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만 빌어먹게 눈치 좋은 시스템.
덕분에 잠깐 말문이 막혀 버린 이온이 그것을 노려보고 있자, 카밀루스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날 봐, 이온.”
카밀루스에겐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모습이 무시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에 이온은 그가 원하는 대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의 눈엔 불안감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대관식에서는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빛나고 있던 눈빛이, 자신의 앞에서는 무방비하게 동요를 드러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온은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지는 않았다.
“그동안의 네 희생은 정말 고맙고, 대단하다고 생각해. 근데 목숨은 바치지 마. 싫어, 내가.”
게다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저주가 안 풀리면 죽을 거라니. 저런 건 아무 의미도 없는 개죽음 그 자체였다. 저것 때문에 이온은 이 계약이 끝나기 전까진 죽어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저 조건을 알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저주만 풀면 아무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전혀 길이 보이지 않지만…… 근거 역시 없지만 자신은 이 저주를 반드시 풀어낼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 하나만 해결되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희생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은 달랐다. 아버지와 카밀루스, 두 사람이 자신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가치가 있었다.
심지어는 한 번 망가지면 돌이킬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동참했는데 카밀루스에게만 화풀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카밀루스 또한 몹시 억울하겠지만 이온은 매 순간 자신을 위해 전 존재를 던져 버리는 그에게 더 짜증이 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카밀루스가 두 팔로 이온을 와락 껴안았다. 제 뒤통수를 쓰다듬어 내리는 손길은 꽤나 간절함이 느껴졌다.
“넌 내 목숨마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제발!”
더는 견디지 못한 이온이 그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어느 때보다도 명확한 거부 의사에 카밀루스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았다. 카밀루스의 헌신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이온 크레이거’다.
카밀루스를 탑에서 꺼내 준 그 착한 아이.
아마도 이 몸에 걸린 저주를 견디지 못하고 먼저 죽어 버렸을 그 아이 말이다.
이온에게 있어 이것보다 더 선명한 진실은 없었다.
그렇게 이 상황의 전제가 되는 것부터가 완전히 틀려먹었으니 이후 도출되는 답이 정답이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때문에 카밀루스는 지금 질문지에 전부 오답만 체크하고 있는 중이었다.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입 때문에.
이것도, 저것도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이온의 목구멍으로 울음이 울컥 올라오려고 했다. 눈 주변이 급격히 뻣뻣해졌다.
이온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너만 미칠 것 같아? 너 때문에 나도 미치겠어…… 읏.”
말하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3%입니다.]
돌연 어지러워져 오는 것에 어쩌면 몸을 비틀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카밀루스가 위팔을 붙잡아 주는 게 느껴졌다.
“이온.”
하지만 카밀루스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던 이온은 그의 팔을 쳐 내고 지나쳤다. 복도를 꺾어 난간 쪽으로 나가니 카밀루스에게 인사하러 온 하인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화할 때 서로 목소리를 줄이지도 않았으니 아마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다 들었을 것이다. 그에 잠깐 멈칫했던 이온은 모르는 척 말했다.
“준비돼 있는 이불이 너무 얇아. 다른 것으로 갖다드려라.”
그러자 맨 앞에 있는 어린 버틀러가 허리를 숙였다.
“네, 소공작…….”
자신을 살피는 눈길을 외면한 채 이온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제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빠지는 그를 불안하게 보는 시선들이 따르고 있었지만, 이온은 갑자기 치솟기 시작하는 사망 확률을 보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7%입니다.]
방문을 열기 직전, 결국 코피가 흘러내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었다.
얼른 방 안으로 들어선 이온이 닫힌 문에 기대서서 잠깐 숨을 고르고 있으니, 하루 종일 혼자 있어서 심심했는지 침대 위에서 몸 비틀기를 하던 욤뇽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꾸?”
그러고 제 앞으로 날아와 기웃거리자 이온은 고갯짓으로 협탁을 가리켰다.
“손수건 좀 가져다줘, 욤뇽아.”
욤뇽이가 가져다준 손수건은 금세 붉은 피로 잔뜩 젖었다. 이온은 침대 쪽으로 자리를 옮겨 걸터앉았다.
옆에서 욤뇽이가 분주히 날아다니면서 방에 촛불을 켜고 손수건도 더 가져다줬지만, 세 번째 것을 다 적실 때까지도 코피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소공작, 접니다.”
에렌스트 경이었다. 이제야 복귀한 모양이었다. 들어오라는 대답을 듣고 방으로 들어선 그는 이온을 발견하자마자 놀라 앞으로 달려왔다.
“도련님!”
그러고 품에서 꺼낸 새 손수건을 건네는 것을 받은 이온은 잔뜩 예민해진 탓에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 울려. 겨우 코피야. 호들갑 떨지 마.”
“하지만 정도가 너무 심합니다.”
피에 젖은 손수건을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그에게 결국 이온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될 때는 가급적 혼자 해결을 보려는 편인데 이번에는 제 생각에도 심하긴 했다.
“……주치의 좀 불러와.”
“예.”
에렌스트 경이 곧장 일어섰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역광 때문에 방 쪽으로 향한 그림자가 두 개인 것을 확인한 이온이 고개를 들었고, 때마침 에렌스트 경이 인사하고 있었다.
“비렌시움 대공을 뵙습니다.”
방 앞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은 카밀루스였다. 에렌스트 경이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듯이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이온을 돌아보았다.
그렇지만 이미 태연한 척하기에는 늦었다. 손수건을 벌써 몇 개나 버렸으니 이온의 손 역시 피투성이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소공작.”
짧게 양해의 말을 읊은 카밀루스가 굳은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이내 이온의 앞에 가볍게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얼굴을 가린 손을 떼어 냈다.
이온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카밀루스의 표정이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졌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저런 잔소리를 입에 올리지 않고 가만히 이온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볼 때는 몰랐는데, 얼굴에 손길이 닿으니 선명히 느껴졌다. 카밀루스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
이온은 자신의 얼굴을 살피며 집중하고 있는 파란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일은 다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여전히 다정한 빛을 띠는 카밀루스의 눈을 보고 있으니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하여 눈을 옆으로 돌리는데, 희미하게 빛이 일었다.
그러고 카밀루스가 에렌스트 경을 돌아보며 명했다.
“물수건을 가져와. 옷도.”
지켜보던 에렌스트 경이 그 말에 서둘러 밖에 나갔다 왔다. 잠시 후 깨끗한 물과 수건, 갈아입을 옷이 그의 옆에 놓였다.
카밀루스가 수건을 직접 물에 적시는 것을 보면서 이온이 한마디 했다.
“내가 할 수 있어.”
카밀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건을 쪼로록, 짜내느라 이쪽을 보지 않는 것이긴 한데 왠지 모르게 태도가 꽤 완고하게 느껴졌다.
‘화났나.’
그렇지만 얼굴과 손을 차례로 닦아 주는 손길은 또 너무 애틋했다.
어쨌든 이온은 자신의 말로 카밀루스가 고민하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래 버리면 조금 전의 대거리가 무색해져 버린다.
피를 다 닦아 냈는지 수건을 물에 담그는 것을 보고 에렌스트 경이 이온 대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러나 카밀루스는 치레조차 하지 않은 채 이온의 목을 확 끌어당겼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예고도 없이 입술이 부딪혔다.
“읏……!”
카밀루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어 파고들었다. 놀란 이온이 제 혀를 감싸 오는 그의 것에 굳어 반응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카밀루스의 등 뒤로 에렌스트 경이 아직 서 있었다. 이온이 그와 눈이 마주쳐 당황하고 있는데, 입술을 잠시 떼어 낸 카밀루스가 일침을 날렸다.
“계속 보고 있을 건가?”
에렌스트 경은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다시 입을 맞물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