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돼서는 이제 겨우 3일밖에 안 봤지만, 들려오는 그의 무용담을 떠올리면 카밀루스와 상당히 어울리지 않았다.
어제 더 안 아플 거라고 말해 놓고서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민망해진 이온이 눈치를 보았다.
“마나, 많이 소모한 거야?”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그래. 무사히 깨어났으니 됐어.”
정말 정신력 소모가 극심했던지 카밀루스가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피곤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질문을 툭 던졌다.
“이런 몸으로 8년을 어떻게 살았어?”
“뭐, 익숙해지면…….”
병에 익숙해진다는 말이 좀 이상했지만 실제로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기침이나 어지럼증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잠깐 기절해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건 저택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많이 겪다 보니 모두들 서서히 그의 병에 무뎌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아직 많이 본 게 아니니 저런 반응도 이해할 만했다. 이온의 말이 썩 마음에 안 드는지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던 그가 또 물었다.
“계속 신음을 흘리던데 악몽이라도 꾼 건가?”
“잘 모르겠어.”
신음을 흘렸다고……?
이온은 꿈을 더듬었지만 사방이 어두웠던 것 외에는 딱히 또렷이 기억이 나는 게 없었다. 기억나는 거라곤 마지막에 본 문뿐이다.
그나저나 문이라니…… 전생의 기억과 관련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카밀루스의 손이 이마에 닿았다. 눈을 마주치니 밀빛 머리를 쓸어 넘겨 준 그가 다시 얼굴을 가까이하더니 입술을 겹쳤다 떨어뜨렸다.
“왜 자꾸 입술을…….”
“자꾸 봐도 예쁘니까.”
만난 뒤로 대체 벌써 몇 번이나 입술을 빼앗기는지 모르겠다.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의 스킨십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문 이온이 한마디 했다.
“이러다가는 저택에 소문이 금방 퍼지겠어.”
어제 에렌스트 경 앞에서 하기도 했고, 지금도 방에 같이 있다가 나가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금세 눈치챌 터였다.
그런데 카밀루스는 그걸 왜 이제야 걱정하냐는 듯한 태도였다.
“저택뿐일까? 어제 복도에서 사랑싸움 한 건 기억 안 나?”
“그게 왜 사랑싸움이야?”
“왜 사랑싸움이냐니. 머릿속으로 내용 요약해 봐. 누가 봐도 사랑싸움이었어.”
워낙 당당하게 그리 말하니 이온도 그런가, 하며 머릿속으로 내용 요약을 해 보았다.
‘그렇게 들리기도 했으려나?’
카밀루스에게 인사하러 온 하인들이 가까이 못 오고 있었던 걸 떠올려 보면 민망해서 그랬던 건가 싶기도 했다.
골몰하고 있으니, 지켜보던 카밀루스가 지쳐 보였던 표정을 거두어 내며 활짝 웃었다.
“이런 방면으로는 머리 안 돌아가는 거 진짜 귀엽다, 이온.”
“…….”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게.
놀림받은 느낌에 이온이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오히려 왼팔을 침대에 짚으면서 몸을 기울였다.
“연애도 한 적 없지?”
“……누가 날 좋아한다고.”
이온 스스로가 보기에도 자신은 남자로서 매력이 없었다. 몸도 왜소하고 키도 작았다.
그뿐인가. 골골대는 몸 때문에 크레이거 가문에 들어오는 청혼서는 대부분 에밀리 앞으로 온다. 가끔씩 그에게 오는 청혼서가 있긴 했지만, 그나마도 유력 가문에서 보내오는 것은 전무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손으로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나, 에렌스트 경, 버니언. 벌써 셋인데.”
전부 남자잖아.
그렇게 외치고 싶기도 했지만, 일단 버니언이 그 리스트에 들어가 있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한 이온이 툭 내뱉었다.
“버니언은 짜증 나니까 빼.”
“그럼 에렌스트 경은 안 빼나? 설마 그 기사 좋아해?”
“무슨 억지야.”
어제부터 이상한 데에서 질투로 열 올리고 있는 카밀루스가 이번엔 영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일단 나는 억지 아니라는 거고.”
이온은 황당해져 입을 벌렸다.
“대화가 왜 이리저리 튀어? 흐름 못 따라잡겠어.”
“이온, 네가 날 들었다 놨다 하니까 그런 거야.”
“별걸 다 내 탓 하네. 들었다 놨다 하는 건 너잖아. 일단 비켜.”
말하면서 이온이 다시 밀어내기를 시도했지만 카밀루스는 움쩍도 안 했다.
“싫다면.”
“카밀루스.”
완전히 장난기가 발동해 버렸는지 카밀루스가 양쪽 입꼬리를 올려 생긋 웃었다.
“뽀뽀해 주면 비킬게. 너 깨어날 때까지 마나를 쏟아붓느라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인데, 상 안 줘?”
“…….”
머리가 어지럽다는 소리에 이온이 모호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자 카밀루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표정이 왜 그래?”
“너 마나 넘치는 거 아니었어?”
“넘쳐.”
“그런데 머리가 어지러워?”
얼마나 쏟아부었길래 그러냐는 의미가 함축된 물음을 들은 카밀루스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눈을 휘더니 픽 하고 바람 새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게, 그런데도 머리가 지끈거려.”
말이 끝나자마자 카밀루스는 이온이 반응하기 전에 얼른 입술을 빼앗아 버렸다. 아까부터 자꾸만 자신을 밀어내려는 두 손을 꽉 붙잡아 모은 그가 이온을 침대 헤드에 밀어붙였다.
헤드에 뒤통수가 닿는 것에 놀란 이온이 움찔하는 것을 느끼자마자 카밀루스는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 입술을 떼었다.
또 얼떨결에 당해 버린 이온이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깨물며 카밀루스를 노려보았다.
“너 머리 아프다는 거 거짓말이지?”
그에 카밀루스가 이마를 감싸며 하하 웃었다. 정말로 방금 전의 불안함이나 마음고생이 씻긴 듯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걸 이제야 아는 것도 너무 귀여워. 이러니 내가 널 어떻게 안 좋아할까?”
하지만 그런 것도 좋아 보이는 건, 이온 크레이거라서잖아?
이온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표정에 감정이 드러났는지 카밀루스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또 왜 이래.”
이쯤 되면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카밀루스, 있잖아.”
내가 그 이온 크레이거가 아니면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다른 사람이면, 그때도 날 좋아할 수 있을까?
너는 계속 나를 살려 주고, 지켜 주기 위해 고군분투할까?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상태 이상: 금어]
[플레이어가 말할 수 없는 문장입니다.]
“…….”
역시나.
여지없이 막는 시스템 때문에 이온의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강제로라도 참아져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순간적인 충동이 울컥 올라와 내뱉기에는 모든 걸 망칠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온의 표정을 봐 버린 카밀루스는 이온을 채근했다.
“왜, 뭐 때문에 심각해?”
“아니, 아무것도…….”
사실 결론은 뻔한 것 아닌가 싶었다.
카밀루스가 헌신을 바칠 대상은 그를 탑에서 꺼내 준 이온 크레이거뿐이다. 다른 경우의 수가 있을 리가.
애초에 시스템이 막고 있으니 확인할 방법도 없을뿐더러, 기실 굳이 확인해서 양쪽 다 괴로워질 필요가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온은 이제 그만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침대 밖으로 발을 냈다. 그런데 일어서자마자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 살짝 비틀거리자 카밀루스가 같이 일어나 잡아 주었다.
그가 한 손으로는 어깨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팔을 지탱해 주며 속삭였다.
“이럴 때 많이 넘어졌겠다. 그렇지?”
“……아.”
부드러운 음성으로 묻는 소리에 다정함이 담뿍 묻어났다.
“카펫을 더 푹신한 걸로 바꿔 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온은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싫어.”
“공작이 알고도 가만히 뒀을 리는 없어 보이던데, 네가 얼마나 아픈지 제대로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
“가족이라고 굳이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아침마다 이럴 텐데 몰라도 된다고?”
단번에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좋다고 해야 할지.
괜히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갈 것 같은 분위기에, 이온은 그를 곁눈으로 한번 흘겼다.
“할 일 없어, 대공님?”
묻고서 이온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이쪽을 열받게 하려는 목적인지는 몰라도 가벼운 어투로 뒤에서 여봐란듯이 중얼거렸다.
“내 할 일, 별거 있나? 크레이거가의 영식이 아플 때 뛰어오기, 위험에 빠지지 않게 지켜 주기, 밥 잘 먹는지 지켜보기, 넘어질 때 잡아 주기…… 기타 등등밖에 생각 안 나는데.”
“…….”
듣자 하니 기가 막혔다.
이온이 뒤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더니 도로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에 카밀루스가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자, 이온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전하.”
속눈썹이 긴 눈꺼풀을 깜빡이면서 돌연 공대를 해 오는 이온의 모습에 카밀루스가 조금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왜?”
“밤새 어디 다녀오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