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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79)화 (79/317)

크레이거 공작은 보시오.

어제저녁, 비렌시움 대공이 크레이거가의 저택에 찾아갔다는 소식은 들었소. 그리고 그대가 대공을 집에 들였다는 소식 역시.

그 사실이 짐을 얼마나 당혹게 하였는지, 그것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공작 역시 짐작하리라 믿소.

짐은 그대의 선택에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요. 아시다시피, 그대는 선황의 친우로서 짐에게도 역시 아버지와 같은 이지. 짐은 오늘 아침, 또다시 아버지를 잃은 듯한 깊은 슬픔에 빠졌소.

그대도 선황의 뜻이 분명 이 버니언 F. 클로델에 있었다는 것을 알 것이오. 한데 어찌하여 그런 선택을 하였는지, 대공이 어떤 말로 그대를 미혹하였는지 짐작은 되오.

긴말하지 않겠소. 짐은 위대한 오브라이언의 공신 가문인 크레이거 가문과의 연결이 끊기는 것을 원하지 않소.

지금 우리에게는 생산적인 대화와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오.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는 법이라, 한 번 지나가면 결코 돌아오지 않소. 적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편지를 본다면 즉시 짐을 찾아오시오.

지난 연회에서 얼굴을 비치지 않은 그대의 영식 또한 동행한다면 좋겠군. 우리의 타협에 그의 거취가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줄 터이니.

에렌스트 경을 통해 편지를 건네받은 카밀루스가 끝까지 내용을 훑고는 짧은 감상을 내놓았다.

“공작이 버니언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니 놀라운데.”

본문 자체는 특별할 것 없는, 자신이 공작 저에 들어온 소식을 듣고 쓸 수 있는 무난한 내용이었다.

다만.

“도련님도 오라고…… 쓰여 있군요.”

탁자에 내려놓은 내용을 읽고는 에렌스트 경이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온은 의자 위에 앉아 괜스레 펜을 굴렸다.

“연회장에서 인사를 안 했으니 밀린 숙제를 하는 셈 치면 되긴 하는데…… 마지막 문장이 묘하긴 해.”

자신의 거취가 타협의 근거가 된다니, 무슨 뜻인지 알 듯 말 듯 아리송했다.

설마 진짜로 결혼이라도 원하는 걸까? 이온의 눈엔 그렇게 보였고, 에렌스트 경의 의견은 좀 더 과격했다.

“납치나 감금이라도 하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만.”

카밀루스가 실소했다. 농담이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재미는 전혀 없었다.

“그럼 애초에 이런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겠지. 길거리 돌아다니던 이온을 빼내는 건 지금 버니언한텐 어린애 손목 비트는 일만큼 쉬운 일이야. 안 그런가?”

“……하지만 예감이 좋지는 않으니 핑계라도 대서 안 가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두 남자의 말을 듣던 이온은 고민에 빠져 한동안 침묵했다.

기절해서 운신을 못 하고 있다고 하면 버니언의 부름을 충분히 피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편지는 거의 경고장 수준이었다. 가지 않으면 크레이거 가문과 황실의 연이 완전히 끊길 것이라고, 아니 그것에서 나아가 등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의 회피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마냥 보고 넘길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빨리 오라고도 되어 있고.

“아버지와 상의해야겠어.”

이온이 그러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옷걸이에 걸쳐 둔 겉옷을 걸치는 동안 카밀루스가 잘라 말했다.

“공작에게도 묘수는 없을 거야, 이온.”

“그럼 너에게는 묘수가 있어? 넌 어차피 동행도 못 해. 그거야말로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꼴이니까.”

단추를 잠근 이온이 더 해 볼 말 있으면 하라는 눈초리로 바라보자, 카밀루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날 이용하려고 안 하지?”

“네가 뭘 도울 수 있는데.”

이온이 무슨 꿍꿍이냐고 묻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자 카밀루스가 양어깨를 으쓱했다.

“동행은 안 해. 다만 나도 마침 그 옆에 지나갈 예정이라 동생 얼굴 한 번은 볼까 싶었지.”

저번엔 혈육의 정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하더니, 뻔뻔하게 동생이라고 잘도 지껄였다.

* * *

이온 역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카밀루스의 말대로 공작과 상의한다고 해서 별다른 게 있지는 않았다.

이후 카밀루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먼저 밖에 나가 버렸고, 이온은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 내황성으로 입성을 했다.

이온은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지는 욤뇽이를 두 손으로 잡아 올리며 중얼거렸다.

“왜 점점 커지고 있는 거 같지.”

“꾸우?”

소리를 들은 욤뇽이가 요즘따라 조금 볼록해진 것 같은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온이 그런 녀석을 무릎 위에 올려 둔 채 주름진 그곳을 마구 문질러 주자 욤뇽이가 뀨뀨, 울며 좋아했다.

그러던 중 이온은 문득 이전에 카밀루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본능적으로 강한 마나에 끌리는 것 같아. 처음 만났을 때 내 몸의 마나를 몽땅 가져갔었거든. 그러더니 손가락 두 마디만 했던 게 조금 커졌어.〉

아, 하고 작게 감탄사를 터뜨린 이온이 욤뇽이에게 물었다.

“혹시 카밀루스의 영향이야……?”

그럼 그동안 못 큰 건 이온의 옆에 있었기 때문일까? 이쪽은 마나 운용 자체를 못 하니까?

그런데 다 알아들었을 욤뇽이는 물빛 보석안을 깜빡깜빡하다가, 어쨌든 데려가 달라는 양 몸을 비틀며 애교를 부렸다.

“뀨우우우!”

그래, 뭐 덩치가 커지는 게 대수는 아니다.

이온은 몸을 줄인 욤뇽이를 미리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역시나 평소보다 바지 주머니가 빡빡해지는 느낌에, 이대로면 곧 못 들어가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됐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데리고 다녀야 하나 고민하던 중, 마침 생각을 끊듯이 마차가 멈췄다. 도착했다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자 문을 열고 내려선 이온은 마중 나온 시중들을 보고 한 번 큰 숨을 들이켰다.

안내를 따라 공작과 함께 새 주인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양궁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을 기다린 듯 활짝 열어 둔 정문. 그곳을 지나 아치형 기둥들이 양편에 세워진 중앙홀을 걸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태자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에, 그 화려함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온통 금칠한 것처럼 번쩍거리는 기둥들과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사람이 다닌 적 없는 것처럼 깨끗하게 닦아 둔 바닥을 보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솔직히 버니언이 대관식을 할 때만 해도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는데, 앞으로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곳을 드나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비로소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한편 이미 이곳에 수없이 드나들었을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보다는 여유로웠다. 그는 왜인지 경직되어 있는 듯한 이온에게 시선을 주며 작게 속삭여 왔다.

“소공작, 몸은 괜찮은 게냐? 결계 때문에 네가 황성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고 대공이 당부하더구나.”

이런 얘기는 또 언제 한 건지.

이온은 역시 카밀루스가 늘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반 보는 빠른 것 같다고 다시금 느꼈다. 그러면서 제 사망 확률을 확인했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16%입니다.]

이 정도면 상당히 넉넉한 편이었다. 아직 결계로 인해 느끼는 압박감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바로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결계 안에 오래 있으면 저주 강화 효과를 얻는 듯한데, 몇 시간 황성에 머무른 적이 있음에도 아직까지는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 한계점이 그리 낮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전에도 힘들어했던 아들을 본 탓인지 공작은 얼굴에서 걱정스러움을 거두진 못했지만, 긴 복도를 지나 궁정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표정을 고쳤다.

한데 응접실 안에는 그들보다 먼저 온 이들이 있었다.

[개체의 정보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마탑주 재니스와 그 조수인 마리엘이었다. 어째서 그들이 같이 불려 왔는지 모르는 공작이 안쪽 자리로 걸어가려다 말고 멈칫했다.

재니스가 먼저 웃으면서 일어나 살짝 허리를 굽혔다.

“무척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자네…….”

“이리 따로 뵙는 건 거의 10년 만인 것 같지요?”

공작은 그에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가 도로 꾹 다물었다. 가까이 있는 이온은 그의 턱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공작은 시종의 손짓에 따라 재니스와 조금 떨어진 안쪽 자리에 몸을 내린 뒤 앞을 보며 한마디 했다.

“자네는 늙지도 않는 모양이군.”

“공작의 칭찬이 꽤 달달하네요.”

마냥 칭찬의 의미는 아닌 것이, 공작의 눈에 재니스는 정말 조금도 늙지 않은 듯 보였다. 마탑주를 꽤 오래 알았던 그로서는 약간 오싹하다고 느낄 만큼.

하지만 마법으로 경지를 이룬 그라면 본모습을 감추는 일 정도는 숨 쉬는 것보다 쉬울 테니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존재 자체가 몹시 거슬릴 뿐.

“……폐하께서 부르신 건가?”

“그렇지 않으면요?”

재니스가 반문한 순간, 마침 그들의 화제에 오른 이가 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폐하께서 납십니다.”

그 목소리와 함께 응접실 안에 있던 이들이 전부 기립했다. 그리고 두꺼운 흰 망토를 두르고 그 안에 검은 정복을 입은 버니언이 유유히 안으로 들어섰다.

또각, 또각.

하얀 하이힐의 굽이 맨바닥을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고개를 살짝 들고, 긴 망토를 바닥에 끌며 나타난 그는 그들이 앉아 있는 탁자와 조금 떨어진 위치의 상석에 앉았다.

이전보다 더한 오만함을 몸에 휘감고 나타난 오브라이언의 43대 황제인 버니언 클로델이 그의 뒤로 들어오는 밝은 햇빛을 등진 채 이온을 돌아보았다.

그는 공작을 제치고 이온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심히 보고 싶었네, 소공작.”

콕 집어 하는 말에 차마 무시하지 못하는 처지인 이온은 작게 대꾸했다.

“뒤늦은 문후(問候)를 용서하십시오, 황제 폐하.”

그러고 버니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를 통해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라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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