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뭔데?”
“꾸, 꾸우.”
카밀루스의 물음에 욤뇽이는 손짓 발짓을 섞어 이런저런 설명을 열심히 했다. 자세히 듣던 카밀루스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요는 이것이었다. 욤뇽이가 생각하기에 이 분홍색 약물은, 그간 이온이 구해서 가져온 그 어떤 약물보다도 저주를 가장 악화할 수 있는 약물이라는 것이다. 그에 이것이 심히 수상하니 알아봐 달라는 얘기였다.
카밀루스 입장에서도 욤뇽이는 꽤나 신뢰감 있는 메신저였기 때문에 그냥 넘기기는 힘들었다.
“어디서 구했다는 얘긴 없었나?”
도리도리.
‘너무 정보가 없는데…….’
그렇다고 욤뇽이가 몰래 훔쳐 온 것을 들이밀면서 묻기에는 이온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일단 뚜껑을 열어 보았다. 냄새를 맡기도 하고, 보글거리는 방울이 터지면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살피기도 하던 카밀루스는 물약을 손바닥 위에 살짝 따랐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손바닥 위에서도 열심히 끓고 있는 그 액체를 검지로 뭉갰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확 피어났다.
카밀루스는 가늘고 긴 꽃 모양으로 솟아올랐다가 허공에 퍼지는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정도 마기는 워낙 미량이라……. 누굴 해칠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어. 보니까 물방울이 생기는 것도 단순히 마나를 너무 많이 넣어서 그런 거야. 물이 수용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선 거지. 뚜껑 열고 며칠 있으면 잦아들걸.”
“꾸우우.”
하지마안.
“뭘 근거로 이걸 먹으면 이온의 증상이 악화한다는 건데?”
이 지점에서 욤뇽이는 물빛 눈동자를 떨더니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뭔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카밀루스는 일단 녀석의 말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이렇게 조그마해도 명색이 드래곤이라고, 이 녀석은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를 감지하긴 하는 모양이니.
“그래, 알았어. 가볍게 생각 안 해. 어제 가져온 거라면 황궁에서 만난 인물이 줬을 확률이 높긴 하겠는데…… 어쨌든 따로 알아볼 테니까.”
약병의 뚜껑을 닫은 그가 욤뇽이의 손에 그것을 다시 쥐여 주었다.
“이건 도로 제자리에 돌려놔. 그리고 계속 따라오지 말고 이온 곁에 있어야지? 그게 너랑 나의 약속이잖아, 잊었어?”
“꾸웅.”
“어서.”
채근을 받은 욤뇽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약병을 꼬옥 안고 작은 날개를 휘적여 포르르 날아올랐다.
이온의 방 창문을 앞으로 간 욤뇽이는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에 제 주인인 카밀루스를 살피듯이 잠시간 기웃기웃했다. 왜인지 불안해하는 듯 보이는 녀석에게 카밀루스가 살짝 손을 흔들어 주니, 그제야 짧고 두꺼운 꼬리가 안으로 쏙 들어갔다.
창문을 닫히는 것을 확인한 카밀루스는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황성의 탑을 바라보았다.
황도 내라면 웬만한 곳에서는 다 보일 만큼 높디높은 이름 없는 탑. 15년 넘게 자신이 갇혀 있어야만 했던 원망스러운 공간…….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바로 그곳.
〈황자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어미는…… 로제니아 미아블레다.〉
어머니의 이름을 모를 때는 그 이름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나니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공교롭게도 자신이 태어나고 얼마 안 가 저 탑에서 뛰어내렸다고 알려졌으니 어쩔 수 없이 딸려 나오는 추측이었다.
어머니는 자신 때문에 죽은 걸까, 하는.
그래서 선황이 자신을 미워했던 걸까…… 하는.
로제니아 미아블레는 황태자비로 들어오기 전에는 유력한 후작 가문의 영애였다. 한데 그녀가 저 저주받은 탑에서 뛰어내리면서 미아블레 가문은 서서히 힘이 빠졌고, 곧 정계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황후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가 로제니아 미아블레에게 따라붙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들인 카밀루스도 잘 모르지만, 별 언급이 없는 것을 봐서는 아마 평범한 여자였던 듯하다.
적어도 ‘마녀’라고 지칭할 만한 힘이 그녀에게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 힘은 어디서 왔는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라면 자신은 어째서 돌연변이로 태어났는지.
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모든 것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선황은 어머니의 이름 외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가 버렸고, 죽은 자는 더는 말을 할 수 없다.
이제는 자신이 알아보는 수 외는 길이 없었다.
저 탑에 모든 진실이 있다.
이온의 저주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그 정답 역시도 저 탑은 알고 있을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고 해서 이대로 덮어 버려서는 안 되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수년간 미루어 왔던 때가 왔다. 카밀루스 클로델은, 자신의 괴로운 과거를 마주해야만 했다.
카밀루스의 얼굴 위로 결의가 올라왔다.
* * *
허, 허억…….
세상이 온통 검었다. 그 이유가 빛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눈이 멀었기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의 암흑이었다.
숨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그리고 심장이 머리에 붙은 것처럼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극한 두통이 그를 뒤덮었다.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그가 달리는 길은 분명히 있었다. 존재했다. 문제는 끝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이대로 방향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그를 잠식할 때쯤이었다. 마치 구원처럼 그것이 나타났다.
문.
홀로 빛이 나는 문.
그는 직감했다. 저것이, 자신을 구할 단 한 가지의 방법이라는 걸. 저 빛이 아니면 자신은 어떻게 해도 이 어둠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하여 손을 뻗었다. 간절하게.
그렇게 문을 열고 나온 순간이었다.
“이온!”
오감이 한꺼번에 깨어났다.
“하, 하아……!”
막혔던 숨이 토해지는 동시에 주변의 소리가 귓가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빛이 확 들이치면서 시야가 밝아졌다.
눈이 부셔 이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은 가물가물한 시야에 시스템창이 올라왔다.
[상태 이상 : 충만한 마나(강화)]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7%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카밀루스가 보였다. 자신은 자다가 일어났을 뿐인데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이온은 반사적으로 그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려 눈동자를 굴리다가, 방 안에 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러다 뒤늦게야 카밀루스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한 이온은 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간밤에 발작이라도 한 걸까.
“어떻게 된 거야……?”
목소리가 갈라져 나가는 것을 보니 의심은 조금씩 확신이 되어 갔다.
말을 정상적으로 하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이 되었는지 카밀루스가 몸을 물렸다. 그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잠든 상태에서 기절한 모양이야. 이런 경우는 처음 봐서 나도 당혹스럽다.”
내가 자다가 그렇게 된 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려다가 이온은 깨달아 버렸다. 카밀루스와의 마법 계약 중 자신이 실신 상태일 경우 1미터 이내로 강제 소환된다는 항목. 아마 그게 발동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굳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욤뇽이가 왔어.”
어쩜 저렇게 상황에 맞게 거짓말이 바로바로 튀어나오는지.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마침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온은 눈으로 욤뇽이를 찾다가 협탁 위에서 훌쩍이고 있는 걸 보고는 가까이 오라고 손을 뻗으려 했을 때였다.
카밀루스가 그 손을 확 낚아채더니 이온의 몸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어디 깨어나자마자 딴청을 부려?”
그러고 곧장 입술을 부딪쳤다.
“읏!”
카밀루스가 몸을 낮추며 이온의 팔을 자신의 목에 감싸게 했다. 이른 아침부터 혀가 뒤섞이는 농밀한 키스가 이어졌다.
막 깨어난 탓인지 이온은 금세 자극이 오는 것에 작게 신음을 삼켰다.
“응…… 하아…….”
타액에 젖은 혀가 스치면서 추진 소리가 둘 사이를 오갔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랫입술이 빨렸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뒤통수를 바짝 끌어당겼다. 입술이 붓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빨고 깨무는 행위가 집요했다.
그러다 투명한 실을 이으며 입술을 떨어뜨린 그가 엄지로 이온의 입술을 쓸며 낮게 중얼거렸다.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너.”
카밀루스는 이온을 다시 제대로 눕히고는 몸을 틀어 앉아 숨을 골랐다. 어깨가 처진 게, 어딘지 몹시 지친 듯이 보이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