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 혹시 화났어?”
“……빌려주신 겉옷은 하인들 통해서 곧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대답 대신 하는 말에 카밀루스는 이온이 진짜로 화났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당혹스러워졌다. 실제로도 이온의 눈빛이 전례 없이 차갑게 보였다.
표정 없는 그 얼굴에 카밀루스는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응접실에서의 상황을 더듬다가 설마 아니지, 하는 말투로 물었다.
“왜? 혹시 내가 널 이용한다는 생각이 든 건가?”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걸 보고 카밀루스는 제 추측이 정답이었음을 알았다. 이온의 초록빛 눈이 꿰뚫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 그는 숨이 막혔다.
이온은 일단 키부터도 머리 하나보다 더 차이가 날 만큼 왜소하고, 심지어는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에 무섭다는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럼에도 카밀루스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급히 변명을 입에 올렸다. 아니, 진실만 말하고 있으니 애초에 변명도 아니었다.
“공작이 저렇게 나오는 건 나한테도 예상 밖이었어. 하지만 앞으로 네 가문의 도움을 받을 의사는 전혀 없으니 안심해.”
그러자 이온은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아니야?
카밀루스는 그럼 또 뭐가 있나 싶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오히려 전혀 떠오르지 않아 헤매고 있는데, 이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처음부터 우리 집에 들어올 생각이었어? 나한테 옷을 줬을 때부터?”
아니면 그 이전에, 계약을 제안했을 때부터.
그런 뜻을 함축하고 있는 말에 카밀루스가 작게 탄식했다. 이건 아까 것보다 더 그럴듯하긴 한데, 진짜로 오해였다.
“그건 아니야. 그렇지만 널 해치려는 놈이 있다는 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손 놓고 있을까.”
아침에 독수리가 날아와서 한 말도 그렇고, 이온을 오랫동안 보필했다는 버틀러가 죽은 걸 보고 나니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를 지키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은 것뿐이다.
카밀루스는 아침까지만 해도 어린 시절에 살았던 조그만 집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곳에 당장 페드로를 불러와서 진실을 말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온에겐 무슨 말을 해도 핑계로만 들릴 터였다.
답답한 마음에 카밀루스가 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이온이 말문을 열었다.
“카밀루스, 안 그래도 내가 계속 말해 주고 싶었는데.”
낮은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래서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난 네 그런 열렬한 보호가 필요하지 않아.”
“……이온.”
카밀루스는 제 호의가 거절당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이온이 호의 그 자체를 곡해해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본격적인 말에 앞서 이온이 살며시 팔짱을 꼈다. 방어적인 신호를 알아차린 카밀루스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래,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작은 스트레스에도 기침할 정도로 약한 몸인 건 맞아. 그렇지만 난 내 주위의 위협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지는 않아.”
이온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했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실제로 그는 말하는 동안 카밀루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더 변명할 것이 있으면 해 보라는 저의가 명확했다.
“그런 의미로 벌인 일이 아니야.”
“난 그런 의미로 느껴져.”
“정말 아니라고. 네가 무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그렇지만 이 저주는 내가 풀어 주고 싶어. 이런 마음, 나는 가지면 안 되는 건가?”
“그러니까 네가 왜?”
이온의 물음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카밀루스는 이런 근원적인 부분부터 설명해야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확실히 당황하고 있었다.
이온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후의 말들은 그도 입에 올리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흘러나갔다.
“혹시 내가 그렇게 불쌍해? 곧 죽을 거 같은 인간이라서?”
카밀루스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런 말 입에 올리지 마.”
“정말로 아파서 골골대니까 불쌍한 거 아니야?”
대부분의 사람은 실제로도 이온을 그렇게 봤다. 가족들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고, 제삼자는 더했다.
사계절 내내 감기를 달고 다니는 데다 툭하면 쓰러지는 그를 애잔해하는 눈들. 그건 이온 입장에선 꽤나 비참하고 불쾌한 경험들이었다.
재차 묻는 말에 카밀루스는 저를 똑바로 보라는 듯이 두 손으로 이온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널 좋아해서 이러는 거잖아. 게다가, 이 저주에 걸린 건 나 때문일 테니까!”
외치는 말에 이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의 그 말도 이온에게는 ‘정답’이 아니었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굳은 표정에서 그 사실을 눈치채고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렇지만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
“넌 이전에 분명히 마법도 쓸 수 있었고, 이렇게 아프지도 않았어. 그런데 내가 탑에서 풀려난 뒤에 보니 너한테 이 빌어먹을 저주가 걸려 있었지. 그럼 결론은 하나 아닌가? 근데 넌 왜 외면할까? 왜? 너야말로 나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 아닌가?”
“아닐 수도 있어.”
“아닐 확률?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지?”
“…….”
이온은 정황상 탑에서의 일 때문에 저주에 걸린 게 확실했다. 저주의 연원을 정확히 지적하기에는 카밀루스조차도 탑에서 도망쳐 나온 뒤부터 며칠 지나 황궁에서 눈을 뜨기까지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 상황이 카밀루스를 더 벼랑으로 몰았다. 자신을 구하느라 수년간 아팠고, 앞으로도 아파야만 하는 이온을 보고 있기가 너무나 괴로웠다.
카밀루스가 이온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넣으며 말했다.
“나 미치게 하지 마. 지금도 널 볼 때마다, 널 떠올릴 때마다 내 무력함에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그런데 이온이 갑자기 실소를 내뱉고는 제 어깨를 붙잡은 손을 떼어 냈다. 카밀루스의 시야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그의 발이 들어왔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이 나올까 싶어 카밀루스의 눈이 불안감으로 흔들렸다.
역시나 뒤이은 이온의 말은 이전의 것들보다 더 억울함을 일으키는 말이었다.
“이제 보니 네 사랑은 죄책감이구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곧장 부정했지만 이온의 생각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네가 날 위해 왜 이렇게 다 내던지려고 하는지 늘 궁금했었어. 네가 떠나 있는 동안에도 가끔씩 생각이 날 정도로.”
흘러나오는 말속에 뼈가 있었다. 이온은 의도적으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서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눈에 띌 만큼 거구가 된 그가 참 낯설었다. 지금이야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처럼 강해 보이는 그이지만, 예전에는 아니었다. 카밀루스는 어린아이였다.
원래라면 희생이라는 그런 숭고한 가치 따위를 알 필요도 없는.
목숨을 건다는 의미를 몰라도 되는.
그런데 둘 모두 너무 빨리 알아 버렸다. 이온은 그게 그들 사이에 벌어진 비극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나도 사람인데…… 네가 사라지고 나서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
이온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대꾸도 못 하는 카밀루스를 보며 셔츠의 목깃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고 수년간 제 목에 걸려 있던 마나석 목걸이를 풀었다.
잠시 뒤 이온이 펼친 오른손 손바닥에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나마 푸른색으로 빛나는 마나석이 올라가 있었다. 겨우 손톱만 한 크기의 돌이었다.
“이 조그만 마나석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며? 거기에 넌 8년이나 낯선 땅에 가 있어야만 했지. 바로 나 때문에.”
이야기하며 이온이 마나석을 움켜쥐었다. 파괴하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신비의 돌. 그는 이것 때문에 살고, 이것 때문에 죽을 뻔했다.
그리고 카밀루스는 그런 자신 때문에 나라마저 통제하지 못하고 있던 불모지인 아이오딘으로 향했다.
“춥고 궂은 험지에, 마물까지 나와서 다들 가기를 꺼리는 곳인데…….”
“…….”
“그런데 어떻게 단지 고맙고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그런 희생을 할 수 있겠어?”
“이온.”
하지만 불쌍해하는 마음은, 연민은 사랑과 등치가 될 수 없었다. 이온이 한 걸음 제게 다가오는 그를 피해 역시 한 걸음 물러나며 물었다.
“너, 네 감정 구분 못 하고 있는 거 아니야?”
“절대 아니야.”
“아니, 쉬면서 잘 생각해 봐. 대공 전하께선 시간도 많은 것 같던데. 그럼 이만.”
잘라 말한 이온은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이고는 먼저 뒤돌아섰다. 카밀루스의 말을 딱히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극한 피로감에 빨리 내려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데 카밀루스가 달려오더니 팔을 확 붙잡으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 왜 이래? 내가, 내가 어떤 기분으로 지금 여기 있는 건지 정말 몰라?”
몰라.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마치 정말 그렇냐고 묻는 듯이 이온의 눈앞에 시스템창이 펼쳐졌다.
[상태 이상 ‘마법 계약’
시전자: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
…….
- 플레이어 사망 시까지 상태 이상 ‘마나 소실’이 해제되지 않을 경우 시전자가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