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가 선택되었습니다.]
[상태 이상: 호의]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호의가 상승하였습니다.]
[플레이어의 최종 생존 확률이 1% 상승하였습니다.]
‘최종 생존 확률……?’
이온은 제 앞에 뜬 메시지 중에서 처음 보는 멘트를 확인하고는 의문을 가졌다. 그냥 생존 확률이라면 매번 계산되어 나오는데, 그 앞에 ‘최종’이라는 표현이 붙은 건 이전엔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여러 가지로 예외가 많았다. 심상치 않은 날이었다.
‘혹시 카밀루스가 돌아왔기 때문인가.’
기실 카밀루스는 자신이 이 몸에 들어오기 이전에도 이온 크레이거와 이미 돈독한 관계를 형성해 두고 있었다.
다만 그것만으로 시스템이 카밀루스 앞에서는 유난히도 요란을 떠는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 않을까…….
애초에 이온과 가까운 사람이 카밀루스뿐이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단적으로는 아버지도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아무래도 이온 크레이거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있어 카밀루스라는 존재에 지분을 꽤 크게 친 모양이었다.
물론 그의 능력치를 생각해 보면 그 판단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꺼이 한없는 헌신을 하려고 했던 그의 모습이 돌이켜 보면 때로는 안타깝고, 때로는 부담스러운 것뿐.
다시는 그런, 제 모든 걸 바치려는 헌신을 이온은 원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한데 돌아온 대답이 꽤 황당했다.
“내 요구는 간단해. 매일, 잠시라도 날 만나.”
안 그러려고 했는데, 이온은 미간을 조금 좁힐 수밖에 없었다. 그의 요구는 시간을 빼앗는 것은 둘째 치고, 서로의 지위를 생각하면 상징성이 꽤 컸다.
사생아라고는 하지만, 선황이 대공위를 부여한 황제의 형과 제국 내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크레이거 공작가 아들의 결합이다.
더더군다나 황제가 된 버니언에게 아직 아이가 없는 걸 감안하면 그들의 만남은 결코 가벼운 만남으로 치부되지 않을 터였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네 번이 되고, 그렇게 회를 거듭할수록 사람들에겐 강력한 메시지를 주게 될 것이다.
크레이거 공작가와 비렌시움 대공이 결탁했다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는 곧 버니언을 배신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정치적인 쇼맨십을 원하는 거야?”
이온의 물음에 카밀루스가 잠시 입을 다문 채 그를 응시해 왔다. 이온이 추궁하는 눈빛으로 똑바로 마주하고 있으니 이내 고개를 흔든다.
“그럴 리가.”
“그럼 무슨 목적이…….”
“이온.”
카밀루스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방금 거래를 하자고 했던 건 본인이면서 목적이 뭐냐고 묻는 이온의 질문이 싫은 모양이었다.
뒤에 이어진 말 또한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난 그냥 보고 싶어 하면 안 돼?”
생각보다 감상적인 대꾸라 이온은 놀랐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곧장 생각이 나지 않아 입을 잠시 달싹이던 그는 눈길을 살며시 피하며 중얼거렸다.
“방금 정치적인 지지를 약속하라고 한 건 너인데.”
“계약, 진행할 거지?”
지금 이건 질문이 아니었다. 카밀루스는 이온이 제기한 의문을 회피함으로써 답을 내놓았다.
정치적인 지지 따위는 그저 명목에 불과함을.
액면 그대로 이온을 ‘보는’ 것 외에 아무런 목적이 없음을.
만남을 원하는 것은 그가 비렌시움 대공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친구로서 보고 싶다는 의미 이상은 없었다.
이온도 눈치가 있기 때문에 카밀루스의 이런 모순된 말과 행동이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았다. 하지만 당혹스러움이 해소되지는 않았기에 그의 시선은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야, 계약은 이미 진행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시스템은 이미 향방을 정했다. 보통 선택지가 떴을 때 선택이 완료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이 실현되었다. 그러니 이온은 이제 그가 요청한 예의 계약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 따위 상상도 못 할 카밀루스는 이온을 구슬리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너한텐 절대 해되게 안 할 테니까.”
“마법 계약은 안 지키면 저주 같은 게 걸리는 거 아니었어?”
□□가 건 저주 하나 때문에 지금도 이토록 살기가 벅찬데, 하나 더 걸린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건 시전자의 마음이야. 너한테는 페널티 안 걸어.”
“…….”
그럼 너한텐 걸어?
왠지 이 질문은 하면 안 될 거 같아서 이온은 윗니로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하지 말라는 양 제 엄지를 갖다 대더니 입술을 눌러 깨물지 못하게 했다.
손길이 닿자 이온이 시선을 들었다. 겨우 다시 시선이 맞으니 카밀루스가 다정히 웃어 주었다. 자신은 무해하니까 안심해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온은 제 얼굴에 닿은 그의 손을 거두어 내며 넌지시 물었다.
“근데, 그럼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
카밀루스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답을 꺼냈다.
“매일 널 볼 수 있잖아.”
듣자마자 이온은 누군가 바늘로 콕 찌른 것처럼 가슴이 따끔해짐을 느꼈다.
카밀루스와 보지 못한 지 벌써 8년이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소식이야 간간이 들을 방법은 있었겠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무뎌졌을 법했다.
그런데 카밀루스는 몸은 커졌을지언정 자신을 향한 마음이 바뀌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온 크레이거가 그의 구원자라서? 하지만 카밀루스가 북부행을 택함으로써 그 은혜는 벌써 청산이 되고도 남은 것 아닐까.
마지막엔 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야만 했지만, 온몸의 피를 다 뺄 지경이 되어서야 손톱보다 작은 크기로 하나를 겨우 만든다는 마나석을 제게 남겨 두고 갔었다.
지금의 이온은 오히려 카밀루스에게 빚을 진 게 더 많았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카밀루스, 날…… 좋아해?”
그런 감정이 아니면, 설명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게다가 어렸을 적에도, 오늘도…… 그는 자신의 입술을 훔쳐 갔다.
이온이 아직 키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자, 물끄러미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던 카밀루스가 두 팔로 이온을 끌어당겨 안아 버렸다.
이어 이온의 머리칼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밀려들어 왔다. 제 손만큼이나 작은 머리를 가슴에 기대게 한 카밀루스는 눈빛을 안타까움으로 물들였다.
“이온, 내가 말했지?”
작게 속삭이는 그의 말에 이온이 “뭘?” 하고 짧게 반문했다.
“넌 내 기적이야. 네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어. 어쩌면 아직 탑에 갇혀 있었을지도 몰라.”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을까. 탈출 순간의 기억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듬성듬성 비어 있었지만, 이온은 그것이 카밀루스의 이런 무조건적인 호의를 받을 만큼 그리 엄청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너라면 탈출할 수 있었을 거잖아.”
“아니, 가정은 아무 의미가 없어. 그때 네가 날 풀어주지 않았다면, 내가 살아 있었을지도 확신할 수 없으니.”
“…….”
“넌 날 지옥에서 꺼내 줬어.”
이온은 기억 속에서 양 손목과 발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던 그를 떠올렸다. 사실 그뿐이 아니었다.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 카밀루스는 종종 피투성이로 나타났고, 허름한 옷 아래는 멍 자국이 가득했었다.
누가 봐도 학대의 흔적들이었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곰팡내가 가득한 높은 탑에 갇힌 채, 카밀루스는 하루하루를 희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좌절감이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아비가 그곳에 가두어 두었으니.
“그런데 그런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까?”
카밀루스에게서 나온 질문 아닌 질문에 이온이 움찔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방금 키스는 뭔데?
그렇게 물으려는 순간 카밀루스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어.”
사랑.
이온은 남자끼리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이야기를, 그에게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카밀루스에게 있어 이온 크레이거의 존재는 그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난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걸 바칠 수 있어. 네가 내 목숨이 필요하다고 해도 기꺼이 줄게. 부담스러워하지 마. 너한텐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어.”
인생 그 자체였다.
자신이 기꺼이 떠받들어야 하는, 신보다 더한 무엇이었다.
“카밀루스…….”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이 아니면? 그러면…… 너의 이 맹목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온은 마음속에 드는 의문을, 이 자리에서는 결코 꺼낼 수 없었다. 그것은 곧 관계의 종말을 의미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카밀루스와의 관계를 끊겠다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 저주를 내가 받았으면,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에도 이야기를 들을수록 죄책감만 늘었다.
너의 이온 크레이거는 이 자리에 없다.
대신 출신도, 이름도 모르는 아무개가 기억도 없이 흘러들어 와 몸의 주인인 척 행세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온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중에라도 진실을 알게 되는 날이 오면, 그날이 온다면.
나를 용서하지 마.
너의 순수한 마음을 기만할 수밖에 없는 내 상황을, 너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