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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80)화 (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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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루스를 궁의 안쪽으로 안내하면서도 시녀는 내내 그가 왜 이곳에 왔나 생각하는 듯 연신 힐끗거렸다. 충분히 무례한 일이었지만 카밀루스는 모르는 척 무덤덤한 표정으로 팔소매를 다듬으며 그녀의 안내에 따라 발을 옮겼다.

햇살이 비치는 회랑을 도는데, 문득 벽 쪽 기둥 사이사이에 역대 황후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림이라 미화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같이 미인이었다.

카밀루스는 저 중에 혹시 자신의 어머니가 있을까 궁금해 잠깐 살펴보았지만, 초상화 밑에 쓰인 글씨가 워낙 깨알 같아 이름을 제대로 알아보기란 요원했다.

결국 관심을 거두고 정면을 바라보는데 시녀가 손짓하며 이곳이라고 말했다.

조용히 응접실 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자 곧 여인의 궁이라 그런지 웅장하다기보다는 아늑해 보이는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서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올리고, 어깨가 드러나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향기로운 차를 즐기며 기다리고 있던 태후가 짧은 인사로 카밀루스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비렌시움 대공.”

카밀루스는 먼저 시선을 돌리지 않는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비렌시움 대공, 카밀루스 클로델이 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같은 성씨를 쓰는 처지이고,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따지고 보면 무척 가까운 사이였으나 서로를 제대로 본 적 없는 둘은 인사를 나누고 잠시 침묵했다.

태후는 고개 숙인 카밀루스를 의자에 앉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틈을 두고 일어나 그의 손을 잡았다.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고운 손이 카밀루스의 손과 겹쳐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카밀루스가 의자에 앉는 것을 끝으로 방의 문이 닫히고, 안에는 둘만 남았다. 일부러 사람을 모두 물린 것 같았다.

자신의 자리에 도로 몸을 내린 태후가 손짓으로 차를 권했다.

대화가 시작된 건 카밀루스가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천천히 넘긴 뒤였다. 태후가 먼저 말꼬를 텄다.

“갑자기 찾아온다고 하여 많이 놀랐습니다.”

카밀루스는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답했다.

“그런데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대공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으니까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였다는 그녀의 대답에 카밀루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황제 폐하와 관련된 일인지요.”

태후는 조용히 티포트에 있는 차를 제 잔에 따랐다. 대답 없음으로 그렇다는 표현을 한 것이었다.

카밀루스는 그녀의 요구를 먼저 들어주지 않으면 제가 할 이야기는 꺼낼 수도 없겠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얼마 안 가 그녀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이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아이오딘으로 가면 숨을 거둘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그이를 보면 누구든 심지가 얼마 남지 않은 초와 같이 위태로운 상태라는 걸 알았을 정도이니까요. 대공도 알다시피 오브라이언의 황제는 태양궁의 침대 위에서 우아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지요. 하지만 대공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숨을 거두는 바람에 그이는 그러지 못했어요. 그이에게 체면은 평생 금과옥조처럼 여긴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대공을 위해 포기한 거예요.”

꽤나 긴말로 서두를 연 태후가 살짝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를 굴려 카밀루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오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였어요.”

실로 우아한 화법이었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카밀루스의 머릿속에 자신의 어머니도 살아 있었으면 이랬을까 하는, 다소 쓸모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쓸모없는 상념에 불과했다. 카밀루스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그녀의 앞에 즉각 답을 내놓았다.

“아시다시피 폐하께서는 다섯 명의 증인 앞에서 저에게 대공위를 하사하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이상의 것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자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그녀에게 굳이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가요?”

짧은 태후의 말속에는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선황이 찾아간 것이 맞느냐는 의문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선황이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아이오딘에 온 것은 명약관화한 진실이다. 겪은 자신도 믿기지는 않고, 왜 그랬을까 싶지만.

“태후께서는 선황과 오랫동안 함께하였으니 그분의 방식을 잘 아실 텐데요. 선황께서는.”

“자신의 입으로 진심을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요.”

“……그렇습니다.”

선황이 생전에 노골적으로 제 뜻을 드러낸 경우는 딱 둘뿐이었다. 후계자인 버니언을 향한 지지와 사생아인 카밀루스를 향한 배척.

이외에는 늘 모호한 화법으로 사람을 헷갈리게 했고, 그 와중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기 전에 알아서 갖다 바치도록 유도했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참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이는 정말 못된 사람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카밀루스는 침묵으로 동조했고, 태후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그렸다.

둘 사이에 묘한 유대감이 형성되어 가자 태후의 몸짓에 좀 더 여유가 배었다. 카밀루스는 그녀를 따라 차를 홀짝이다가, 태후가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가는 것을 시선으로 좇았다.

벽 쪽의 작은 탁자 앞으로 간 태후는 미리 준비해 둔 듯 그 위에 놓여 있던 작고 화려한 상자를 가지고 자리에 돌아왔다.

자신 쪽으로 밀리는 예의 상자를 본 카밀루스가 손을 대기 전에 먼저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저도 잘 모른답니다. 하지만 그이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 중 하나였어요. 그래서 물건을 정리하던 중 남겨 두었지요.”

“열어 봐도 되겠습니까.”

태후는 말없이 상자를 눈짓하는 것으로 허락의 뜻을 비쳤다.

상자 안에는 약병이 들어 있었다. 육각형으로 깎인 투명한 병 안에는 검은 액체가 채워져 있었는데, 일전에 본 분홍색 약물처럼 혼자서 보글보글 끓는 중이었다.

“대공은 마법에 대한 지식이 무척 깊다고 들었어요.”

어서 안을 확인해 저에게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답을 달라는 의미였다. 카밀루스는 의도가 뭔가 싶어 잠시 태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약물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그녀는 카밀루스를 통하지 않아도 알아볼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마탑의 인물을 한둘쯤 불러들이는 것이 더 편할 텐데, 굳이 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자신이 이곳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대놓고 묻지는 못하는 질문이라, 카밀루스는 상자에서 약병을 꺼내며 가볍게 대꾸했다.

“과찬이십니다.”

그러고 뚜껑을 열었는데, 그러자마자 검은 연기가 꽃 모양으로 얽히며 올라오다가 주변으로 확 퍼지려 했다. 카밀루스가 서둘러 그 기운을 모아 도로 약병 안에 가두고 뚜껑을 닫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걸 선황께서 가지고 계셨단 말입니까?”

“어떤 물건인가요?”

이 꽃 모양으로 맺히는 검은 연기는 마기였다. 작은 약병엔 한 사람쯤은 순식간에 잠식시킬 수 있을 만큼의 마기가 들어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정도 마기를 담은 약물이면 저주를 일으키는 용도일 것 같군요…….”

그것도 아주 강한.

그런데 약물이 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번의 분홍색 약물과 마찬가지로 마나도 함께 응축해 놓은 듯했다.

본래 마기와 마나는 서로 밀어내는 성질의 것인데, 이렇게 함께 융화된 경우는 카밀루스도 이전에 보지 못했다. 둘이 융화되면 어떤 효과가 나는지도 사실 짐작이 되지 않았다.

생각하다 설마, 하는 느낌이 들어 카밀루스가 태후에게 청했다.

“이 물건, 제가 가지고 가도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태후는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그건 곤란해요. 나도 이제 그이를 추억할 게 그것밖엔 없으니까요.”

추억이라니. 누가 봐도 핑계에 불과한 말이었다.

하지만 태후는 제가 우위에 있음을 안 순간 느긋해졌다. 카밀루스를 더 애태우기 위함이었다.

카밀루스의 빈 잔에 직접 찻물을 채워 준 그녀가 곱게 웃었다.

“홍차 맛이 좋지 않나요? 북부의 눈을 맞고 자라는 어린 찻잎을 따 온 것인데, 맛이 아주 독특하답니다.”

“찻잎에 그런 종도 있군요. 북부에 살면서도 몰랐습니다.”

건조하게 대답한 카밀루스가 잔을 다 비운 뒤에야 태후는 길을 열어 주었다.

“대공이 추억거리를 대체해 줄 것을 나에게 건네어 주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겠어요.”

“……제게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말하면서 카밀루스는 그녀가 왜 자신에게 이 약병을 보여야만 했는지 깨달았다.

과연 짐작대로의 질문이 그녀에게서 건네어졌다.

“대공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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