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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61)화 (61/317)

“그분을 지지하기 위해서 기반을 마련하고 계셨던 것 아니냐고 묻는 겁니다.”

이온은 제 행동이 이런 식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 그러나 아예 이해되지 않는 추론까지는 아니긴 했다.

이온이 이렇다 할 반응을 내지 못하고 있자 에렌스트 경은 오랜만에 제 마음껏 이야기를 쏟아 냈다.

“도련님은 모든 게 다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항상 말씀하셨죠. 하지만 당신께선 이미 이 나라에서 가장 권세 높은 크레이거 공작가의 영식입니다. 가만히 있었어도 겨우 몸 하나 지키는 것 정도에는 아무런 장해가 없었을 겁니다.”

그동안 이 말들을 못 해 입이 간지러웠을 텐데 대체 어떻게 참아 냈는지 몰랐다.

이온은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신은 힘을 키워야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지만, 사실 크레이거 공작이 아픈 아들을 외면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심지어 공작은 당시의 자신보다는 훨씬 운신의 폭이 넓었다.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몇 년에 걸쳐 이런저런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다.

“네 논리대로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겠어. 내가 8년 동안 그를 오매불망 잊지 못해 온갖 일을 다 벌였다…….”

“거기까지는 생각 안 했는데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요.”

이온은 왜인지 머리가 무거워져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솔친 후작 건은 버니언이 엿 먹었으면 좋겠어서 그런 거였어. 대의는 없더라도 그 자식이 힘을 키우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

그 과정에서 제 정체 일부가 드러날 뻔했던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지만 그렇게 손해 본 일은 또 아니었다. 일단 지금까지는 뒤쫓아오는 노아기사단을 잘 따돌려 틀어막고 있으니 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었고.

그런데 아무래도 이 주제에 한해서는 에렌스트 경의 관심사가 이온의 안위가 아닌 모양이었다.

“나머지는 제 해석이 맞는 겁니까?”

“알렉.”

추궁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피곤해진 이온은 그만하라는 의미로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작은 스트레스에도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굳이 저를 자극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기색을 알아차린 에렌스트 경이 조금 주춤한 사이 이온이 한숨 섞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게 너에겐 중요한 거야? 나한테 사심이 있는 게 아니라면 별로 상관없는 일일 거 같은데.”

“…….”

에렌스트 경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이온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금세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에렌스트 경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약병의 뚜껑 위에 검지를 올리자, 그가 순순히 손을 물렸다.

“그리고 대공은, 그래, 지금은 분명히 정치적 가치는 없지. 하지만 크레이거가가 강성 황제파로 분류되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좋지 않을 수도 있어. 적당한 수준이라면 다른 쪽과 교류를 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는 의미지. 양다리를 걸쳐서 나쁠 것은 없으니.”

열쇠를 돌려 책상의 서랍을 연 이온이 그동안 모아 두었던 약병들 사이에 새로 수집한 예의 약을 끼워 넣으며 피곤함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뒤 도로 탁, 하고 서랍을 닫은 그가 에렌스트 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굳이 이런 말을 구구절절이 해야만 알아들을 줄은 몰랐는데.”

더는 간섭하지 말라는 이온의 명확한 의사 표시에 에렌스트 경은 제가 선을 넘었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그에 이온은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며 피곤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래, 안 그래도 카밀루스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니까.”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있었어, 그렇게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 나가려던 것을 이온은 겨우 단속했다.

실컷 선을 그어 놓고는 얼떨결에 마법 계약을 했다고 알리면 분명히 난리가 날 터였다. 그렇다고 아무 말 안 하면 더 수상해 보일 테니 이온은 적당한 말로 갈무리했다.

“황성 결계에 대한 소문 못 들었어?”

“들었습니다. 대공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황제한테 자길 죽여 달라고 하는 꼴인 것 같습니다만…….”

“오늘 행동은 그런 식으로 보이긴 했지.”

이온은 중얼거리며 시선을 허공으로, 아니 시스템창으로 향했다. 마치 제 뇌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이, 의도를 알아차린 시스템창이 늘 그렇듯 원하는 것을 띄웠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어머니의 정체 알아내기]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서 듣거나 단서를 찾는 등의 행위를 통하여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어머니의 정체를 알아내십시오.]

“그렇다면 알렉, 너는 버니언이 대공을 견제하기 위해 할 첫 번째가 뭐라고 생각해?”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으로 이온은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아마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 그 문제 앞에서 에렌스트 경은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그들을 따르는 기사들을 포섭하는 것?”

“일리는 있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그들은 원래 황제가 감시 목적으로 붙여 놓았던 사람들인데…… 대공에게 포섭된 경우니까. 게다가 8년 동안 그 험한 아이오딘의 치안을 함께 지키면서 반쯤 가족처럼 살아왔잖아.”

“그런 소문을 듣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대공의 성격을 잘 아는 버니언이니, 대공의 사람들을 포섭하기보다는 약점으로 잡으려고 할 거야.”

“기사들을 납치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렌스트 경은 가만 보면 버니언을 너무 심하게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버니언은 그 여우 같다는 선황의 아들이다. 언젠가 본인이 말했던 대로 황태자로서 부족함 없는, 아니 항상 최상의 교육을 받아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에게도 선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적어도 제가 어떤 처신을 해야 최악을 피할 수 있는지는 잘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건 최후의 수단이야. 그쪽을 잡아들이면 본인 꼴이 우스워질 거거든. 정말 잡아들이려고 마음먹는다면 억지 명분을 만들어야 해. 황실도 손 놨던 아이오딘의 땅을 지켜 온 그들을 대상으로 말이야. 거기에 카밀루스를 따르는 이들은 대부분 작위도 없는 기사들인데, 그렇게 되면 꼭 힘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잖아.”

“그럼……?”

“대공에게 남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봐.”

“그런 게 있습니까?”

에렌스트 경은 별 의미 없이 한 말일 테지만 질문이 꽤 씁쓸했다. 제 일도 아닌데 이온은 입 안이 떫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버니언이 이쪽을 들쑤실 가능성은 더 높다고 봐야 했다. 어떻게든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할 테니까.

“친모. 생사는 모르지만 살아 있을 가능성도 없진 않아.”

그녀가 대체 누구인지 짐작도 못 하게 선황이 꼭꼭 숨겨 놨지만, 카밀루스를 어디서 흙으로 빚은 게 아닌 이상에야 카밀루스의 생모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8년 전 사건 때문인지 에렌스트 경은 이온을 더 걱정했다.

“그보다는 소공작을 납치하려고 한다는 쪽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입니다만…….”

“선황도 죽은 마당에? 그것도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이 시점엔 버니언에게도 날 건드리는 건 상당한 부담일걸.”

“그분이 그렇게 상식적으로 판단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버니언도 눈치와 선이라는 게 있긴 있어.”

딱 자르는 이온의 말에 에렌스트 경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제야 버니언과 카밀루스 사이의 줄다리기가 그렇게 간단한 수 싸움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사실을 받아들였다.

“……인정하죠. 그래서 명령하실 건, 대공의 친모가 누군지 알아보라는 겁니까?”

“버니언보다 빠르게.”

“속도전이라면 그냥 대공께 여쭤보시면 되는 부분 아닙니까? 그런 걸 묻는다고 뭐라고 할 분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이온에게 그쪽은 이미 논외였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야. 선황의 치부를 들쑤시는 것이기도 하고, 아마 꽤 여러 사람의 이해가 엮인 것 같으니.”

“찾아는 보겠습니다만 단서도 없어서 쉽지는 않을 것 같군요.”

단서라…….

이온은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의 공백을 둔 뒤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 저택에 25년 이상 일한 사람이 있던가?”

이온의 기억 속에서는 선황과 크레이거 공작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로 보였던 적이 없었으나, 공작의 말에 따르면 어렸을 때는 달랐다고 했다.

어느 시점에, 어떤 사유로 둘이 갈라졌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공작가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라면 뭔가 들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시작이 막막하니 일단은 시기상으로 가까운 이들을 찾는 게 먼저였다.

이온의 물음에 에렌스트 경은 머릿속으로 몇몇 사람을 떠올리는 듯하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해 왔다.

“얼마 전에 몸이 아파서 퇴직한 버틀러가 있었죠. 그 사람이 그나마 오래 일했던 것으로 압니다만…… 나이도 많은데 어렸을 적부터 일했다고 했었으니 25년쯤은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확인해 봐야겠고요.”

이온이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버틀러, 지금 어디 사는지 알아봐.”

“예, 소공작.”

그러고 에렌스트 경이 평소처럼 곧장 나갈 거라고 생각해 이온도 자리에서 그만 일어났다.

오늘 하루 체력 소모가 컸던 터라 서둘러 쉬고 싶어 침실로 연결되는 문으로 걸어가는데, 에렌스트 경이 방에서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방을 건너가기 직전, 자신을 따라오는 시선을 느낀 이온이 그의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알렉?”

나가지 않고 뭐 하냐는 간접적인 물음에 에렌스트 경이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움찔했다.

“왜 그래?”

묻자 에렌스트 경이 천천히 걸어와 이온의 앞에 섰다. 이온은 그를 올려다보며 뭔가 싶어 다만 잠시 반응을 기다렸다.

얼마 안 가 에렌스트 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뭐가?”

“기사는 늘 주군을 충성으로만 대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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