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은 고개를 기울였다.
“일부러 당해 줬다는 말이야? 그럴 이유가 없잖아.”
마탑주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황실의 총애를 등에 업은 데다 대단한 능력까지 겸비한 대마법사였다. 그러면서도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어 신비하면서도, 두려움을 일으키는 존재.
그러나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카밀루스가 한 짓으로 하루아침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 스스로가 한 말대로 마탑의 명성을 그 자신이 망쳐 버렸다.
그런데 거기서 얻을 게 있다고?
당연한 의문이 따랐지만 카밀루스는 제 의견을 철회하지 않았다.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구나, 그 사람을.”
묻는 소리에 카밀루스는 잠시 침묵했다. 고민하는 듯 걷는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그들의 눈앞에 어느새 황성의 이름 없는 탑이 위치해 있었다.
어떤 이유로 저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수많은 이들이 떨어져 죽어 원혼이 된 그 탑을 올려다보며 카밀루스가 퍽 냉정한 목소리를 냈다.
“그럴 수밖에. 그자 때문에 난 15년 넘게 저 탑에 갇혀 있어야 했어.”
카밀루스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애초에 제게 기억이 있기도 전부터 두 팔과 두 다리가 강력한 금제로 묶여 있어 탑 밖으로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몸이었지만, 자신을 가둬 둔 그가 찾아왔을 때 몇 번 반항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봐야 했지. 그자의 압도적인 힘을.”
그럴 때마다 마탑주 재니스는 무감한 얼굴로 카밀루스를 보란 듯이 제압했다. 그리 많은 힘을 들이지도 않았다.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간단히 그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면 카밀루스는 한동안 두려워서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카밀루스.”
이온의 부름에 카밀루스는 굳었던 얼굴을 풀고 금세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까닥했다.
“여기 있네, 욤뇽이.”
고갯짓을 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욤뇽이가 제 도톰한 꼬리를 안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아.”
그들이 있는 곳은 탑으로 향하는 통로가 나오기 전에 있는 오래된 성전 터였다.
아주 오래전, 오브라이언의 건국 당시 초대 황제를 도왔다는 신성한 동물인 블랑셰를 기리던 성전.
이제는 잔해조차 남지 않은 그곳의 터에 욤뇽이가 늘어져 자는 모습을 발견한 이온이 얼른 그 앞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황성 내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이라지만 이렇게 무방비하게 땅바닥에서 자고 있다니.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몸에서 살며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달빛처럼 은은한 빛에 휘감겨 있어 반짝거리는 하얀 비늘이 유난히도 매끄럽게 보였다.
어째 몸도 조금 커진 것 같은 욤뇽이를 이온이 조심스럽게 안아 품에 들였다. 카밀루스는 지켜보다가 그의 어깨를 안으며 팔을 받쳐 주었다.
이온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욤뇽이를 내려다보았다. 꿈이라도 꾸는지 입술을 오물거리는 녀석을 보면서 이온이 물었다.
“욤뇽이는, 정체가 뭐야?”
왜인지 제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 한 질문이었지만 카밀루스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드래곤.”
카밀루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이 세계에서도 드래곤은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의 동물이었다.
“어디에서 발견했어?”
“내가 발견한 건 아니었지. 이 녀석이 탑에 온 게 먼저였으니.”
하긴, 이온이 이 몸에 들어오기 전부터 욤뇽이가 카밀루스를 주인으로 삼고 있었으니 그 수 외에는 만날 방법이 없긴 했을 터였다.
카밀루스는 욤뇽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동그란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이온의 몸에서 욤뇽이가 꼬리를 꿈틀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강한 마나에 끌리는 것 같아. 처음 만났을 때 내 몸의 마나를 몽땅 가져갔었거든. 그러더니 손가락 두 마디만 했던 게 조금 커졌어. 덕분에 난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했지만.”
“꾸……?”
깨어난 욤뇽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밀루스와 이온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오랜만에 만나는 제 주인은 무시하고 언제 삐쳤냐는 듯이 이온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꾸우우우.”
[상태 이상: 호의]
[화이트 드래곤이 플레이어에게 짙은 호의를 느낍니다.]
잔망스러운 녀석의 모습에 카밀루스는 헛웃음을 쳤다. 그래도 서운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이젠 나보다 널 더 좋아하니까, 네가 데리고 있는 게 맞아.”
“꾸우!”
카밀루스의 말에 동의하듯이 외치는 욤뇽이의 모습에 결국 져 버린 이온이 녀석의 통통한 얼굴에 제 뺨을 비볐다.
“알겠어, 카밀루스한테 안 보낼게. 그러니까 화 풀어. 응?”
“꾸우.”
“추운 데서 이게 뭐야. 빨리 집에 가자.”
이온이 그러고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바지의 주머니를 벌리자 욤뇽이가 끄으응, 소리를 내더니 몸을 줄이고는 주머니에 머리부터 집어넣어 쏙 들어갔다.
하지만.
‘어째 좀 빡빡해진 거 같은데?’
이온은 평소보다 주머니 속이 빠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까 조금 커졌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욤뇽이도 불편한지 주머니 안에서 자세를 계속 트는 게 느껴졌다.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이 멈추고 나서야 이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욤뇽이도 찾았으니 이제 연회장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하지만 카밀루스가 이온의 손을 끌어당겼다.
“성 밖에 공작가의 마차가 있던데, 데려다줄게.”
“어, 하지만…….”
성 밖에 크레이거가의 마차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엄청 바빴으니 그런 걸 알아볼 시간 따위 없었을 텐데.
아까의 결계 사건도 그렇고, 그는 왠지 돌아온 이후부터 모든 상황을 손바닥 위에 둔 느낌이었다.
“버니언이 보고 싶은 게 아니면 돌아갈 필요 없잖아. 조금이라도 덜 부딪쳐야지. 안 그래?”
아직 마음이 반반인 이온은 그에게 잡혀 황성 입구로 끌려갔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반박했다.
“이러다 정말 이상한 소문이 날지도 모르겠어.”
카밀루스는 그에 웃어 버렸다.
“그건 이미 피할 수 없지. 아까 내가 공개적으로 너에게 인사했던 걸 잊었나?”
“…….”
“앞으로 들어올 청혼서도 전부 거절할 예정이니까, 더 그럴 거야.”
이온은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아직은 으슥한 곳이라 사람의 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큰길로 나가기 전에 이온은 몸을 살며시 뺐다. 카밀루스는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이온에게 제 품 안에 있기를 강요하진 않았다.
떨어지고 나니 조금 쌀쌀한 저녁의 공기가 목 안을 살살 자극하는 것에, 한 번 목을 가다듬은 이온이 냉정히 한마디 했다.
“굳이 그렇게 해서 네가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그래도 오늘 일 정도는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으니까 앞으로 잘 처신해.”
이온 크레이거를 노골적으로 쫓아다니면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카밀루스의 활동 영역이 제한될 터였다. 이온은 아니더라도, 크레이거 공작은 일단 황실파로 분류되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정치적 목적 따위 없다는 것이 사실이긴 한지, 카밀루스는 그런 것은 전혀 논외로 쳤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다.
“난 정혼자 따로 두고 입으로만 사랑 놀음 하는 놈들처럼은 안 해.”
“그게 뭐야.”
가슴이 간질간질한 게, 괜스레 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
“이온, 나 그간 아무한테도 눈길 안 줬어. 내 순정은 다 네 거야.”
“…….”
이온은 손수건으로 입을 살며시 가리며 시선을 반대쪽으로 피했다. 그러자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야에 들어왔다.
두 사람을 알아본 몇몇이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무언가 얘기하는 중이었다.
자신들의 대화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들리지 않을 테지만 민망해진 이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카밀루스의 눈길은 계속해서 그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나의 정인이라는 걸, 온 세상이 다 알도록 할 거야. 그리고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하도록 내가 널 지켜 줄 거야.”
이러다가 진짜로 비렌시움 대공이 진짜로 크레이거가의 소공작을 열렬히 짝사랑한다는 소문이 쫙 퍼지겠다.
이온은 눈을 꾹 감고는 앞서 나갔다.
“빨리 가 봐야겠어. 몸이 안 좋아져서…….”
“이온!”
이럴 때는 오늘내일하고 있는 몸이 핑계가 돼 주니 참으로 편리했다.
마침 성문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온은 제 생애 가장 빠른 걸음으로 거의 뛸 듯이 걸어갔다. 그러고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두리번거리며 마차를 찾았다.
“소공작.”
기다리고 있던 에렌스트 경이 이온을 발견하자마자 그를 불렀다. 그에 이온이 얼른 마차로 앞으로 가 카밀루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태연한 그 모습에 카밀루스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성 밖엔 연회장에서 조금 일찍 나온 이들이 각자 마차에 올라타는 중이었고, 그만큼 대기하는 시종이나 시녀들도 많았다.
카밀루스는 이번엔 따라 주겠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이온의 기사를 돌아보았다.
“알렉사이 에렌스트 경, 인가?”
묻는 말에 에렌스트 경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대공을 뵙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온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쳤다.
‘본 적도 없는데 알렉을 어떻게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