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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76)화 (76/317)

“밤새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

이온이 미치게 예뻐서 홀린 탓도 있었지만,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예상치 못했던 터라 갑자기 질러오는 질문에 카밀루스는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입에 기름칠을 한 녀석이 대꾸를 못 하자 이온은 한 건 잡았다고 생각하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카밀루스의 드레스 셔츠 중 어깨 부분을 툭툭 털어 주며 속삭였다.

“이상한 데 먼지가 묻으셨네요. 어디 다른 가문의 영애들이랑 밀회라도 즐기셨습니까? 정원에서 뒹굴었다고 해도 믿을 만한 꼴이신데요.”

시선을 살짝 비켜 자세히 보니 진짜로 팔로 이어지는 부분에 살짝 검게 먼지가 묻어 있었다. 이온이 그가 진짜로 야밤에 어디로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똑바로 말하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혼나는 와중에도 가슴이 두근거린 카밀루스는 웃음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엘프도 아닌데 뭘 먹고 살길래 이렇게 예쁘지?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만.”

대답하면서 쪼개고 있자 이온은 지금 상태에서는 말이 안 통하겠다 싶어 순순히 물러났다.

“내 밥걱정 하기 전에 잠이나 제대로 주무세요.”

그러고 협탁 위에 있는 종을 딸랑였다. 문을 열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선 버틀러가 카밀루스가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잠깐 주춤했으나 이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목욕하게 물 좀 데워 놓고, 새 옷을 준비해 줘. ……아침 먹었어?”

뒷말은 카밀루스에게 향한 것이었다. 고개를 흔들자 이온이 다정하게도 요구를 추가했다.

“늦었지만 아침도. 가볍게.”

“예.”

관심 없는 척하면서 챙겨 주는 게 또 좋아 카밀루스는 몰래 웃었다. 물론 이게 아니었어도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서 좋아했을 카밀루스이긴 했다.

아까부터 계속 실실거리는 카밀루스는 곁눈으로 한 번 째린 이온이 집무실로 건너갔다.

전날 일을 하다 말기라도 했는지 이것저것 서류가 뒤섞여 펼쳐져 있는 책상 앞으로 가 앉는 것을 보면서 카밀루스는 눈치껏 탁자 앞 소파에 몸을 걸쳤다.

그러자 어느새 따라온 욤뇽이가 탁자 위에 배를 딱 붙이고 누웠다. 그 익숙한 모습이 하루 이틀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왠지 이온이 주변에 뭔가 뒀을 것 같아 탁자 밑을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조그마한 간식 상자가 놓여 있었다. 카밀루스가 쿠키를 적당히 꺼내 올려놔 주자 녀석이 천천히 아작거리기 시작했다.

그 나름대로 평화로운 아침의 풍경이라 만족스러워진 카밀루스는 그것을 배경음으로 두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뭐 도와줄까?”

“어차피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갈 거면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머리도 부스스해서는 아직 잠이 다 가시지 않은 듯한데, 금세 일에 빠져드는 이온을 카밀루스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중간에 안경을 쓰는 걸 발견하고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눈 안 좋아?”

건네는 질문에 이온은 카밀루스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예전에 약 한 번 잘못 마셨는데, 이후로 좀 안 좋아졌어.”

“……어떤 약이었는데.”

“몸 안에 마나를 일시적으로 증폭해 주는 약. 저주 중화에도 효과가 있다고 해서 마셨는데 바로 기절했어. 깨어나고 2주 정도 눈이 아예 안 보였던 거 같은데.”

예상보다 엄청 심각한 얘기였으나 지나간 일이라고 가볍게 말하는 이온이었다. 카밀루스는 놀라서 굳었다가 화가 나 쏘아붙였다.

“이온, 위험하게 대체 그런 걸 왜 주워 먹어? 네 저주는 일반적인 저주가 아니야. 아무 데서나 구한 약이 효과가 있을 리 없어.”

“그땐 답답해서 홧김에 그런 거야. 이제 안 그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밀루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이온이 고개를 살짝 드는 것을 보고, 손을 뻗어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카밀루스가 이온의 녹안을 들여다보면서 눈썹을 실그러뜨렸다.

“속상하게 자꾸 아플 건가?”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닌데…….”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면서 카밀루스는 어젯밤 욤뇽이가 가져왔던 분홍색 약물을 떠올렸다. 불안하니 아예 압수해 버려야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상한 약 또 있으면 당장 내놔.”

“…….”

“이온.”

다그치는 말에 이온이 고개를 돌렸다. 서랍을 열어 어제 욤뇽이가 훔쳐 가지고 나왔던 분홍색 약이 든 병을 꺼낸 그가 카밀루스의 앞으로 내밀었다.

카밀루스는 제 손안에서 마기가 피어오르던 것을 떠올리면서 이온을 추궁했다.

“이건 어디서 구했지?”

“오데사 백작이라고, 서부에서 잠깐 올라온 사람인데 그 사람한테서 받았어.”

“그 사람이 뭔데 너한테 이걸 줘?”

“큰 의미는 없고 내 관심을 적당히 끌고 싶었던 거야. 마탑에 있는 지인한테 받았다고 했어.”

마탑에서 마기를 다룬다고?

흑마술의 대부분은 금지된 마법이다. 마탑의 마법사들 중엔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는 괴짜들이 많아서 그쪽으로 몰래 손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긴 한데…….

무엇보다 어제 확인한 마기는 워낙 미량이었기에 사람을 해칠 정도의 것은 아니기도 했다.

카밀루스는 일단 약병을 챙기면서 이온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효과 없을 게 뻔하니까 이건 내가 가져가.”

“그러든지.”

이온도 딱히 미련 없는 모양인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때마침 바깥에서 준비가 다 됐다는 버틀러의 말이 들려와 이온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카밀루스가 에스코트하겠다는 듯이 팔을 내밀자, 이온은 잠깐 멈칫했다가 호의를 받아들였다.

별관으로 향하는 버틀러의 뒤를 따라 복도를 나란히 걸으면서 이온이 적당히 대화할 요량으로 화제를 꺼냈다.

“여기 얼마나 있을 거야?”

“답을 찾을 때까지.”

두루뭉술한 대답이었지만 이온은 무엇을 뜻하는 건지 바로 알아들었다. 저주를 풀 때까지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를 죽이기 전까지 자신의 저주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저것 해주에 좋다는 짓은 다 해 보고 내린 결론이 그랬다. 그래도 카밀루스라면 뭔가 더 아는 게 있을까 싶어 물었다.

“저주라는 건 보통 어떻게 풀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일단 상쇄 마법을 쓰는 게 가장 확실하고 편해. 그게 아니면 저주 해제 약을 먹든가. 일반 사람들이 아는 저주는 대부분 이쪽이기도 하고.”

“내 저주는 상쇄 마법이 보이지 않는 거겠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정확한 해석 자체가 쉽지 않으니 지금으로선 말할 수 없어.”

솔직히 이온은 카밀루스보다 더 강한 마법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기실 사람의 몸에 누구나 마나가 흐른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마법사들이 마탑이나 황실의 마법대대인 노아기사단 같은 집단의 형태를 이룰 수 있을 정도의 수는 된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수많은 사람들 중 마법 사용이 가능한 소수를 모아 둔 것이다. 애초에 일반인에겐 마나 운용부터가 무척 어려운 일로, 실제로도 평생 빛 구슬 하나 띄우는 것조차 낑낑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상쇄 마법이 통하지 않더라도 저주에 따른 증상을 일대일로 없애면 풀리는 경우가 있어. 하지만 네 저주는 증상이 여러 개인 것 같은데…….”

“그런데?”

“하지만 내가 파악한 게 ‘끝’이 아니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중얼거리면서 카밀루스는 제 팔에 감긴 이온의 손에 제 손을 올렸다.

[강력한 마나의 기운이 플레이어의 몸에 스며듭니다.]

[상태 이상 ‘마나 소실’로 인하여 효과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잠깐 사이 또 무언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모양이다. 카밀루스의 눈빛이 가라앉는 것을 보면서 이온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주를 파악하는 건 감에 의한 거야?”

이온이 알아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카밀루스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듯이 손을 도로 떼어 냈다. 앞을 바라보는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 같이 태연했다.

“지식을 기반으로 한 직관…… 통찰력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어쨌든 마법사들끼리만 통하는 언어들이 있지.”

“어렵네, 나 같은 평범한 사람한테는.”

이온이 카밀루스의 담담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그는 또 자신 몰래 수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몇 번이나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대가 없는 일에 매달리는 카밀루스의 선한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럼 나한테 걸린 저주는…….”

“내가 말한 것 중에서 어느 경우도 아닐 가능성이 높아.”

“다른 방법이 또 있어?”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지만 대화를 끊기도 모호해 이온이 묻자 카밀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전자를 죽이면 돼. 하지만 너무 극단적인 방법이라…… 그쯤 되면 시전한 사람도 목숨을 걸고 저주를 걸었을 거야.”

듣고 나니 심란해졌다.

그럼 자신에게 건 저주는 시전자가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저주라는 뜻밖에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저주에 걸린 건 소년 시절이었다. 아무리 공작가의 후계라고는 하지만 그럴 가치가 충분했을까?

저주를 걸었다는 것은 ‘그렇다.’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 이유를 선뜻 추론하기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저주를 건 사람이 이를 빌미로 크레이거 공작을 협박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고민이 많아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 카밀루스가 분위기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이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내가 꼭 풀어 줄 테니까 걱정 마, 왕자님.”

이온은 제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그의 손을 휘저어 쫓아내며 대꾸했다.

“……왕자님은 너 아닌가?”

“난 탑에서 나왔으니 더 이상 아니야. 봉인에서 풀려나야 하는 건 이제 이온, 너니까.”

엉뚱한 비유에 실소가 터졌다.

“동화 같은 소리 하네.”

대화하다 보니 벌써 별관의 목욕탕 앞에 도착했다. 버틀러가 그 앞에 서서 눈치를 주는 것을 보고 이온이 팔에서 손을 빼냈다.

그런데 카밀루스는 그가 뒤돌아 들어가기 전에 손에 뭔가 쥐여 주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어지러워지거나 하면 이거 꼭 흔들어.”

손을 펼쳐 보니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방울이었다. 협탁 위에 놓아 두곤 하는데, 그걸 가져온 모양이었다.

“이건 또 언제 챙겼어……?”

“난 네 걱정만 하잖아.”

카밀루스가 매력적인 눈매를 접어 생긋 웃으며 하는 소리에 이온은 왠지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이라 서둘러 뒤돌아섰다.

‘쓸데없이 세심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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