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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77)화 (77/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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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이 씻고 나와 식당으로 향했을 때, 크레이거가 아들딸의 게으름을 증명하는 것처럼 늦은 아침 식사를 하는 에밀리도 보였다.

이온은 제 동생이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손을 흔드는 모습에 불길함을 느끼면서 그녀 옆자리에 가 앉았다.

에밀리가 이온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늘은 웬일로 별로 안 피곤해 보여.”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8%입니다.]

그녀 말대로 오늘 아침엔 사망 확률이 많이 낮았다. 툭툭 던지는 말 같은데 꽤 잘 맞는 것을 보면 에밀리에게 무슨 촉이라도 있나 싶을 때가 있다.

“컨디션 좋으니까.”

그러면서 맞은편에 앉는 카밀루스를 힐끗했다. 에밀리도 기쁘게 그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사를 끝냈을 늦은 시각이라, 셋만 식탁에 앉았다.

주변에 하인들과 시종, 그리고 카밀루스의 부관이 부담스럽게 셋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조용한 식사 시간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온이 포크로 야채만 적당히 깨작거리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카밀루스가 본인 식사를 제대로 못 하고 있자, 뒤에서 페드로가 예의 바르게 물었다.

“전하, 입맛이 없으십니까?”

다른 사람들의 앞이라 돌려 말한 것이지, 해석하면 평소엔 잘 처 드시면서 오늘은 왜 속도가 늦느냐는 것이었다.

“아니, 맛있는데.”

카밀루스는 그렇게 영혼 없이 답하고는 이온의 접시 위에 제 접시의 고기 한 덩이를 올려 두었다.

“…….”

소리 없는 그 행동으로 식당 안의 모든 이의 시선이 카밀루스에게 쏠렸다.

카밀루스를 잘 아는 페드로 역시 이 인간이 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온은 그런 페드로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호들갑 떨기도 애매하니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조용한 식사 시간의 평화를 깨는 복병은 에밀리였다. 그녀가 카밀루스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듣자 하니 저희 오라버니를 치료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머무시는 거라고 들었어요. 정말 저희 오라버니의 저주를 풀 수 있는 건가요, 전하?”

존댓말을 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입에서 나와서 그런지 몹시 격의 없게 들리는 말투였다. 이온이 뭐 하는 거냐고 곁눈질로 눈치를 주는데, 카밀루스가 음식물을 천천히 씹어 넘기면서 조금의 틈을 둔 뒤 설명했다.

“이 세상에 풀 수 없는 저주는 없습니다. 방법의 문제이지요.”

대공의 신분으로 작위도 없는 공작가의 영애인 그녀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의외였던 터라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되는데…….”

“서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선 거리감을 유지하는 게 좋을 때도 있습니다, 크레이거 양.”

굉장히 단호한 태도였다.

에밀리도 에밀리지만, 그에 놀란 것은 페드로가 더한 듯했다.

어젯밤에 에밀리 크레이거를 짝사랑한다면서 실의에 빠져 있던 사람은 누군가 싶었던 것이다.

“대공.”

이래도 되냐는 뜻을 담아 페드로가 작게 부르자, 카밀루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썹을 한 번 까딱할 뿐이었다.

하지만 오라버니 앞에서 한눈 안 파는 점이 아주 맘에 들었던 에밀리는 씩 웃더니, 식탁 위에서 턱을 괴었다.

“전하께서 북부에서의 활약이 대단하셨다고 들었어요. 엄청 강한 몬스터를 잡으셨다는 소문도 들었었는데…….”

둘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페드로가 카밀루스 대신 얼른 대답했다.

“18살 때 오우거 메이지 무리를 제압하셨죠. 그 소문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오우거 메이지는 오우거 중에서도 상당한 희귀종인데, 당연히 일반적인 인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공격 마법을 구사하는 몬스터였다. 방금 그 이야기는 아이오딘 성으로 쳐들어온 일반 오우거들을 대량 처리했더니 화난 메이지들이 내려왔을 적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에밀리가 딱, 하고 핑거스냅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오우거 메이지면 마법을 쓰는 오우거를 말씀하시는 거죠? 무용담을 듣고 싶어요, 전하.”

하지만 그녀가 이상한 발동을 슬슬 걸고 있는 것을 직감한 이온이 옆에서 핀잔을 두었다.

“에밀리, 식사 중인데 조용히 해야지. 그리고 자세가 그게 뭐야?”

그러자 걸렸다는 듯이 에밀리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말꼬리를 늘였다.

“왜에? 오라버니는 전하께 관심이 없어?”

“…….”

이온이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에밀리는 턱을 괸 것조차 풀지 않았다. 페드로는 모르는 눈치이지만 에밀리는 어제 카밀루스와 이온이 복도에서 대거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리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대충 포크로 야채를 뒤집으면서 딴청을 부리더니 혼잣말을 다 들으라는 양 이야기했다.

“아닐 텐데, 오라버니가 에렌스트 경한테서 아이오딘 소식을…….”

따로 보고받는 것도 들었었는데.

이온이 당황해서 식사 시간이라는 것도 잊고 소리쳤다.

“에밀리!”

에밀리가 저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카밀루스가 그녀의 말에 서둘러 반응했다.

“그거 좀 흥미로운 말이군요. 소공작이 제 뒷조사라도 한 겁니까?”

“아니, 뒷조사 같은 건 아니고…….”

질문은 에밀리에게 던져졌지만 이온이 끼어들어 변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중간에 에밀리에게 가로채이고 말았다.

“맞아요, 그렇게 음습한 건 아니었던 거 같아요.”

단어 선택이 여러 의미로 기가 막혔다. 이온이 하나뿐인 남매끼리 이럴 거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에밀리.”

물론 에밀리는 하나뿐인 남매라서 이러는 거라는 눈빛으로 대응했다. 게다가 이 상황이 몹시 즐거운지 그녀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역시나 세상에서 오빠 놀리는 걸 제일 좋아하는 짓궂은 동생이었다.

에밀리는 이온이 전의를 상실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젠 아주 노골적으로 카밀루스의 연애를 코치했다.

“전하, 저희 오라버니는 초식파라 이런 고기보다는 샐러드 같은 걸 더 좋아해요. 질긴 걸 먹으면 턱을 아파하기도 하고요.”

그녀의 말을 머릿속에 새기며 카밀루스가 눈웃음을 그렸다. 크레이거가에 장난기 많은 아가씨가 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다.

저번에 제게 이온을 밀쳐 준 공로도 있으니 카밀루스는 순순히 감사의 말을 입에 올렸다.

“좋은 팁 고맙습니다, 크레이거 양. 다음에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오래 묵혔다가 이자까지 쳐서 받아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페드로는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데도 대화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려워 머리를 굴리다가 어제의 대화를 더듬었다.

당연히 영애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생각해 보니 카밀루스가 에밀리 크레이거를 좋아한다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이온이 드르륵 의자를 뒤로 미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러고 잡을 새도 없이 식당을 걸어 나갔다. 카밀루스는 곧바로 쫓아가기보다는 이온의 그릇을 당겨 오더니 버틀러에게 새 접시를 건네받아 그가 남긴 음식들을 직접 옮겼다. 그러고 에밀리에게 물었다.

“제가 먼저 자리를 떠도 되겠지요, 레이디?”

야무지게 음식을 옮기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에밀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물론이죠. 제인, 전하께 새 식기도 챙겨 드려.”

그녀의 말에 근처에 있던 하녀가 카밀루스에게 새 포크와 숟가락, 칼을 건넸다.

“배려에 고맙습니다.”

접시들을 트레이에 챙긴 카밀루스가 그런 인사를 끝으로 미련 없이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를 페드로가 서둘러 따라갔다.

그가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 쪽으로 향하는 카밀루스의 옆에서 트레이를 건네받으려고 손을 내밀면서 방금 전에는 차마 꺼내 놓지 못했던 의문들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좋아하신다면서요?”

영애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는 뜻이었다. 카밀루스는 어딜 넘보냐는 양 페드로의 손을 가볍게 피하며 반문했다.

“눈이 달려 있으면 누가 더 미인인지는 구분해야지?”

“…….”

그렇게 따지면 에밀리 크레이거는 사교계에서 제일가는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공작이 너무나도 영애를 애지중지하는 나머지 눈에 차는 사람이 없어 신랑감을 안 고른 것뿐이지 결혼을 원하는 상대는 줄을 섰다.

반면 이온 크레이거는 수완은 있을지언정 막상 신랑감으로는 그렇게 평가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카밀루스에게 그런 세간의 평 따위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밀루스가 지난 8년간 다시 만나기만을 손꼽아 왔던 상대가 공작가의 영애가 아니라 영식이라는 것을 깨달은 페드로는 잠시 충격에 멍해졌다.

제 아들도 아닌데 벌써 손자 농사가 망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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