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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68)화 (68/317)

“나를 손님으로 맞이하고 소공작의 몸을 계속 살필 수 있게 해 주면 여러모로 이득 아닌가?”

물음을 듣고 공작은 고민스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아무리 공작에게 아들이 소중해도 이런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일 터이다. 지금 대공을 손님으로 들인다면 황제의 등에 칼을 꽂는 짓으로 간주가 될 게 분명했다.

거기다, 방금 카밀루스는 기간에 대해 ‘황도에 집을 마련할 때까지’라고 했다. 구체적이지도 않고, 그것을 핑계로 영원히 머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공작이 돌연 이온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소공작, 어찌 생각하느냐?”

“아버지.”

놀란 이온은 이러시면 곤란하다는 의미로 그를 넌지시 불렀다. 여러 조건을 따져 보면 카밀루스의 제안은 당연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칼에 거절해야 하는 유였다.

한데 공작은 아들의 작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히 이야기했다.

“이는 네 의지가 가장 중요할 것 같구나. 네 몸과 관련된 일이니.”

그러면서 부드러이 웃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이온이 움찔했다. 설마 크레이거 공작이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전혀 짐작지 못했다.

자신을 이토록 소중히 여길 줄은 몰랐던지라 왠지 가슴이 찡해진 이온은 이내 고개를 흔들며 냉정히 현실을 지적했다.

“아니요, 가문의 신념과 관련된 일이니 이는 가주이신 공작께서 결정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하냐? 그럼…….”

이온의 끄덕거림을 본 공작은 주저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전하를 손님으로서 받아들이겠습니다. 식구들은 알아서 들이시지요. 아마 저희 하인들만으로도 부족함은 없을 터이지만.”

“……아버지?”

당혹한 표정을 짓는 이온과 반대로 카밀루스는 입가에 선명한 미소를 띠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고 찻잔 옆의 과자를 입에 넣어 살살 녹여 먹고는 한마디 했다.

“달군요, 과자가.”

당신의 대답도.

그리 이야기하는 카밀루스를 크레이거 공작은 조금 떨떠름해하는 표정으로 보기는 했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차렸다. 카밀루스 앞에 허리를 숙인 것이었다.

아까 전 대문 앞에 마중 나갔을 때도 뻣뻣했던 그의 태도를 떠올리면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었기에 이온의 초록빛 눈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에 나온 말은 더했다.

“대공께서 제 아들을 고쳐 주시기만 한다면 이 크레이거가의 모든 영광을 당신의 것으로 드리겠습니다.”

충성 맹세였다.

이온은 침을 꿀꺽 삼켰다. 크레이거 공작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정말로 꿈에서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크레이거 공작은 카밀루스를 싫어하고,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혐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것을 아들을 위해 극복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한 오랜 세월 이어 온 가문의 신념을 바꾸겠다는 선언이었다.

자신의 병이 그에게는 그만큼 못 견딜 고통이었던 걸까.

그가 아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음은 이미 넘치도록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온은 그마저도 자신이 크레이거 공작을 과소평가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때마침 크레이거 공작의 호의 수치가 조정된 모양인지 시스템창이 올라왔다.

[상태 이상: 호의]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가 플레이어에게 극도의 호의를 느낍니다.]

카밀루스와 대화하면서 그에게 심경의 변화가 인 모양이었다.

다만 글을 읽다 보니 의문이 생겼다. 크레이거 공작이 이전 상태가 어땠는지 뜬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럼 이전엔 짙은 호의 정도였다는 의미인가.

‘게다가 아버지도 이제야 극도의 호의인데…….’

이온은 카밀루스를 힐끗했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이 플레이어에게 극도의 호의를 느낍니다.]

저 녀석은 8년 전에도 저 상태였단 사실이 떠올랐다.

시스템이 ‘호의’나 ‘적의’를 측정하는 기준이 뭔지는 모르니 이런 말 저런 말 덧붙이기 어렵지만, 어쨌든 보통의 상태는 절대 아니라는 점은 잘 알겠다.

아버지가 가문의 신념을 꺾었을 때에야 저러한 멘트가 떴으니 카밀루스가 말했던 목숨도 줄 수 있다는 말이,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온은 표정을 가라앉혔다. 갑자기 이 자리가 못 견디게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영광을 준다라…….”

그러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몰래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데, 카밀루스가 문득 공작의 뒷말을 곱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곤 제 나름의 해석을 내놓았다.

“현 황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하는군.”

“전하의 판단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대꾸한 뒤 공작이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를 보며 다른 하나의 추측을 더 내놓았다.

“아니면 사생아에게 이런 충성을 해 봤자 별소용이 없다? 이런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려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던 카밀루스가 공작을 마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공작은 그에 눈을 가늘게 뜨며 썩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위가 대공이라고는 해도 크레이거 공작의 입장에서는 애송이에 불과한 카밀루스가 저를 떠보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심리를 꿰뚫고 있는 카밀루스는 그만 제 앞의 찻잔을 비운 뒤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뭐, 무엇이든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카밀루스에게 현 황제인 버니언과 정식으로 대적하겠다는 목표 의식은 없었다. 이온에게 청혼이라는 개수작을 부린 걸 알았으니 가볍게 응징은 해 주어야겠지만.

어떤 방법으로 할까, 머릿속으로 벌써부터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는데 공작이 툭 내뱉었다.

“제 아들이 잘못된다면 제게 목숨을 내놓으셔야 할 겁니다.”

카밀루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그러나 짧게 한 그 대답은 그의 한없는 진심이었다.

어차피 카밀루스 클로델은 이온이 없으면 더는 세상을 살아가지 못할 것이기에.

기실 그 상실감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에게 두 번의 기회는, 절대 없을 것이므로.

그렇게 생각하던 카밀루스는 어느 순간부터 조용히 앉아 물만 천천히 넘기고 있는 이온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창백한 안색에, 힘이 없이 연약하기만 한 그를 보자 가슴이 아픔으로 죄어들었다.

여전히 어여쁘긴 하지만, 어렸을 적에 그토록 건강하고 밝았던 이온의 모습이 이제는 제 기억 속에서마저 흐릿해지고 있는 것이 서글펐다.

* * *

찻잔을 다 비울 때까지 응접실의 분위기는 침묵으로만 가득했다. 이온도 돌아가는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터라 분위기를 풀 생각을 딱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편한 자리가 수 분이 지속된 뒤에야 먼저 일어난 크레이거 공작은 응접실을 나서자마자 시녀장을 불렀다.

그는 직접 카밀루스를 시녀장에게 소개해 주며 명했다.

“당분간 전하께서 우리 저택에 머물기로 했으니 2층 동편 한 구역을 그냥 다 내드리게. 앞으로 들어올 식구들도 한둘은 아닐 테니 신경 잘 쓰고.”

“예…… 각하.”

명령에 시녀장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이 대문 앞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공작이 그를 집 안에 머물게 하리라고 상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

어쨌든 공작의 명은 금세 온 집안에 퍼졌다.

그 즉시 귀빈인 카밀루스에겐 하인이 배정되기로 했고, 이온은 그들이 대공에게 인사하러 오기 전에 직접 집 안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본관인 루미에르홀에는 무엇이 있고, 매일 식사나 티타임은 어떻게 하고, 별관은 어떻게 가는지 등.

한데 설명을 해 주는 내내 잡설을 일절 안 하는 것을 보면서 카밀루스는 이온의 심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긴 했는지 굉장히 어색해했다.

이온은 제 몸의 두 배는 되는 그가 고분고분 따라다니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마지막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매일같이 깨끗하게 청소해 두어 윤기마저 나는 계단을 모두 오른 뒤, 회랑을 돌아 저택의 동쪽으로 향한 그는 마침내 카밀루스가 머물 구역을 쭉 가리키며 마무리 격의 이야기를 했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방이 비어 있다고 하니 식구들이 오면 알아서 배정해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곧장 고개 숙이고 사라지려고 하는데 계속 때를 재고 있었던 모양인지, 카밀루스가 얼른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온.”

이온이 잡힌 부위를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아, 하고 감탄사를 흘린 뒤 제 앞의 방문을 열었다.

설명할 것이 남았다는 신호를 알아듣고 카밀루스가 손목을 놓아주자 이온은 이제는 저녁에 접어들어 조금 어둑해진 안으로 들어가 협탁 위의 종을 집어 들었다.

그는 소리가 덜 나도록 종의 몸체를 손바닥으로 감싸 잡고 한 번 딸랑, 하고 흔들며 설명했다.

“하인들은 이 종을 흔들면 올 겁니다.”

짧은 말을 마치고 그를 협탁에 내려놓은 뒤 다시 방 밖으로 나온 이온에게 카밀루스가 재빨리 말을 붙였다.

“이온, 혹시 화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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