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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72)화 (72/317)

카밀루스는 이온의 어깨를 살며시 잡고는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네 적이 내 적이고, 네 아군은 내 아군이야. 난 널 위해서라면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도 손을 잡을 수 있고,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배신할 수 있어.”

이온은 왜인지 카밀루스의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민망한 한편으로는, 아무리 설득하려고 해도 결국 제자리인 카밀루스의 고집이 싫지 않아서…… 심히 곤란했다.

“내가 널 이용하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해?”

“해, 마음껏. 네가 이용해 줄 힘을 내가 가지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할 테니.”

단호한 말과 함께 그가 이온을 감싸 안았다. 격렬한 포옹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이온의 볼에 제 입술을 꾹 누르고는 당부하듯이 한마디 했다.

“어디 나가지 말고, 잘 자.”

“……?”

왠지 뭔가 알고 있다는 듯이 하는 말에 이온이 의문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카밀루스는 이온을 그만 침대에 앉혔다.

“아프면 혼자 참지 말고 욤뇽이라도 나한테 보내고. 알았어?”

“꾸!”

자신이 언급되자 어딘가에 숨어 있던 욤뇽이가 등 뒤에서 쏙 나와 기웃거렸다. 이온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마지막 오기를 부렸다.

“……오늘은 더 안 아플 거야.”

카밀루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을 뒤로 물렸다.

방문이 닫힐 때까지 이온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 그는 그야말로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손길로 문을 닫고 나갔다.

그때까지 눈으로 좇던 이온 역시 문이 닫힌 뒤에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시스템의 비밀 파헤치기]

정황상 아마 카밀루스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확실한.

“…….”

카밀루스, 혹시 너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는 걸까.

내가 그러하듯이.

이온이 눈을 감았다. 머리가 무지근했다.

* * *

“……귀족가에 의탁 안 하신다면서요?”

페드로가 카밀루스의 서신을 받은 뒤 기사들을 이끌고 크레이거 공작가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카밀루스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 빛 구슬 하나 안 띄워 놓고서는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어디 갖다 팔아먹은 줄 알았던 겉옷도 걸치고서는 큰 키를 자랑하듯 방구석에 있는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페드로가 그렇게 어처구니없음을 표현하자, 카밀루스는 눈도 뜨지 않고서 중얼거렸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8년간 몬스터들을 쫓아다니면서 체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키워 왔던 그인데, 웬일로 정말로 지쳐 보이는 모습에 페드로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데이트하러 간다더니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고, 무슨 꼴인가 싶었다. 물론 뛰쳐나갈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는 않았지만.

“그것도 의탁하신 곳이 하필이면 크레이거 공작가고요. 공작을 어떻게 설득하신 겁니까?”

그제야 카밀루스가 가늘게 눈을 뜨더니 살짝 웃었다.

“내가 능력이 좀 되잖아.”

“예상치 못했을 때 이상한 데에서 잘난 척하는 능력은 일품이시죠.”

건조하게 대꾸하면서 페드로는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침에 카밀루스가 갑자기 휴가 선언을 하고는 자신들을 낡은 집에 버려두고 간 탓에 뒷수습을 하느라 그도 꽤 지친 상태였다.

오늘 처음으로 뭔가에 등을 기댄 페드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카밀루스에게 물었다.

“설마 첫사랑이 이 크레이거 공작가의 아가씨인 겁니까? 이름이…….”

그에 페드로가 오해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카밀루스는 대충 대꾸했다.

“에밀리 리아나 크레이거.”

굳이 이 상황에서 귀찮게 그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온 크레이거라고 정정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아가씨한테 옷을 빌려주셨던 겁니까?”

이번 물음에 카밀루스는 언뜻 실소하는 듯이 보였다. 말없이 그러는 모습을 보고서 페드로가 한마디 했다.

“좀 피곤해 보이십니다. 기분이 안 좋으신 것도 같고.”

역시나 저 아저씨는 눈치가 백 단이었다.

“날 얼마나 자세히 보고 있으면 그런 걸 구분해?”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압니다. 8년 동안 부부처럼 살았잖습니까.”

“그런 말은 좀 징그럽네.”

가볍게 티키타카를 주고받다 보니 마음이 풀려서 카밀루스의 말투가 점점 유해졌다. 기색을 알아차리고 페드로가 픽 웃었다.

이제 카밀루스는 오브라이언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이니, 저와 그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나 역시 제 눈엔 아직 어린 아들처럼 보이는 탓에 이럴 땐 괜히 고민 상담 좀 해 주고 싶어졌다.

“지긋지긋한 사이가 되면 눈 감고도 다 알게 되죠. 왜요, 영애께서 쌀쌀맞기라도 하십니까?”

“응.”

쌀쌀맞기만 하면 다행이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카밀루스는 아까 전 이온이 한 말들을 떠올렸다.

자기가 불쌍하냐느니, 제 사랑이 죄책감이라느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의 연속이었다. 그 순간의 허탈함을 표현하라고 하면 수천의 언어로도 부족했다.

그런데 다음에 나온 질문에.

“설마 대공, 짝사랑하세요?”

카밀루스는 신경이 뾰족해짐을 느꼈다.

짝사랑.

이온이 자신을 좋아하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키스도 받아 주는데 어째서인지 저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럴걸.”

인정하고 나니 기분이 확 저조해졌다.

8년 전, 이온이 기억 상실이라고 했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했었지만 실은 눈앞이 깜깜해졌었다.

그럼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 했다. 이대로 종말인가 싶어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른다. 이온이 자신을 모르는 척할까 봐.

다행히 이온은 그러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천운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럼에도 그의 소중한 기억을 전부 날려 버린 신을 원망해야 할까…….

카밀루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틈 사이로 장탄식이 흘러나갔다.

“그 애는 과거의 날 기억도 못 하거든. 정말 하나도 모르는 거 같아.”

“……이런.”

“아마, 벌을 받고 있는 거겠지?”

아픈 이온을 곁에 두고 보고 있어야 하는 것 역시 자신에겐 너무나 괴로운 형벌이었다.

황성의 이름 없는 탑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그곳에서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온은 저주에 걸리지 않았을 터이다. 그럼 지금처럼 매일매일 기침에 시달리고, 두통에 괴로워하고, 코피를 흘리고, 기절하지도 않았겠지.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제정신으로 있기가 힘들었다. 이온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정신줄의 끄트머리를 겨우 붙들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포기해 버리면 정말로 희망이 꺼져 버릴 테니까. 그래 버리면 스스로를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 무거운 분위기는 농담으로 뭉개지 못할 것임을 알아차린 페드로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물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엉덩이를 떼고 나갈 준비를 하던 페드로는 도로 소파에 앉았다. 그들 사이에 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스물 넘어서 짝사랑에 마음 아파하는 남자를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페드로도 알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카밀루스 역시 딱히 무언가를 더 바라지 않았다. 그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대로 잠들면 좋겠지만 예민해진 신경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너무 나 혼자 급한 걸까…….”

문득 중얼거리는 소리에 페드로가 바로 답해 왔다.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면 대부분 그런 겁니다.”

“그렇지만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데.”

“어린애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8년 동안 떨어져 계셨으면서 왜 이제 와서.”

카밀루스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중얼거렸다.

“선황이 살아 있었을 때는…… 그 사람이 가장 위협적일지언정 나머지는 다 억제가 됐거든.”

“지금은 아닙니까?”

“원래 학이 사라진 곳에선 왜가리들이 난립하는 법이지.”

“그럼 뭐, 간단하네요.”

“어떻게.”

“학이 되시면 되죠. 기껏 힘이 있는데 왜 야망을 가지지 않으십니까.”

카밀루스가 가늘게 눈을 떴다. 그의 부관은 다른 사람이 들으면 큰일을 당할 수도 있는 말을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렸다.

“정통성 또한 대공의 손에 있을 텐데요. 솔직히 전 황도에 오자마자 대공께서 힘으로 장악하실 줄 알았습니다.”

심지어 싸움판도 다 깔아 놓고, 카밀루스는 알아서 밖으로 물러나 버렸다. 하지만 냉정한 정치의 세계에서는 물러난다고 끝이 아니다. 장 밖에서 뒤통수를 내리치는 놈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대공은 너무 순해요. 힘이 있어도 휘두를 줄을 모릅니다.”

“난 그런 사람을 혐오해.”

“선황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군요.”

“그래.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이렇게까지 말하면 페드로로서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하여 다시금 둘의 대화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려 하는데, 창밖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드로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 있는 건 카밀루스의 독수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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