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례함의 대가를 내가 뭘로 받아야 하나?”
그러나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의 말에도 칼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우선 이 자리에서 카밀루스가 자신을 죽일 리 없다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한 태도였다.
그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제 입장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오브라이언 황실의 안위를 위해 한 일일 뿐입니다.”
그 말에 카밀루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기 확신에 찬 태도를 보니 이와 비슷한 일이 이미 벌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나머지 증인 셋은 벌써 다 죽였나? 전부 그대의 부하였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선황이 사람을 잘 봤다고 해야 할지.
제 부하를 노리는 것만 아니라면 박수를 쳐 줘야 할 만큼 대단한 충성심이었다.
카밀루스도 제 어미가 전 황후였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더더군다나 버니언이 정식으로 황위에 오른 이상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어떤 식으로든 정국의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카밀루스 제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는 밖으로 퍼지지 않았다. 망자가 된 셋은 강제로 입이 닫혔다지만 나머지 둘도 알아서 잘 단속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카밀루스로서는 제 부관을 죽이겠다는 상대의 뜻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페드로는 안 된다.”
“대공!”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릴 생각 하지 마라!”
꽤 침착하던 카밀루스가 목소리를 높이자 기세에 눌린 칼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에 카밀루스는 검을 거두는 대신 걸음을 옮겨 그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제 시선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반항적인 얼굴을 내려다보며 카밀루스가 음산하다 느껴질 정도의 낮은 목소리를 냈다.
“오늘은 단지 날이 아니다 보니 봐주는 것에 불과해.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하면 두 번의 기회는 없다. 그때는 그대도 목을 내놔야 할 거야.”
서슴없이 하는 살해 위협에, 카밀루스를 올려다보는 칼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실기사단의 단장인데, 정말로 죽이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내전이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탑주보다도 강한 카밀루스에게 무서울 게 무엇이 있겠냐마는.
“……그럼 대공께서는 저자가 떠벌리지 않으리란 확증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단지 말로만 약속하는 것은 못 믿습니다.”
“…….”
“제게 확신을 주시지 않는 한 저는 두 분을 밖으로 내보낼 수 없습니다.”
미리 말을 맞춰 놨던지 마침맞게 아스타틴이 문 앞에 서서 제 몸으로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막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카밀루스는 저 방문 너머의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방 밖을 나서면 우릴 죽일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겠군.”
“목표는 둘이 아닌 하나뿐입니다만.”
내용인즉 카밀루스는 필요 없고 페드로만 죽이면 그만이라는 의미였다.
카밀루스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페드로와 눈길을 나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그의 표정 자체는 침착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당장 이곳을 나가는 것 자체는 카밀루스에게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다. 다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다.
기사들을 죽이는 등의 큰 분란만 안 일으킨다면 칼 단장도 대공인 카밀루스를 건드리지는 못하겠지만, 페드로는 상황이 다르다.
노아기사단에서 어떻게든 명목 하나를 갖다붙여 제거하겠다고 나선다면 버니언은 당연히 그 계획을 재가해 줄 것이고, 그때부터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계획한 일을 생각하면 카밀루스는 그를 내내 보호해 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페드로의 성격상 자신의 존재가 카밀루스에게 부담이 되길 원하지도 않을 터이고.
카밀루스가 곤란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아무런 타격 없이 타개해 나갈 수 있을지 천천히 고민하는데, 페드로가 입을 열었다.
“전하.”
부르는 소리에 왜인지 불길함을 느끼며 카밀루스가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번 고개를 젓는데, 상대는 시선을 비껴 칼 단장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마법 중에 조건을 걸어 놓고 그를 어기면 저주를 내리거나 목숨을 앗아 가는 마법이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죠?”
무슨 말을 하는지 곧장 알아들은 카밀루스가 말리는 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페드로.”
하지만 저 무서울 게 없는 아저씨는 카밀루스에게 웃어 보였다. 낮잠 잠자는 아이한테 밥 먹으러 가자고 살살 꼬드기는 아버지의 그것처럼 자상한 미소였다.
“대공께서 그 마법을 못 쓸 리는 없으실 테니, 저에게 걸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신 단장도 함께 말입니다. 그럼 공평하지요?”
“페드로, 지금 무슨 소리를…….”
카밀루스는 미쳤냐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지금 그는 일평생 말 한마디만 실수하면 죽을 수도 있는 일을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데 제안을 받은 칼 나르바에스는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곧장 제 검을 도로 검집에 꽂아 넣으며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마법은 저 또한 할 수 있으니 당신에게는 제가 걸어야겠습니다. 대신 저에게는 대공께서 직접 거시고요.”
“…….”
어쨌든 칼 나르바에스가 본인의 위험도 회피하지 않겠다니 그나마 나은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선황의 유언 자리에 그를 부르지 않았을 텐데. 혹시 몰라 그 자리에 제 사람을 하나 껴 둔 것이 이런 곤란한 상황을 초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양쪽의 압박에도 카밀루스가 대답하지 않고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칼이 쐐기를 박았다.
“이 조건으로 한다면 더는 저분을 죽이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등을 떠미는 그의 말에 카밀루스가 불만스러워하는 눈으로 페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저 아저씨는 늘 그렇듯이 지나치게 태평한 얼굴이었다.
“무얼 망설이십니까, 대공. 어차피 서로 조건만 안 어기면 문제없는 일인데요? 현재 이보다 더 평화롭게 넘어갈 방법이 있습니까?”
‘평화롭게 넘어갈 방법’. 페드로 역시 그 자리에 있던 남은 3명이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에 칼 단장이 쉽게 놓아주지 않으리란 사실을 직감한 거였다.
“……알겠다.”
사실 제 어미의 정체가 알려지길 원치 않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이니 굳이 따지면 카밀루스에게도 완전히 손해는 아니었다. 다만 마음이 좋지 못할 뿐이지…….
카밀루스와 칼은 서로 말없이 마주 보다가 이내 타협의 의미로 도로 테이블에서 마주 앉았다.
* * *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대공 전하. 연회장은 서쪽에 있으니 이쪽 길로 가시면 됩니다.”
칼 나르바에스는 말 그대로 황실의 안위만이 중요했던지, 제 목적을 이루자 순순히 카밀루스와 페드로를 풀어주었다.
심지어 부단장인 아스타틴에게 배웅을 하게 해 이쪽의 체면까지 챙겨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생각보다 꽤 오래 붙들려 있었던 탓에 거의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막 기사단의 건물을 빠져나온 카밀루스는 자신을 배웅 나와 공손히 길을 알려 주는 아스타틴을 돌아보았다.
정갈한 자세의 그를 한번 힐끗한 카밀루스는 별다른 언급 없이 연회장 건물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고 몇 걸음 걷지 않아 방금 제 목숨줄을 남에게 맡겨 놓고 온 페드로가 싱글벙글하며 말을 걸어왔다.
“대공께서 저를 그렇게 아끼시는 줄 몰랐네요. 순간 반해 버릴 뻔했습니다?”
왜인지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심각한 기색 하나 없는 제 부관을 보면서 카밀루스가 미간을 좁혔다.
“이 아저씨가 지금……. 됐고, 손 이리 내 봐.”
그러고 제 손도 옆으로 내밀자 페드로가 그 위에 순순히 손을 올렸다. 카밀루스가 잠시 걸음을 멈춰 굳은 표정으로 손등을 살펴보고 있자 페드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요?”
“다른 이상한 조건이 걸렸을지도 모르니까 살펴보는 거야.”
“이거 손잡고 있으면 그런 것도 파악이 되나 보죠? 근데 마주 보고 이러니까 꽤 두근거리는데요…….”
이 순간에도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페드로를 보자 카밀루스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변태같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핀잔을 둔 카밀루스가 마나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을 했다. 그러고 잠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싶어 확인하긴 했으나, 다행히 칼이 협의된 조건 외로 별다른 장난을 쳐 두지는 않았다.
손을 놓은 카밀루스가 다시금 연회장 건물로 향하며 주의를 줬다.
“그에 해당하는 글씨를 쓰거나 입으로 말하면 죽는 조건이야. 주의하도록 해, 알았어?”
“어차피 해당 글자만 안 내뱉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 사람을 특정할 수 있게 돌려 말하는 것도 안 돼.”
카밀루스는 그가 어느 날 실수를 해 버릴까 초조하기만 한데, 페드로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귀족처럼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대공.”
“하…….”
만사에 진지하지 못한 부관의 태도에 카밀루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페드로가 눈을 찡긋거렸다.
“뭐가 그렇게 심각하십니까? 제 걱정은 그만하시고 서둘러 들어가시지요, 대공.”
“…….”
기사단 건물과 연회장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았던 관계로, 둘은 어느새 화려한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황제가 꽤 오랫동안 와병 중이었던 탓에 오랜만에 황실에서 열리는 연회라 그런지 입구에서부터 분위기가 잔뜩 들떠 있었다.
카밀루스는 입구에 들어가기 전, 안내역으로 나온 황실 시종들을 마주 보며 조금 긴장하여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의 긴장은 입구부터 와글와글해 보이는 안쪽의 분위기 때문은 아니었다.
카밀루스는 황태후궁에 들어갔을 때, 한눈에 알아보았던 한 사람을 떠올리며 가슴이 떨림을 느꼈다.
무려 8년이었다.
이온을 지켜 내겠다는 일념으로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 강해져야만 했고, 강해졌다. 이제 자신은 증명할 때였다.
자신은 그를 살려 낼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카밀루스가 잠시 머뭇거리자 페드로가 그의 옆에서 입구를 손짓하며 이야기했다.
“자, 오늘 황도를 뒤집어 놓은 대가를 받으실 차례입니다.”
그 말과 함께 카밀루스가 활짝 열려 있는 연회장 건물의 문을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지났다.
크리스털로 꾸민 화려한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홀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돌연 떠들썩함이 잦아들면서, 홀에 새로 등장한 비렌시움 대공에게 귀족들의 시선이 쏠렸다.
카밀루스는 그 사이에서 바쁘게 눈을 굴리며 간절히 보고 싶은 한 사람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전하?”
걸음을 우뚝 멈추자 옆에서 따라오던 부관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반응하지 못한 채 한 방향만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2층에서 내려오던 한 사람과 시선이 부딪쳤다.
부드러워 보이는 밀빛 머리에 에메랄드처럼 신비한 분위기의 초록빛 눈…….
이온 크레이거.
〈나랑 같이 나가자.〉
지옥 같은 곳에서 자신을 꺼내 준, 나의 구원자.
발견한 순간 카밀루스는 제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감개에 가슴이 저릿하고, 눈 주위가 뻐근해짐을 느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재회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