”

카밀루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 충성심이 대단하군.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다니.”

카밀루스가 검을 힘껏 밀쳐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칼 나르바에스는 그에겐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금 페드로를 노렸다. 카밀루스는 다시 그 앞을 막았고, 둘의 검이 맞부딪쳤다.

카가강!

상대가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수년간 미친 듯이 북부의 몬스터 사냥해 온 카밀루스였다. 덕분에 그는 검에 제법 자신이 있었고, 근력도 누구에게든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칼 나르바에스도 의외의 실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아 둘은 몇 합을 더 겨루었다. 키기긱, 금속이 긁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연신 울리며 서로의 목을 겨누지는 못하는 채로 호각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카밀루스가 마지막에 힘겨루기하는 상대의 검을 강하게 밀어내며 그의 자세가 흐트러진 틈에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잠시 후 그의 검 끝이 칼 단장의 튀어나온 목울대 앞에서 멈췄다.

카밀루스가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무례함의 대가를 내가 뭘로 받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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