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은 제 앞에 펼쳐진 선택지를 보자 머리가 다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 3번이야 논외로 치고, 1번과 2번 어느 것을 선택해도 만족스럽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연회장 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둘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이런 곳에서 카밀루스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앞으로 그와 뜻을 함께할 거란 의미로 비칠 것이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제 앞에서 허리까지 숙인 카밀루스는 체면을 구기게 된다. 그럼 또 비렌시움 대공이 이온에게 안달복달한다는 쓸데없는 소문이 퍼질 터였다.
‘굳이 선택하라면 후자가 낫다.’
크레이거 공작가의 아들 된 입장에서 말이다.
그러나 뻔한 결론 앞에서 이온은 머뭇거렸다. 카밀루스는 여전히 손을 내민 채로 이온이 어떤 반응을 보일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시간이 길어지자 구경하는 이들이 저희들끼리 속닥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에 이온은 이상한 긴장감을 느꼈다.
심리적인 압박 때문에 어깨가 잔뜩 굳다가 이내 기침이 터지려고 했다. 이온은 숨을 꾹 참으며 하는 수 없이 에밀리의 손을 다시 단단히 잡았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카밀루스를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어머, 아무리 그래도 오라버니랑 첫 춤 추기는 싫단 말이에요!”
“……에, 에밀리?”
옆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이온이 뭔 소리 하냐는 듯이 동생을 돌아본 순간, 눈앞에 텍스트가 생성되었다.
[‘1. 에밀리 리아나 크레이거를 밀어내고 손을 잡는다’가 선택되었습니다.]
말해 두지만 이온은 에밀리를 밀지 않았다. 오히려 에밀리가 이온의 손을 놓고 그를 밀었다. 문제는 엄청 살짝이었는데 방심하고 있던 탓에 이온이 계단에서 비틀거렸다는 사실이었다.
“앗!”
“이, 소공작……!”
카밀루스가 얼른 제 몸을 받쳐 하마터면 구를 뻔한 이온을 붙잡았다. 에밀리는 꺄아, 하고 놀란 척을 했지만 눈에 다 보이는 연기였다.
이온이 카밀루스에게 안긴 걸 보자마자 에밀리가 흐흥, 코웃음을 치며 얼른 계단을 내려갔다. 이온은 그 모습을 보고 울컥해 이름을 크게 외칠 뻔했지만, 곧 참았던 기침이 쏟아졌다.
멈춰 보려고 숨을 참았지만 오히려 흐흡, 하는 어설픈 소리가 흘러나갔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하고 있으니 카밀루스가 이온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이온?”
이온의 몸을 더 바짝 끌어안은 카밀루스가 작게 속삭여 물었다. 방금 전과 달리 친근한 어투였다.
큰 숨을 들이켠 이온이 당황한 얼굴로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바로 제 앞에 있었다. 단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카밀루스의 깊이 있는 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었다. 걱정을 가득 매단 채로.
“아…….”
너무 지근거리라 당황한 이온은 그만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겨우 눈만 굴려 카밀루스의 어깨 너머를 확인하자 눈빛들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화끈해졌다. 분명 멀리서도 구분될 만큼 양 뺨이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레이디들이랑은 제대로 손도 잡은 적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카밀루스에게 안겨 버리고 얼굴까지 붉히다니.
완전히 사교계에서 입방아 찧기 좋은 소재였다.
‘망할 에밀리…….’
그녀는 벌써 멀리 가 귀족가 영애들 사이에 섞여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피식거리는 중이었다. 저와 똑같은 초록색 눈이 얼마나 얄밉게 빛나고 있는지 모른다.
덕분에 제대로 수습 못 하면, 스물 넘도록 결혼도 못 한 크레이거가의 영식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고약한 소문이 돌게 생겼다.
청혼도 못 받는 병약한 공작가의 후계자와 선황에 의해 내쳐졌다가 8년 만에 황도로 돌아온 대공의 스캔들.
이온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를 내릴 소리가 뭔지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짧은 순간,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솔직히 머리가 굳어 버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일단 카밀루스를 떼어 놔야겠다는 생각에 이온이 그의 몸 안에서 꿈틀거렸다.
“대공, 그, 저는 괜찮으니 놓아주십시오.”
“…….”
그런데 카밀루스가 꼼짝도 안 했다.
대체 그동안 뭘 먹고 살았길래 이렇게 단단하지?
훤칠한 키도 키지만 안겨 있으니 카밀루스의 상체며 팔 곳곳이 다 근육 덩어리라는 게 느껴졌다.
그런 몸으로 가만히 있으니 마치 거대한 돌덩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반응이 없는 탓에 난처해진 이온이 카밀루스를 애원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제발 놔줘.
그렇게 눈으로 얘기하는데 카밀루스는 오히려 팔을 꽉 잡아 왔다.
그때였다.
둘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분산되는가 싶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버니언이 온다는 소리에는 카밀루스도 반응을 보였다. 다만 이온이 원하는 방향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위로 가자.”
짧게 말한 그가 이온의 한쪽 팔을 끌고 2층으로 올라섰다. 이온은 저항할 틈도 없이 얼떨결에 끌려갔다.
“……대공!”
이온이 당황해 그를 불렀지만 카밀루스는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발이 2층의 회랑을 빠르게 지났다.
버니언이 홀에 나타난 것은 거의 간발의 차이였다. 카밀루스가 확 당기는 힘에 이온이 도로 안겨 버리고, 그대로 두 사람은 기둥 뒤에 숨겨졌다.
이번엔 카밀루스에게 그야말로 푹 안겼다. 키 차이 때문에 가슴에 얼굴이 닿아 귓가에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두근, 두근, 낮게 울리는 맥박 뛰는 소리에 이온은 긴장해 숨을 멈췄다.
“…….”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밀루스가 제 품 안에서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이온의 턱 밑으로 손을 슥 넣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이온의 턱을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러고 시선이 마주치자 카밀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
얼굴이 기울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이상 기류를 감지한 이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나마 기둥 뒤라서 다행인 건가.
아무도 보지 못할 테니까.
당연히 피해야 할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아는데, 그런데 머릿속엔 합리화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짙은 숨이 코 바로 앞에서 퍼졌다.
하아, 하아…….
두 사람분의 숨소리가 그들 사이에 오갔다. 카밀루스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와 목덜미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껏 고조된 분위기는 멀리서 들려온 소리에 의해 단숨에 깨져 버렸다.
“대공은 아직 오지 않았나?”
버니언의 물음이었다. 그에 부관인 듯한 이가 서둘러 변명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카밀루스가 멈칫하는 것이 선연히 느껴졌다.
“…….”
이온이 살며시 눈을 떴다. 하지만 그것은 금세 소용없게 되었다. 그가 이온의 목을 끌어당겨 얼굴을 제 가슴에 묻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대, 대공.”
이온이 당황해 부르는 소리에 카밀루스가 툭 물었다.
“둘만 있는 거나 마찬가진데, 언제까지 대공이야? 설마 또 기억을 잃은 건 아닐 테고.”
이온의 말문은 그 한마디에 막혀 버렸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음을 아는 카밀루스는 홀의 분위기를 살피다가 그늘에서 벗어나 바로 앞에 있는 방의 문고리를 비틀었다.
달깍.
이온의 몸이 순식간에 깜깜한 방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
그리고 도로 문이 닫혔다. 연회의 홀을 가득 채웠던 음악의 소리가 멀어졌다. 그와 함께 완전히 둘만 남아 버렸다는 자각이 들기 전에, 카밀루스는 이온의 팔을 붙잡고 침대 앞으로 끌고 가 모퉁이에 앉혔다.
털썩, 무릎 뒤가 걸려 엉덩이가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카밀루스는 곧바로 그런 이온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 앞에 몸을 낮췄다. 그리고 살며시 손을 잡았다.
카밀루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주는 여전한데.”
“…….”
“말 안 듣는 드래곤 녀석은 어디 간 거야?”
“그게.”
삐져서 가출했어, 그것도 방금…….
이온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카밀루스가 몸을 일으켜 이온의 몸 양옆에 손을 짚는 모습에 긴장해 저도 모르게 물러났다.
카밀루스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의 귀여웠던 모습이 다 사라져 버린 그는 지금 꽤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간이었다.
특히나 이렇게 해가 모두 져 어두움에 잠식된 곳에서는 말이다.
침대 안쪽에 몸을 들인 이온이 시선을 살며시 올려 눈길을 맞추었다. 그러자 카밀루스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아무래도 이온에게는 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카밀루스의 몸은 점점 가까워져 자꾸 뒤로 물러나다 보니 이온의 등이 침대 헤드에 닿았다.
툭.
그 소리가 등 뒤에서 나는 순간, 이온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어느새 침대 위에 기다란 몸을 들인 카밀루스가 한 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몸을 기울였다.
섬세하게 잘 깎인 그의 얼굴이 다가오자 이온은 그만 숨을 멈췄다. 대신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쿵, 쿵, 쿵, 쿵…….
가슴에서 마치 누군가가 북이라도 치는 듯이 박동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