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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덕!
창문을 열자마자 낯이 익은 검은 독수리 하나가 얼른 하늘로 올랐다. 밤이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사람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신경 쓰지 않고 일단 이온을 안은 채 창문 밑으로 뛰어내렸다. 이온은 그동안 제 눈앞에 쭉쭉 흘러가는 텍스트들을 다시금 읽었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의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지금 이온은 입이 근질근질해 미칠 것 같은 상태였다. 카밀루스와의 계약 내용 때문이었다.
대략적으로만 설명을 듣고 구체적인 내용은 이야기 나누지 않았었는데, 미리 조율할 걸 그랬다. 계약 내용은 한마디로 무시무시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상태 이상 ‘마법 계약’
시전자: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
계약 유지 기간: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이나 플레이어의 사망 시 혹은 플레이어의 상태 이상 ‘마나 소실’의 해제 시까지
효과:
- 플레이어의 주변에 시전자의 마나의 기운이 떠돕니다.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가 강화됩니다. ※시전자와 일정 거리가 벌어질 시 해제됩니다.
- 마나량의 변동에 따라 플레이어에게 발생할 수 있는 리바운드가 억제됩니다. 리바운드 억제 불가 시 시전자가 그 영향을 받습니다.
- 시전자가 하루에 한 번씩 플레이어를 만나지 않을 시 상태 이상 ‘쇠약’의 페널티를 얻습니다.
- 플레이어가 ‘실신’ 상태일 경우 시전자가 플레이어의 1미터 거리 이내로 강제 소환됩니다.
- 플레이어 사망 시까지 상태 이상 ‘마나 소실’이 해제되지 않을 경우 시전자가 사망합니다.
- 플레이어가 24시간 이내에 음식물(액체 제외)을 섭취하지 않을 경우 상태 이상 ‘탐식’의 페널티를 얻습니다.]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강화)’에 의해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이 45% 감소합니다.]
내용만 보면 세상에 무슨 이런 불공평한 계약이 다 있나 싶었다. 이건 아주 일방적으로 카밀루스에게 불리한 조건인 데다, 페널티가 최대 사망까지였다.
이제부터 카밀루스는 자신과 생사를 같이하게 되었다. 마치 배수진을 친 느낌이다.
‘게다가 마지막 조건은 뭐야…….’
한마디로 밥 잘 먹으라는 소리였다.
이런 내용을 미리 들은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시스템이 알려 준 내용은 어차피 먼저 말할 수도 없는 데다, 마법을 부릴 줄도 모르는 자신이 계약의 내용을 아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관련해서 말해 주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점이 미치겠는 지점이었다.
바삭.
잠시 후 카밀루스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가볍게 착지했다. 아마 마법을 쓴 모양이었다.
이온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두 발로 땅을 디디고는 카밀루스에게 한 번 시선을 주었다.
카밀루스는 제 팔에 앉은 독수리에게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리고는 날려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고는 방금까지 자신들이 있던 2층 방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창문이 천천히 닫혔다. 이온은 쓸데없는 데에 마나를 소모하는 카밀루스를 슬쩍 흘기며 물었다.
“……오늘 막 황도에 온 대공께서 이래도 돼? 아까 누구랑 같이 오지 않았어?”
그러는 자신도 버니언이 온 뒤에 멋대로 밖으로 나와 버렸으니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으나 이온은 이를 애써 외면했다.
카밀루스는 양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내 부관. 처세는 좋으니 문제없어.”
그런 것치고는 아까 기둥 뒤에 숨었을 때, 대공은 어디 갔느냐는 버니언의 물음에 좀 난처해하는 것 같았는데.
몹시 의심스러운 말이었지만 뭐라 말이 튀어 나가기 전에 카밀루스가 이온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망할 드래곤 녀석이 어디로 갔다고?”
이온은 손으로 욤뇽이가 사라졌던 방향을 가리키면서도 감히 욤뇽이를 폄하하는 말에 눈을 치켜떴다.
“욤뇽이야.”
“그 녀석 귀여운 척 연기하는 거야. 그런 폭신한 이름으로 불러 주지 마.”
“내 눈엔 귀여우니까 상관없어.”
“본체를 봤는데도 그래?”
카밀루스의 물음에 이온은 예전에 딱 한 번 봤던 욤뇽이의 본체를 떠올렸다. 말마따나 폭신한 이름이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긴 했지만, 작은 욤뇽이의 보석안만큼은 본체가 되어서도 예뻤던 기억이 있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암.
“조그마할 때는 귀여워. 그보다 넌 주인이면서 걱정도 안 돼?”
“걱정이 왜 돼? 그 녀석, 강해. 마탑주한테 잡혀 가도 혼자서 살아 나올 놈이라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러니까, 난 안 귀여우니까.”
돌연 카밀루스가 몸을 바짝 붙이며 그렇게 속삭여 왔다. 그리고 썩 나른해 보이는 눈빛으로 이온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멋있잖아. 안 그래?”
“…….”
아직도 나한테 안 반했어?
카밀루스의 말에는 꼭 그런 의미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진 그 말에 이온의 귀 끝이 살며시 붉어졌다.
어렸을 때는 자기랑 똑같이 솜털 날리던 애송이였는데, 그래서인지 지금 그의 모습에 더 적응이 안 됐다.
북부에서 몬스터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그렇게 순했던 녀석이 그랬다고?’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꼭 남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부쩍 커진 몸도 그렇지만, 굉장히 적극적이면서도 여유로워진 태도가 사람의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분명 오늘 대관식에서 그에게 눈길을 빼앗긴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저녁이라 다행이었다. 달빛이 밝긴 해도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을 테니까…….
이온은 가까이 온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약하게 치면서 새침하게 대꾸했다.
“왜 자뻑해?”
한데 그게 실수였다. 카밀루스가 그 손을 채 간 것이었다.
타악!
커다란 손이 제 손을 감싼 순간 이온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양쪽 입꼬리를 올려 웃은 카밀루스가 이온의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갔고, 천천히 입술을 내려 손가락 끝에 키스했다.
전체적으로 작고 가는 손가락을 입술로 훑으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온, 보기 안 좋은 건 아닌데 그래도 살은 찌워야겠다. 너무 심하게 말랐어.”
살 찌워야겠다니.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방금 전의 계약 내용이 떠오른 이온이 손을 확 빼냈다.
“……너.”
“왜?”
탐식은 뭐냐고 추궁하고 싶어서 입이 자꾸 움찔댔다. 그렇지만 차마 꺼내지 못한 이온이 휙 돌아섰다.
욤뇽이가 사라졌던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이온이 질문을 던졌다.
“계약 내용 중에 나한테 페널티는 없어? 어기면 안 되니까 알려 줘야 하잖아.”
“없어.”
카밀루스는 긴 다리로 여유롭게 뒤쫓아오며 간단히 대답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 모습에 이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렇게 뻔뻔하다니…….’
8년 전만 해도 순수했던 거 같은데, 이제는 쉽지 않은 상대가 돼 버렸다.
“그럼 네 페널티는 뭐야? 혹시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이온이 계속된 물음을 카밀루스는 미소로 얼버무렸다. 그가 옆으로 와 자세를 살며시 낮추어 다시 이온의 손을 꽉 잡았다.
“어서 욤뇽이 찾으러 가야지.”
“카밀루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응?’ 하고 묻는 듯이 이온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 계약의 내용이 정말 심상치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왜 자신 때문에 이런 배수진을 쳐야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카밀루스에게도 뭔가가 있는 건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뭔가가?
그러나 카밀루스는 살며시 흐트러진 이온의 밀빛 머리를 다정히 다듬어 줄 뿐이었다.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나도 별거 없으니까.”
최대 사망까지 페널티를 걸어 놓고 별게 없다고?
그렇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온은 간신히 참았다.
“……그럼 내 저주가 뭔지는 알아?”
다음 질문에 이온의 앞머리를 넘겨 주던 카밀루스의 손이 멈칫했다.
“정확히는, 아니. 그 저주 때문에 마나의 흐름이 전부 막힌 건 맞는데…….”
“네가 해석 못 하는 저주면 너보다 더 강한 사람이 건 저주라는 뜻이야?”
이온의 질문에 카밀루스의 표정이 그제야 심각해졌다. 미간을 살며시 좁히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아, 마법적 통찰력도 결국은 지식에 기반한 것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깜깜이인 걸 보면…… 나보다 강한 자일 확률이 높긴 하지.”
“너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어?”
다들 카밀루스가 돌연변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는 각각 마나를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이 따로 있다. 일부는 수련을 통해 확장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선천적으로 어느 정도의 범위가 정해지기 때문에 한계치가 명확했다.
그런데 카밀루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사람이 수십 년을 수련해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마나를 이미 가지고 태어났다.
다들 이런 사람이 둘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특별함을 별것 아닌 듯이 취급했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무적은 아니야. 그리고 이미 내가 존재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하나 더 있다고 그렇게 놀랄 일이겠어? 게다가.”
“게다가……?”
“마탑주가 오늘 공개 망신을 당하긴 했지만…… 그 사람의 밑천이 그 정도일 리는 없다고 봐야 하지 않나.”
작게 중얼거리는 카밀루스의 표정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드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