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루스.”
이온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며 카밀루스와 눈을 마주쳤다. 자신에게 똑바로 향한 카밀루스의 눈은 어두운 곳에서도 유리구슬처럼 예쁘게 반짝였다.
〈내가 널 지킬 기회를 줘, 이온.〉
그의 눈은 그때처럼 어딘지 간절함을 비치고 있어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어린 시절과는 달리 한껏 낮아진 목소리는 감미로우면서.
“키스해도 될까?”
……간질거리기도 했다.
잠시 질문을 못 알아들은 이온이 멍하니 되물었다.
“……뭐?”
그런 뒤에야 그가 입에 올렸던 단어를 곱씹었다.
키스?
남들이 들으면 이런 쉬운 단어를 못 알아듣는 게 말이나 되느냐고 묻겠지만, 이온의 뻣뻣하게 굳어 버린 머리는 실제로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 거의 등장한 적 없는 단어였던 터라 순간적으로 그게 뭐지, 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마치 일깨우듯이 카밀루스가 놀고 있는 손으로 그의 왼손 손등을 덮었다. 그리고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카밀루스의 손도 좀 더 짙은 농도의 은밀함을 띠었다.
긴 손가락이 이온의 가는 팔을 타고 올라가면서, 소매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감싸 잡자 이온의 몸에 순간적으로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지만, 잊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한 기억이 떠올랐다.
제게 닿아 온 이 온기는 손을 잡아 달라고 하자 정말로 한시도 떼지 않고 하루 종일 잡아 주었던 그때의 감각과 똑같았다.
그에게서 마나가 흘러들어 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에 고마워할 새도 없이 카밀루스가 고개를 기울여 이온과 입을 맞추었다.
“읏!”
이온이 제 입 안으로 매끄럽게 밀고 들어오는 그의 혀에 깜짝 놀라 버둥거리자 카밀루스가 작게 웃더니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속삭였다.
“쉬이, 괜찮아.”
“카밀루스……!”
“점막을 통해야 회복이 더 빠르니까. 응?”
정말 그것뿐이야?
그리고 그건 약효의 이야기 아닌가? 자신은 병에 걸린 게 아니고, 심지어 그가 주입해 주는 것 역시 약이 아니었다.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카밀루스가 몸을 숙이며 이온을 밀어붙였다. 자연스럽게 몸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운데, 조용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기익 하고 침대가 기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온이 그에 불안해져 흠칫 문 쪽을 살피는데, 문이 열리는 대신 눈앞에 뜬 시스템창이 시야에 들어왔다.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가 적용됩니다.]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 플레이어의 몸에 마나가 충만한 상태입니다. 기력이 개선되고 나쁜 상태 이상이 억제됩니다.]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이 50%…….]
50퍼센트? 이것도 이온으로서는 꽤 큰 숫자였는데, 확률은 계속해서 수정되는 중이었다.
[60%……]
[……]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이 95% 감소합니다.]
‘95……퍼센트?’
수정이 완료되고 계산되어 나온 최종 수치에 이온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스템이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요즘 애가 좀 멍청해지긴 했던데?
[플레이어의 사망 확률 계산 중…….]
하지만 그런 제 의심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이 다시금 새로운 창을 띄웠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1.2%입니다.]
확실히 잔뜩 예민해져 있던 몸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한순간에 체감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는 것을 알아차린 카밀루스가 입술을 떼더니 이온의 턱을 살며시 잡아 돌렸다.
그는 아까보다 흐릿해진 눈동자로 이온을 응시하며 물었다.
“불안해?”
“아…….”
“지금은 날 봐.”
그러고 이온이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커다란 손으로 감싸 고정한 뒤, 입술을 묻었다.
무방비하게 벌어진 이온의 잇새로 말캉한 혀가 밀려들어 와 그의 것과 얽혔다.
처음 해 보는 키스. 금세 혀 밑이 땅기며 뻐근해져 왔다. 이온이 그의 혀 놀림을 어설프게 따라가면서 숨을 급히 들이켰다.
“아, 흣, 흡…….”
스스로가 미숙하다는 게 느껴져 이온은 부끄러웠다.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게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런 이온이 귀엽다는 듯이 카밀루스의 단정한 얼굴 위로 미소가 올라온 순간, 약간 눈물마저 어려 흐릿해진 시야로 그것을 확인한 이온이 그를 확 밀쳐 내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물론 이온이 주는 힘 정도로는 카밀루스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온의 명확한 거부를 인식한 그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
하아, 하아…….
조금 거칠어진 이온의 숨소리가 둘 사이에 작게 울려 퍼졌다.
얼마 안 가 숨을 가다듬은 이온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카밀루스를 확인했다.
방 안은 무척 어두웠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카밀루스의 입술이 젖어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었다.
카밀루스는 입술의 물기조차 훔치지 않고 말없이 이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슨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런 그를 앞에 두고 있자니, 이온은 왜인지 가슴 뻐근함과 눈가의 시큰함을 동시에 느꼈다.
자신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 북부로 가 버려 놓고, 그때와 똑같은 눈을 하고 돌아온 그가 원망스러운 한편으로는.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되어서.
“이온.”
하여 그가 불러 오는 소리에 이온은 눈을 질끈 감으며 불평 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왜 이제야 나타났어?”
“…….”
이런 의도가 아닌데.
적어도 이온 크레이거만큼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자신이 아니었으면 카밀루스는 북부행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그 질문에 카밀루스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특유의 할 말이 잔뜩 담긴 것만 같은 눈빛, 언제나 제게 중요한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던 그 눈빛은 수년이 지났어도 여전했다.
하지만 그는 달라졌다.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서는 담담한 얼굴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랑 거래를 하자, 이온.”
갑자기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거래’라는 정략적인 단어에 이온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동요로 인해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렸을 적 그들은, 어떠한 이해관계에도 얽히지 않고 서로를 대했다. 순수했던 그 시절이 이온은 방금 그 ‘거래’라는 단어 하나로 전부 사그라진 것만 같아 당혹스러웠다.
물론 황제의 사생아인 카밀루스 클로델이 대공으로서 황도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가 별다른 계획 없이 돌아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헤어져 있던 사이, 대체 너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마음속으로 그런 질문을 한 순간 이온은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그가 슬쩍 미간을 좁혔다가 물었다.
“무슨, 거래를?”
그러자 카밀루스가 이온을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선언했다.
“나 대공 카밀루스 클로델은 크레이거 공작가의 영식인 이온 크레이거의 저주를 무슨 일이 있어도 풀어 준다.”
“…….”
“그리고 이온 크레이거는 카밀루스 클로델의 정치적 동반자로서 절대적 지지를 약속한다.”
듣다가 이온은 눈썹을 들썩였다.
자신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그는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걸 누가 걸었는지라도. 그도 아니면 □□에 대한 단서라도.
이온은 여전히 제 팔을 통해 들어오는 충만한 마나의 힘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어쩌면 그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누군가는 돌연변이라고 일컬을 만큼 강력한, 오브라이언 제국에 현존하는 이들 중 최고의 실력을 지닌 마법사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치적 동반자’라니.
카밀루스가 과연 뭘 요구할지 몰라 이온의 얼굴에 경계심이 서리기 시작했다. 기색을 알아차린 카밀루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신 맹세할게. 저주를 풀기 전까지 내가 널 목숨을 바쳐 지키겠어.”
침대에 엉켜 있는 이 상황에 맞지 않게 진지한 맹세의 말을 읊은 그가 잠시 말을 끊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올려 이온의 얼굴을 매만졌다. 아주 그리운 것을 덧그리듯이, 간지러운 손길로.
하지만 그를 매만지는 게 단지 손만일까. 짙은 눈길이 제 얼굴에 닿아 오는 것에, 이온은 가슴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내 카밀루스의 입에서 약간의 떨림을 품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 계약의 증명으로서 각인을 하지 않을래, 이온?”
그렇게 말하는 카밀루스의 손에서 작게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 이온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카밀루스의 손에 떠 있는 것은 마법진이었다.
동시에 이온의 눈앞엔 선택지가 펼쳐졌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이 당신에게 마법의 계약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1. 예
2. 아니오
3.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본 선택은 플레이어의 생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드디어 고대하던 그와의 세 번째 만남이다.
마음속으로 ‘예’ 하는 대답을 읊고 싶었다. 게다가 시스템도 자꾸만 등을 떠밀어 댔다. 아까부터 계속 떠 있는 메시지가 이온을 어찌나 충돌질하는지 몰랐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의 재회(3/3)]
[조건을 충족하여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의 저주를 풀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플레이어의 자연사·병사·돌연사 등 사망 확률이 현저히 낮아집니다.]
카밀루스가 돌아와도 이전과 같이 기대지는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앞에 두고 있으니 안 된다.
이온은 그의 도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삶을 지탱하겠다고 했던 지난 8년간의 결심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이온은 눈을 꾹 감았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1. 예’가 선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