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는 늘 주군을 충성으로만 대해야 할까요?”
“…….”
무어라 대꾸하기가 애매한 물음이었다. 의도가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질문조차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평소의 그와 무척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지금까지 에렌스트 경은 사심으로 자신을 대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걸까.’
이온은 갑자기 이런 화제가 나온 것이 당혹스러웠다. 하여 멍하니 보고만 있으니 에렌스트 경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올라왔다.
“저는, 그냥 당신께서 위험한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런데 도련님의 명령은 항상 위태로운 것들만 있죠.”
“무슨 의미지?”
“무모해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처럼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사세요.”
이온은 자신의 앞에 작은 상자 하나가 놓였음을 알아차렸다. 그 안에 든 것은 에렌스트 경과 자신 사이의 평화를 갈라놓을 어떤 재앙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온이 판도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눈앞의 상자를 열고 싶다는 충동은 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잘 숨겨 왔던 감정 하나를 흐릿하게나마 드러낸 에렌스트 경은 이온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특유의 곧은 눈빛으로 이쪽을 직시해 왔다.
목울대가 살며시 울렁거리는 것을 보면서 이온은 그가 긴장했음을 눈치채고는, 일부러 부드럽게 눈웃음을 그렸다.
“왜 그런 말을 해? 알잖아, 나 이기적인 거. 난 원래 내 안위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알아서 챙겨.”
그리고 걱정 말라는 뜻으로 에렌스트 경의 듬직한 어깨를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상대가 원하는 답변이 전혀 아님을 알았으나 이온은 이런 말로 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는 이런 말 외의 것은 못 할 만큼 마음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상태였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거절당해 버린 에렌스트 경은, 그러나 문턱을 넘으려는 이온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도련님.”
발이 덜컥 멈춰진 이온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빛이 비치는 이온의 눈이 흔들렸다.
갑자기 왜 이러냐고.
그만하라고.
이온의 눈빛에 담긴 뜻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에렌스트 경은 멈추지 않았다. 묵직한 어두움이 깔린 밤의 분위기가 그에게 불쑥 어떤 용기를 준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소공작께서 대공과 엮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까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을 텐데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직설적이었다. 이온은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뻔히 예상이 되었으나 일단 물었다.
“왜?”
“소공작한테는 너무 위험한 사람입니다. 딱 봐도 답 나오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대공을 흔들기 위해 당신을 흔들 겁니다. 설마 소공작께서 이런 판단을 내리지 못한 건 아닐 텐데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기는 한데…….”
이온이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 에렌스트 경을 납득시킬 만한 말이 있기는 할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계속 의뭉스러운 태도를 고집하면 그와의 대화를 영영 끝내지 못할 것이다. 이온은 그런 명확하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는 건 싫었다.
“어쩔 수 없이 방금 말을 정정해야겠네.”
중얼거린 이온이 날 선 눈으로 에렌스트 경을 쳐다보았다.
“그가 없었으면 지금 내가 살아 있었겠어? 알렉, 너는 목숨값 빚진 걸 잊는 후레자식 밑에서 일하고 싶은 거야?”
이온은 카밀루스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두 가지는 명확했다. 하나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카밀루스가 원치 않는 북부행을 선택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와중에 그가 남기고 간 마나석이 아니면 8년간 이온 크레이거의 삶이 훨씬 더 괴로웠을 거라는 점이다.
어쩌면 침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지금처럼 두 다리로 서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 점을 잊는다면, 그건 후레자식이 맞았다. 그게 이온이 카밀루스를 앞에 두고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에렌스트 경은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온은 그런 그의 손을 잡아 주며 한껏 날카로워졌던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 난 네 충성을 의심하고 싶지 않아.”
그러고 이온은 무언가 반응을 보기 전에 문턱을 넘고 등 뒤로 문을 닫아 버렸다. 계속 문 앞에 서 있는 듯, 한동안 에렌스트 경의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어둠이 깔린 방 안에 서서 그 소리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알렉.’
이온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에렌스트 경이 자신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은 알았다. 매일같이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있으면 마음이 약한 사람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쌍함도 누군가를 붙잡아 둘 수 있는 무기가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기에 이온은 그의 연민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왔다.
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마음으로 착각한다니.
“하아…….”
순간 머리 한쪽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자 이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지러움 때문에 그 자리에 주저앉은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두통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문밖의 에렌스트 경이 집무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불을 끄기 위함일 터였다. 곧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귀를 질러왔다.
울렁거림은 그 소리가 들리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가셨다.
이온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불 안에 기어들어 갔다. 이불을 젖히자 몸을 말고 있는 욤뇽이가 보여 녀석을 베개라도 되는 듯이 두 팔로 안았다.
“꾸응…….”
작은 생명체는 비몽사몽 한 상태인데도 온기를 찾아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자 욤뇽이가 무의식중에 마나를 흘려보낸 모양인지 따뜻한 온기가 이온을 감쌌고, 잔뜩 예민해진 신경이 서서히나마 가라앉아 갔다.
덕분에 졸음이 쏟아지자 이온은 눈을 감았다. 완전히 의식이 날아가기 전, 에렌스트 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대공을 흔들기 위해 당신을 흔들 겁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가 눈앞에 있으면 외면이 안 되었다.
바보 같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첫날부터 그 사실만 뼈저리게 느껴 버렸다.
잠깐 스치기만 해도, 아무리 멀리 있어도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온은 문득 카밀루스가 자신을 꽉 안아 주던 억센 그 감각이, 아직 제 몸에 남아 있음을 느끼고 왼팔을 손으로 감쌌다.
〈사랑할 수밖에 없어.〉
떠올리니 다시금 가슴이 뛰었다.
쿵, 쿵.
느릿하게 울리는 그 박동 소리가 자꾸만 귀를 어지럽혀 이온은 결국 다시 이불을 떨치고 몸을 일으켰다.
바스락, 하고 천이 스치는 소리가 일었다.
“…….”
어둠이 내리깔린 빈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심장의 두근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온은 손으로 왼쪽 가슴을 내리눌렀다.
“……그만해.”
이 몸에 들어와 살면서 가끔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감정에 지배당할 때가 있었다. 이온은 그럴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대체 누구인지.
어째서 아직도 이전의 자신이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고, 이온 크레이거의 기억만이 아주 종종 머릿속에 흘러들어 오는 건지 모르겠다.
이온은 침대에 앉은 채로 간간이 숨을 크게 들이켜다가, 마침내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리자 결국 도로 침대 밖으로 나갔다.
이유 없이 하얀 달빛이 비치는 창가를 서성였다. 그러다 시야 끝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 고개를 휙 돌렸다.
창문 너머에 있는 나무에 작은 새 하나가 앉아 이곳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온통 시커먼 깃털로 뒤덮여 있는 새. 새의 눈을 보지 못했다면 아마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온은 왠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모든 행동을 멈췄다. 순식간에 몸이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푸드덕!
어디선가 날갯짓 소리가 들려오더니 커다란 새가 날렵하게 날아와 그 검은 새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끼이이이이이!”
돌연 찢어지는 듯한 새 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사냥을 성공한 커다란 새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
갑자기 일어난 일에 놀란 이온이 창문가에서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다리가 떨려 주저앉을 뻔했던 것을, 근처의 서랍장을 잡아 간신히 몸을 지탱해 막았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제가 목의 마나석을 꼭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위험하다고 느낄 때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만지는 습관이 있었다.
이온은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다가, 제가 무얼 본 것인지 차분히 짚었다.
활짝 펼쳐진 날개.
능숙하게 사냥감을 낚아채는 커다란 두 개의 발.
“……카밀루스?”
방금 그것은 분명히 그의 독수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