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은 찬 공기를 막기 위해 도로 창을 닫았다.
아까 카밀루스가 마나를 쏟아부어 줬을 때 컨디션이 확 좋아졌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금세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진짜 지긋지긋하네.’
오랫동안 아팠던 이 몸이 과연 저주 하나 풀린다고 회복이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온은 제 앞의 시스템창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늘 그렇듯이 마음을 읽은 듯이 몇 개의 창이 활성화되었다.
[능력치
ATK(공격력): 0
MP(마나): 0
STR(근력): 1]
[…….]
[상태 이상: 저주. □□가 당신에게 저주를 걸었습니다. ※□□의 사망 시 해제됩니다.]
[…….]
[상태 이상: 병약함. □□의 저주에 따라 기력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돌연사 또는 건강상 이유로 사망할 확률이 200% 상승합니다.]
전부 제 생존과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 찬 저 창들을 보다 보면 가끔은 돌아 버릴 것 같은 때가 있었다.
‘도대체 이 게임의 결말은 뭐야?’
이온 크레이거의 생존인가, 아니면 죽음인가.
가끔은 방치를 해 둬서 안심해도 되나 싶을 때가 되면, 미친 듯이 사람을 쪼아 댔다. 살아남으려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온도 좀 지쳐 가고 있었다.
몇 년을 찾아 헤맸지만 이 저주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조차 만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저 ‘□□’가 누군지는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한때는 카밀루스를 가둬 두었다는 마탑주를 의심해 그쪽을 파 보았지만, 마탑주가 온종일 틀어박혀 있는 마탑 쪽은 접근도 힘들뿐더러 아무리 시간을 투자해도 자신의 저주와 연결할 만한 고리가 보이지 않았기에 일정 시간이 지나서는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애초에 마탑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마나를 증폭하고 확장해서 사람들을 이롭게 만들 것인가였으므로 이 저주처럼 마나의 흐름을 극단적으로 억제하는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과 같은 경우는 그들의 연구 대상조차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각지에 있는 사이비 마법사 집단들도 알아보았지만 역시 이 방면으로 지식이 있는 쪽은 없었다.
이쯤 되니 과연 □□가 실존 인물은 맞는 건지 의심이 되었으나, 그런 가정까지 해 버리면 자신의 저주는 아예 해결 불가능한 것이 되니 차치해야만 했다.
생각을 잇다가 이온은 오늘 막 활성화된 퀘스트를 확인하며 표정을 굳혔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어머니의 정체 알아내기]
‘저주가 카밀루스의 어머니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나.’
‘자유도’를 보장한다는 콘셉트에 따라 이온에게 시스템의 간섭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퀘스트가 활성화됐다는 것은 그만큼 이것이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일 터였다.
“……그래, 차라리 이쪽이 쉽겠어.”
이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퀘스트를 수행하다 보면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손을 안 댈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저택에 도착해 에렌스트 경은 황성 앞으로 인원을 더 보내는 등의 일을 처리하느라 한동안 바빴다.
그사이 씻고서 잠옷으로 갈아입은 이온은 창문을 열어 두고 욤뇽이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다행히 무사히 새를 쫓아냈는지 얼마 안 가 창문으로 날아든 욤뇽이는 이온이 책상 위에 놔둔 쿠키를 보자마자 열심히 집어먹었다.
녀석이 배가 불러 이불 속으로 날아가 잠을 청할 때가 되어서야 아직 창문을 열고 서 있는 이온을 발견한 에렌스트 경이 방으로 올라왔다.
“소공작, 밤바람이 찬데 이러시면 또 감기에 걸리십니다.”
가볍게 노크를 하고 들어선 그가 얼른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것에 이온이 집무실로 연결되는 문을 열고 옆방으로 건너가며 투덜거렸다.
“그건 이미 만년인데.”
“저번엔 폐렴 와서 죽을 뻔했던 거 기억 안 나십니까?”
“……네가 늦는 거 같길래 기다린 거뿐이야.”
변명하던 이온은 터벅터벅 걸어 책상 앞 의자에 앉으려다가 아까 카밀루스가 걸쳐 주었던 옷이 책상 위에 널브러진 걸 보고는 에렌스트 경에게 건넸다. 잔소리 그만하라는 뜻을 알아들은 에렌스트 경은 한숨을 내쉬더니 옷걸이에 카밀루스의 옷을 걸쳤다.
“그래서 주무시지 않고 저를 기다리신 이유가?”
이온은 책상 한가운데 둔, 연회장에서 받았던 약물이 보글거리는 것을 물끄러미 보면서 한동안 침묵했다.
턱을 괴고 잠시 넋이 빠져 있는 이온의 모습에 에렌스트 경이 책상 앞으로 걸어와 그를 불렀다.
“도련님?”
이온이 그제야 시선을 올려 에렌스트 경을 보았다.
“아, 미안. 생각이 좀 많아서.”
“……대공 때문에요?”
에렌스트 경의 질문은 짧았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온은 제 속을 들킨 느낌이라 그만 웃어 버렸다.
“아니라곤 못 하겠고.”
대답을 듣고 조금 답답해하는 표정을 지은 에렌스트 경이 냉정하게 상황을 짚었다.
“며칠만 지나도 이제 귀족들은 파가 둘로 갈리겠죠. 황제와 대공 중 어디에 붙는 게 더 나은지 벌써부터 저울질을 해 대고 있을 테니까요.”
“알렉은 어디가 더 낫다고 생각해?”
“대공은 어차피 지금으로선 명확한 세력이 없습니다. 애초에 본인 자체도 황제와 반목하겠다는 명확한 뜻을 드러내지도 않지 않았습니까?”
“그도 그렇지. 게다가 정통성도 없고. 그가 황좌를 차지하기 위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다고 해도 사생아라는 꼬리표는 계속 따라다닐 거야.”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이라 건성으로 대꾸하고 있던 이온에게 에렌스트 경이 불쑥 일침을 날렸다.
“아시면서 저 옷을 걸치고 오신 이유가 뭡니까?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 텐데요.”
이온의 시선이 카밀루스의 옷으로 향했다. 어깨의 견장이나 화려한 장식들 때문에 여러모로 거추장스럽고 눈에 띄는 옷이었다.
마차 안에서야 혼자 있었으니 별문제가 안 되었지만, 저택에 들어설 때 사용인들이 모두 본 것은 결이 조금 달랐다.
아무리 이온이 크레이거가의 소공작이라지만 저택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편일 수는 없었다. 지금 에렌스트 경은 그 점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었다.
“황제가 더 집요해지길 원하셨던 겁니까?”
그럴 리가. 이온은 그런 놈을 달고 다니는 악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에렌스트 경의 말도 충분히 타당했기에 이온은 할 말이 없었다. 저 옷을 입고 온 건, 그냥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니까.
“카밀루스는, 대공이라서 저 옷을 내게 건넨 게 아니야.”
그가 다른 목적 없이 저 옷을 건넨 것처럼.
하지만 에렌스트 경은 이번에도 꽤 예리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황제께서도 사심으로 도련님을 쫓아다니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는데. 꼭 혼나는 기분이네.”
“중심을 잘 지키십시오.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 온 게 전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만큼이나 흔들릴 것 같아?”
“…….”
‘그런 것 같은가 보네.’
이온은 에렌스트 경의 침묵을 그렇게 해석했다. 좀 억울한 면이 있긴 했지만, 에렌스트 경은 이런 말을 해도 될 만큼 자신을 충분히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입에서 이온으로서도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그분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이온이 에렌스트 경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겨우 초 몇 개에 의지해 방을 밝혀 둔 터라 에렌스트 경의 굳은 얼굴이 더 매섭게 보였다.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라고 하실 겁니까? 소공작께서는 그분을 구한 순간부터 이미 자신의 인생 전부를 내던지신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순간적으로 잔뜩 긴장했던 이온은 하, 하고 한숨을 내쉬며 몸을 풀었다.
그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니 일단 여유롭게 화제를 돌렸다.
“그 일, 함구령이 내려진 것 아니었어?”
“저를 잡아가라고 황실에 고발하실 겁니까?”
“당연히 아니야.”
이온의 말에 에렌스트 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똑바로 눈을 마주쳐 왔다.
“그럼 계속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황태자궁에서의 그 난리 이후 어떠셨죠? 깨어나서 그분이 북부로 떠나신 걸 알고 난 다음에 며칠 동안이나 의욕 없이 누워만 계셨죠. 몸이 다 나았는데도 방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
그간 참아 왔던 말들이 꽤 많았던지 에렌스트 경의 말이 유난히 길어졌다. 이온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이전의 제 모습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기분이 좀 묘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또 어떠셨는지 기억나십니까?”
“어땠는데, 내가.”
에렌스트 경이 책상 앞으로 더 바짝 다가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책상 한가운데 있는 약병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는 이온 쪽으로 더 바싹 밀었다.
“저주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겠다고 매번 이렇게 약이나 찾아다녀야 하는 신세인데 그 와중에 이곳저곳 돌아다니시더니, 공작가 재산의 거의 전부를 본인 손에 넣으시고 부친 몰래 길드도 키우셨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대의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 틈이 생겨야 더 쉽게 파고들 수 있다는 이유로 귀족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같은 황실파였던 솔친 후작과 제퍼드 백작이 귀족파로 돌아서는 과정에서 도련님께선 황실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한데 그 모든 게 정말 자신만을 위한 일이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이온이 눈썹을 까딱했다.
“무슨 의미지?”
“그분을 지지하기 위해서 기반을 마련하고 계셨던 것 아니냐고 묻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