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기침하는 척하느라 잔뜩 긴장된 목구멍으로 침이 잘못 삼켜졌다. 사레가 들린 이온이 고개를 숙이고 기침을 해 대니 카밀루스가 얼른 이온의 어깨를 붙잡아 주며 걱정 어린 말을 속삭였다.
“괜찮아, 이온?”
“괘, 괜찮…… 흡.”
그가 제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을 느끼면서 이온은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까지 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다면.
이온은 8년 전에 저를 처음 만났을 때 기침을 흘리자 안절부절못하던 카밀루스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칠 리 없을 테니까.
당황한 그가 이온의 손을 꼭 잡아 주며 품에 들였다.
“다 알아들었으니까 더 말하지 않아도 돼.”
제 발 연기에 이렇게까지 잘 속아 주다니 이온은 감격스러운 지경이었다. 동시에 양심이 쿡쿡 찔려 어설픈 대답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으, 응…….”
[강력한 마나의 기운이 플레이어의 몸에 스며듭니다.]
[상태 이상 ‘마나 소실’로 인하여 효과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보니 카밀루스가 제 몸에 마나를 주입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자신에겐 제국 최고의 마법사인 그가 주입하는 마나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아마 카밀루스도 그것을 느끼는 모양인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는 이온의 손을 한번 힘주어 잡았다가 풀며 에렌스트 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기까지 뭘 타고 왔지?”
“말을 타고 왔습니다. ……장거리는 힘들어하시니 돌아갈 때는 다른 걸 이용하긴 해야겠군요.”
에렌스트 경은 예의 ‘다른 것’이 뭔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카밀루스가 해결할 것을 알지만, 괜히 약간의 반항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가 공작 저까지 소공작을 데리고 가겠다. 어차피 내 옷을 찾으러 가야 하니 그래도 되겠지?”
뒤의 질문은 이온을 향한 것이었다. 아마 승낙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바로 날아갈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에렌스트 경이 대답을 가로챘다.
“송구합니다만, 소공작께서 저녁에 일정이 있으십니다. 2시간 정도 뒤에.”
원체 에렌스트 경이 거짓말을 못 하는 성정이기도 하지만, 저건 카밀루스를 견제하기 위해 뱉은 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잘라 말했다.
“취소해. 이런 상태로는 어디든 안 보내.”
“……그걸 소공작께서 원하시지는 않으실 텐데요?”
아.
이온은 에렌스트 경의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깨닫고 말았다. 두 사람, 상극이구나 하고. 실제로 서로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주고받을 때마다 각자의 표정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왠지 말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라 이온이 얼른 껴들었다.
“그 건은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알렉.”
그런데 또 뭐가 문제인지, 에렌스트 경과 카밀루스 둘 다 더 표정이 가라앉았다. 이온은 심상치 않은 기운에 카밀루스를 밑에서 올려다보았다.
좁혀진 미간과 날카로워진 눈, 그리고 완고하게 닫힌 입까지. 카밀루스는 딱 봐도 기분이 매우 저조해 보였다.
에렌스트 경은 어찌어찌 이해한다 쳐도, 사실상 자신이 편을 들어 준 카밀루스가 왜 이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넌 왜 그래?”
“…….”
그에 카밀루스의 입이 살짝 벌어졌으나, 결국 말소리를 내뱉지 못하고 그냥 닫혔다.
이 분위기에 차마 저 기사는 애칭으로 부르는데 왜 나는 이름으로 부르냐고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이온이 의심스러워하는 눈으로 살폈지만 카밀루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온을 두 팔로 안아 올려 버렸다. 에렌스트 경은 카밀루스가 금세 떠날 것임을 알고 얼른 말했다.
“신고는 제가 하고 갈 테니 걱정하지 마시십시오.”
“저주는 흔적을 없애 놓았어.”
카밀루스가 뒤를 힐끗하며 한마디 하자 에렌스트 경은 두 손을 모아 경의의 뜻을 내비치면서 선뜻 대답했다.
“예, 저는 도련님께 드린 말씀입니다.”
카밀루스가 눈썹을 들썩였다. 이온에게 충직한 것이야 마음에 들지만, 은근히 성깔 있어 보이는 에렌스트 경의 눈매가 거슬렸다.
그래도 이온이 사람을 잘 보긴 했다. 원래 진짜 가까이에 둘 사람은 직언도 잘해야 하는 법이니까.
“……건방지네. 페드로랑은 또 다른 의미로.”
그 아저씨는 좀 더 능글맞은 타입이긴 하다.
중얼거린 카밀루스가 이온을 고쳐 안고 곧 모습을 숨겼다.
에렌스트 경은 그렇게 적막에 휩싸인 집 안에서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창가에서 영면에 든 사내에게 다가갔다.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노인의 몸을 훑어 내렸다. 그가 정말로 평온히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고통의 흔적도 없었다.
에렌스트 경이 건틀릿을 낀 손을 뻗어 가지런히 놓인 노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주름진 손등을 엄지로 천천히 훑으면서 안타까움이 담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당신을 죽였습니까?”
대체 자신의 주인을 위협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려 달라고.
하지만 사자(死者)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 * *
비렌시움 대공, 카밀루스 클로델의 등장과 함께 크레이거 공작 저는 분주해졌다. 예상외 인물이 너무 당당하게 대문 앞에 있는 것은 둘째 치고, 아픈 소공작을 안고서 나타났다는 소리에 고용인들까지도 다들 한 번씩 창밖을 힐끔댈 정도였다.
그중에는 물론 에밀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에밀리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시녀들이 정숙하라고 소리치는데도 대문 밖이 가장 잘 보이는 복도로 뛰어갔다.
“아가씨, 아가씨! 그러다 넘어지십니다!”
“괜찮아, 괜찮아!”
원래 불구경은 재빨리 해 줘야 제맛이라, 에밀리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허리까지 오는 긴 밀빛 머리를 휘날리며 마침내 원하는 장소에 도착했다.
계단을 오르느라 헉헉거리던 그녀는 3층 복도의 창문 앞에서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더니 창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고 반짝이는 눈으로 바깥을 확인했다.
고용인들 말대로 정말로 대문 밖에 카밀루스와 이온이 같이 서 있었다. 단지 같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정도로 눈에 띄는 이들은 저들뿐일 것이다. 에밀리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혼잣말했다.
“큰일 났다, 오라버니…….”
말의 내용은 심각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이 정말 재밌을 것 같다는 투였다.
그나저나 대문 밖에 있는 저 비렌시움 대공은 대관식 때는 더했다고 하지만, 크레이거 공작 저에서도 존재감이 만만치 않았다.
옷차림이 가벼운 데다 대동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언뜻 보면 그렇게 높은 신분의 인물이 아닌 것처럼도 보였지만, 북부에서의 활약상을 증명하듯이 단단해 보이는 몸과 의연해 보이는 태도는 분명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아니, 사실 눈길을 끄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준수한 외모와 함께 위명을 떠올린 레이디라면 누구든 가슴 한 번쯤 뛸 만했다.
선황의 사생아라는 사람이 대공의 작위를 달고 이제 황도로 온 지 겨우 이틀째. 하지만 어제 그가 일으킨 파란을, 적어도 황도 내에는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 그가 어제는 연회에서 이온을 데리고 사라졌고, 오늘은 이온을 데리고 공작 저 앞에 나타났다.
에밀리는 대문 앞까지 마중 나간 공작의 모습을 보면서 옆의 시녀에게 물었다.
“오라버니는 대체 어디를 갔다 왔길래 대공이랑 같이 온 거야?”
“소공작께선 이젠 성인이신지라 간섭 없이 움직이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자기는 전혀 모르니 묻지 말라는 의미였다. 에밀리는 그 말에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나도 성인인데? 나는 왜 혼자서 못 나가?”
“아가씨께서는 아가씨이시니까요.”
“쳇…… 어, 들어오시나 봐?”
말하는 중간에 에밀리가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카밀루스를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가 허락을 했다고?
시녀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는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공께서요?”
에밀리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시녀가 에밀리의 옷차림을 얼른 점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수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어서 마중을 나가셔야 합니다, 아가씨.”
“아, 알았어.”
에밀리와 시종은 이곳으로 뛰어왔을 때처럼 또 분주하게 저택의 홀을 향했다.
드레스가 끌리지 않도록 계단에서 치마의 자락을 잡고 빠르게 내려간 에밀리가 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카밀루스가 안에 들어선 뒤였다.
에밀리는 합, 하고 숨을 삼키며 얼른 앞자리를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대공의 옆에서 크레이거 공작이 피곤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그를 안내하는 중이었다.
“응접실은 저곳입니다, 대공. 다과는 어떤 것으로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가리는 것은 없습니다.”
말소리에 호기심이 인 에밀리가 눈만 살짝 드는데 이온이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공작을 따라가는 게 보였다.
여동생인 에밀리보다 더 곱고 연약하게 생겼으면서, 언제나 머리 잘 돌아가는 것 믿고 잘난 척이 심한 이온 오라버니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다니.
에일리는 대공이 이 저택을 떠날 때, 꽤 엄청난 소식이 들려올 것임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