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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67)화 (67/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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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랑 할 말이 있어.〉

어제 빌려준 옷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가져다주겠다고 했는데, 카밀루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결국 공작 저로 들어와 버렸다.

세 번째로 응접실에 들어선 이온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아버지와 카밀루스를 번갈아 살피다가, 그래도 카밀루스 옆에 앉는 것은 아니지 싶어서 공작 옆에 쭈뼛쭈뼛 가 앉았다.

그러자 아버지의 눈총이 이온에게 와 꽂혔다. 대공 앞이라 차마 말로 꾸짖지는 못하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눈으로 묻는 거였다.

‘저도 모른다고요…….’

이온은 속으로 그렇게 대답하면서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을 게 분명한 카밀루스와 아버지가 마주 앉았다는 압박감 때문에 숨이 절로 쌕쌕 삼켜졌다. 그러는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밖에서 다과를 들였다.

딱히 호불호가 없다는 카밀루스의 말에 따라 무난한 홍차와 달콤한 과자가 준비되었고, 체질상 홍차를 못 마시는 이온 앞에는 따듯한 물이 놓였다.

이온이 가볍게 기침을 하고 있자, 카밀루스가 먼저 찻잔 받침을 밀었다. 모양 좋은 손가락으로 예의 있게 그것을 가리키며 카밀루스가 먼저 이 무거운 분위기를 파했다.

“힘든 거 같은데 먼저 마셔도 됩니다, 소공작.”

“……아.”

이온은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하는 게 카밀루스 나름의 배려임을 느끼고는 고개를 숙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이온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의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모금 마시는데, 하루 종일 기침에 시달린 목이 쓰렸다.

그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는 이온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카밀루스가 뜬금없이 공작 저로 쳐들어온 저의를 드러냈다.

“크레이거 공작, 가능하다면 황도에 집을 마련할 때까지 손님으로 이곳에 머물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듣자마자 이온은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다행히 그런 꼴사나운 짓은 면했지만, 손이 떨려 금세 찻잔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너 미쳤어?’

이온이 그런 뜻을 담아 카밀루스에게 눈빛을 보냈지만 정작 상대는 공작 쪽을 바라보느라 이쪽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말을 들은 크레이거 공작은 예상대로 미간을 살짝 구겼다가, 표정 관리를 하며 소파에 등을 붙였다.

어차피 저쪽이 부탁하는 입장이니 이쪽은 태도를 편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던 공작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남는 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공께서 이리 갑자기 저희 저택에 머무시겠다니 무척 당혹스럽습니다.”

남는 방은 많지만 너 따위한테 줄 공간은 없다는 말이다.

이온은 아버지가 단칼에 거절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변명을 덧붙일 거라 여겼는데, 이건 너무 박대하는 거 아닌가 싶게 느껴졌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당황하지 않고 제 여유를 과시하듯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홍차를 음미하는 듯이, 꽤 긴 틈을 두었다.

천천히 입술 사이로 붉은색 홍차 물이 흘러들어 가고, 선명한 목울대가 한 번 천천히 오르내렸다.

달그락.

그 소리가 들릴 때까지 저절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던 공작은 묘한 기시감에 눈썹을 움찔했다.

누가 선황의 아들 아니라 할까 봐, 카밀루스가 하는 행동은 그와 겹치는 면이 있었다.

선황은 말보다는 침묵으로 더 많은 의사를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넌 어차피 나에게 복종하게 돼 있어, 그러니까 시간을 줄 때 잘 생각해. 늘 그렇게 정적으로 이야기했다.

한데 지금 카밀루스가 그러는 중이었다. 그을 증오하던, 그가 증오하던 선황과 똑같이.

곧 짙은 파란색 눈이 공작을 쳐다보았다.

“아픈 아들을 애지중지한다는 소문이 그리도 자자하던데, 공작.”

“…….”

이온이 언급되자 크레이거 공작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불쾌감의 표현과 다르지 않았으나 카밀루스는 당연히, 제가 실언을 했다며 물러나거나 하지 않았다.

“알겠지만 그대의 영식이 나에게도 꽤 소중한 이라서.”

한데 뒷말이 공작의 가슴속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곧바로 빈정거리는 소리가 나갔다.

“하여 대공께서도 제 아들에게 청혼이라도 하시렵니까?”

“청혼?”

그게 무슨 소리냐는 의미로 카밀루스가 눈을 치켜떴으나 공작은 대답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누대에 걸쳐 충성하였더니, 황실에선 이 크레이거 공작가를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시는 모양입니다.”

곧장 발동이 걸린 걸 보면 아마 얼마 전에 버니언이 청혼서를 보낸 것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그날도 노발대발하긴 했었는데…….

〈그 황태자 녀석을 끌어내려 줘야 정신을 차리겠지. 그렇지 않으냐, 이온? 앞으로는 황실 녀석들이 이 크레이거 공작가에 충성을 하게 해 줘야 이딴 짓을 다시는 안 할 것 같은데……?〉

차가운 목소리로 한 그 말에 진심이 잔뜩 들어 있던 터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었는데 잘못하면 또 터지게 생겼다.

듣던 이온은 곧바로 상황이 이상해질 것을 예감했다. 그만하시라는 뜻을 담아 손가락 하나로 몰래 공작의 옷깃을 당겼다. 하지만 공작은 그런 이온의 손을 밀어내며 카밀루스를 바로 버니언과 연좌로 묶어 버렸다.

“형제가 쌍으로 이 크레이거가의 후계자에게 부군 노릇을 하려고 한다니…….”

공작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예의 ‘청혼’의 주체가 버니언임을 알아차린 카밀루스가 거칠게 으르릉거렸다.

“그 자식이 미쳤나? 그럴 자격도 없는 자식이 이온한테…….”

“예, 미친 게지요.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아들한테…… 음?”

이 나라의 황제에게 주제도 모른다 어쩐다 막말을 하던 공작은, 제 의견과 카밀루스의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썩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카밀루스도 아무리 봐도 아들 바보인 공작을 눈을 번히 뜨고 바라보았다.

“…….”

“…….”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이온은 그들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뭐지, 이 묘한 타협 분위기는.’

둘이 의견 일치를 보이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는데, 그 현장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것도 그 이유가 저라는 게 상당히 낯간지러운 부분이었다.

먼저 표정이 무너져 버린 공작이 작게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으면서 갑자기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켜다가 뜨거움에 곧바로 찻물을 뱉을 뻔했던 그는 간신히 참아 체면을 구기는 걸 피했다.

드물게 아버지가 허둥대는 모습을 이온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웃으면 안 되기 때문에 입에 잔뜩 힘을 주어 꾹 다물어야 했다.

과정이야 어쨌든 찻잔을 우아하게 놓는 데 성공한 공작은 혓바닥이며 입천장이 덴 아픔을 참으며 다시 대화의 물꼬를 텄다.

“대공께서는 청혼을 하실 요량이 아니신 겁니까? 그게 아니면 얘기는, 들어 보지요.”

새침하게 하는 말을 가볍게 웃으며 받아칠 수 있었겠지만, 카밀루스는 그러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말했다.

“소공작의 저주에 대해서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저주는 일단 나도 풀지 못합니다. 하지만 도움은 줄 수 있을 것 같군요.”

“어떤 도움을 말씀이십니까?”

“알다시피 소공작의 몸은 마나의 흐름이 모두 막혀서 운용 자체가 안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의 마나에는 영향을 받지. 이 지점이 기묘합니다.”

크레이거 공작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은 무예나 마법 쪽에는 지식이 그렇게 깊지 않았다.

의문을 표하는 그를 보면서 카밀루스는 복잡하고 전문적인 세부 설명은 배제하고 쉬운 언어로 설명해 주었다.

“마나가 흐르지 않는 몸이라면 원래는 주변의 마나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건, 마나의 흐름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옆에서 물을 홀짝거리며 조용히 듣던 이온은 그런 건가, 하며 눈을 깜빡였다. 마나가 통하지 않는 몸이라는 게 워낙 케이스가 없다 보니 책에서도 지식을 얻기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 하지만 이 방면으로는 저보다 카밀루스가 더 지식이 깊을 것이기에 굳이 신빙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저주를 완전히 풀지 못하면 몸 상태는 계속 제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그렇다 해도 제가 곁에 있으면서 증상을 어떻게 해야 완화할 수 있는지라도 알아보면 언젠가 성과가 나지 않겠습니까?”

카밀루스는 공작의 표정에서 처음과 달리 경계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말투를 조금씩 가볍게 했다.

“어차피 공작도 아들을 치료하는 데 8년 동안 성과가 없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일 텐데…….”

“…….”

이번에도 역시나 잘 생각하라는 듯이 말꼬리를 끌면서 틈을 둔 카밀루스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나를 손님으로 맞이하고 소공작의 몸을 계속 살필 수 있게 해 주면 여러모로 이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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