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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64)화 (64/317)

* * *

가을이 깊어 가서인지 햇살이 눈부신 낮이었음에도 꽤 쌀쌀한 날씨였다. 그 때문에 찬 바람이 들어 창가에 앉은 이온이 연신 콜록대고 있자, 에렌스트 경이 그에게 새 손수건을 건네었다.

“도련님, 이걸.”

“응…… 고마워.”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며 본인의 손수건을 품 안쪽에 넣은 이온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 그들은 교외에 위치한 한 카페에 있었다. 모습이 잘 안 보이도록 나무로 만든 간벽이 쳐진 안쪽에 앉아 어제 에렌스트 경이 말했던 은퇴한 버틀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알고 보니 그 버틀러는 이온이 막 이 몸에 들어왔을 때 자신을 부축해 주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어느 날 몸이 안 좋아 요양을 위해 퇴직을 한다고 해서 아쉬운 마음이 없잖아 있었는데, 오늘 볼 수 있다니 반가운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친절하기도 했고 자신을 꽤 예뻐해 주던 할아버지였으니까.

그 인연 덕분인지 아침에 급한 일이니 잠시만 시간을 내어 달라는 편지를 보내니, 다행히 바로 알겠다고 했다.

〈두어 시쯤이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온은 혼자 산다는 그 버틀러의 집에 다녀온 전령의 말을 떠올리며 품에서 시계를 꺼냈다.

달칵, 하고 뚜껑을 열자 무브먼트가 째깍째깍 바쁘게 움직이는 시계는 어느새 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다림이 생각보다는 길었다. 아무리 ‘두어 시쯤’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했더라도 이렇게 늦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뜻 아닐까?

이온의 미묘한 불안감을 알아차렸는지 맞은편에 앉아 안색을 살피던 에렌스트 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나오려는 걸까요?”

이온은 예전 그 버틀러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꽤 진실한 사람이었고, 오랫동안 버틀러 일을 해 온 만큼 꽤 철두철미한 성격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남을 바람맞힐 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못 나오는 무슨 사정이 생긴 걸지도.”

이온의 중얼거림에 에렌스트 경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가 집으로 가 보겠습니다.”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지만 아마 몸이 꽤 쑤시기도 한 모양이었다. 이온은 왠지 그의 머릿속이 보이는 느낌이라 픽 웃었다.

“그래, 같이 움직이자.”

그러고 본인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겉옷을 챙기는데, 에렌스트 경이 만류했다.

“길이 꽤 멉니다. 여기까지 오시는 데도 고생하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둘 다 자리를 비우면 길이 엇갈릴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둘 중 한 곳에는 있을 테니까 같이 움직여 봤자 발품을 더 파는 것밖에 더 하겠어? 그보다 어제부터 날 감시하는 자가 있으니 혼자 있는 게 나한텐 더 위협적이야.”

옷의 단추를 대충 잠근 이온이 먼저 밖으로 나가자 얼른 계산을 마친 에렌스트 경이 따라 나왔다.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없나 봐?”

“아마도요.”

대답한 뒤 근처에 맡겨 둔 말을 끌고 온 에렌스트 경이 먼저 이온의 허리를 받쳐 말 등에 올라타게 해 주었다.

이온은 순하게 생긴 말이 귀를 쫑긋거리는 것을 보면서 에렌스트 경이 뒤에 올라타는 것을 기다렸다. 잠시 후 이온의 허리를 단단히 잡은 그가 속삭였다.

“조금만 참으세요.”

전에는 둘이 같이 말을 타고 다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제저녁의 기억 때문인지 이온은 왠지 어색해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에렌스트 경은 평소와 다른 이온의 기색을 알아차리긴 했지만, 모르는 척 말을 몰기 시작했다.

* * *

“워, 워!”

엉덩이가 슬슬 아파 올 때쯤, 에렌스트 경이 한 교외의 마을에서 말을 멈췄다. 주소가 적힌 쪽지를 확인한 그가 말에서 내려 골목길로 들어섰다.

“아앗!”

한데 그러자마자 작은 공 하나가 날아와 에렌스트 경의 등을 쳤다. 에렌스트 경이 당황해 돌아본 곳에는 몇몇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녀석들 중 하나가 공을 주우러 달려오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아저씨.”

이온은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아저씨 소리를 듣고 중얼거리는 에렌스트 경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어쨌든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는 모습에 더 뭐라고 하지도 못한 채, 에렌스트 경이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을 걸었다. 이온은 그곳의 정경을 눈에 담으며 그를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걸음이 어느 집 앞에서 멈추었다.

“주소는 여기군요.”

“아…….”

대문도 없는, 생각보다 훨씬 허름하고 작은 집의 모습에 이온이 내심 놀라고 있는 사이 에렌스트 경이 문을 두드렸다.

쾅쾅, 쾅쾅쾅.

그런데 역시 길이 엇갈렸던 걸까? 몇 번을 두드려도 안쪽에서 반응이 없자 에렌스트 경이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에 아무도 없는 모양입니다만.”

“…….”

이온은 다시 시계를 꺼내 보았다. 벌써 3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그렇게 긴 거리는 아니라지만 다시 돌아갔다가 또 엇갈리면 더 지체가 된다.

이온은 좁은 골목길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골목길을 들어올 때 공놀이를 하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오면서 본 애들한테 이 집 할아버지를 본 적 있느냐고 물어봐. 반대편으로 갔을 리는 없으니, 일단 골목을 나갔을 때는 저쪽으로 향했겠지.”

“알겠습니다.”

그러고 돌아온 에렌스트 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본 사람이 없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아이들은 점심을 먹은 이래로 죽 그 자리에서 놀았다고 했음에도 그랬다.

이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점심 전에 길을 나섰다면 약속 시간에 늦을 리가 없었다. 그럼 혹시 애초에 나오지도 않은 건 아닐까? 그런데 문을 두드렸는데도 반응이 없다는 것은…….

“만나기 싫은 건가?”

“하지만, 좋아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다고는 해도 사람 속이야 훤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온이 작은 집을 기웃거리며 살피는 기색을 보이니 에렌스트 경 또한 건물 옆면으로 향했다.

집 자체는 1층밖에 없는 데다 창문도 눈높이에 있어 마음만 먹으면 안을 확인 못 할 것은 아니었다.

그가 창문에 쳐진 커튼 사이를 유심히 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이온에게 말했다.

“안쪽에 초가 켜져 있는데요.”

“사람이 있다는 거네.”

이온이 실망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에렌스트 경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렇지만 역시나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이온은 시간 낭비한 게 너무나 싫었지만 본인이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었다. 강제로 끌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돌아가자. 물어볼 사람이 이 사람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예.”

그러고 뒤돌아서려는데, 옆집에서 누군가 문을 슥 여는 게 보였다. 그곳에서 한 여자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저기요.”

꽤 젊어 보이는 여자가 두 사람을 부르자 이온이 걸음을 멈칫했다. 에렌스트 경이 그런 이온과 여자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곧장 경계했다.

“무슨 일이지?”

“그게, 별건 아니고…… 저기 할아버지가 아침마다 산책을 하는데 오늘 안 나왔거든요. 진짜 규칙적인 분이신데.”

“그래서?”

“아시다시피 할아버지가 좀 늙었잖아요. 혼자 살기도 하고…….”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이온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곧장 알아들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확인하기는 싫으니 이쪽더러 확인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이온은 자신을 돌아보는 에렌스트 경에게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창문 쪽으로 다가간 에렌스트 경이 안쪽을 살폈다. 옆집 여자가 문을 닫으면서 팁을 알려 주었다.

“그 창문 오래돼서 위아래로 흔들다 보면 창틀에서 빠질걸요.”

그러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이온도, 에렌스트 경도 황당해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창문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자 진짜로 창문이 창틀에서 쑥 빠져 버렸다.

그러는 동안 꽤 큰 소음이 일었지만 집 안쪽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에렌스트 경은 창문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먼저 훌쩍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뒤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이온은 왠지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전체적으로 조도가 낮았고, 불은 꽤 오래 켜 두었는지 초가 꽤 많이 타 촛농이 주변에 잔뜩 떨어져 있었다.

이온은 일을 하다 만 듯 무언가 잔뜩 든 바구니들과 소파 한쪽에 쌓여 있는 책 등, 곳곳에 생활감이 남아 있는 거실의 풍경을 살폈다.

공작가에서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일했던 버틀러인데, 이런 작고 허름한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그리 마음이 좋지 못했다.

한 번 거실을 훑은 이온은 그 뒤 에렌스트 경을 따라 방을 하나둘씩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마지막인 네 번째 방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에렌스트 경의 탄식이 먼저 흘러나왔다.

“아…….”

꼭 닫힌 커튼 앞에 있는 침대 위, 조용히 누워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얼굴에 그늘이 진 그는 마치 잠든 듯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떤 기분 나쁜 예감을 느낀 에렌스트 경은 굳은 표정으로 그의 앞에 다가갔다. 코에 손을 가져다 대 숨을 가늠하는 그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며 이온이 먼저 물었다.

“……어때?”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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