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81)화 (81/317)

“대공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요?”

이 질문에 카밀루스는 어쩌면 내심 실망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동년배인 그녀라면 뭔가 더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물론 그건 태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황이 자신에겐 뭐라도 흘리지 않았을까 기대했을 텐데, 애초에 그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카밀루스는 왜인지 속이 긁혀 홧홧해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뿐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다 죽어 가는 선황이 찾아와 비쩍 마른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던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이 떠올랐다.

그것을 애써 떨쳐 내며 카밀루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저도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하고, 선황께서도 말씀해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닮았다는 것 외에는.”

태후는 그에 이 방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꽤 큰 표정 변화를 일으켰다.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한숨은 간신히 참는 듯했으나 더는 감정의 동요를 들키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각, 또각.

구두의 굽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이제 그녀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도 표정은 있었다.

“난 그이와 20년 가까이 살았지만 그를 잘 몰라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있어요.”

햇살이 쏟아지는 창문 앞으로 간 지금 그녀는 지금 몹시 씁쓸해하는 중이었다.

“그이는 대공의 어머니를 사랑했어요. 죽을 때까지.”

그 말은 곧 자신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카밀루스의 귓가에 죽기 직전 선황이 내뱉었던 말이 선하게 울렸다.

〈아직도 사랑한다.〉

로제니아 미아블레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들을 때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는 데만도 급급하여 그 뒤에 있을 또 다른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정말 잔인한 사람이지 않나요? 난 평생 내 아들을 인질로 잡힌 거나 마찬가지예요.”

“태후 폐하.”

태후가 현 황제에 대해서 하는 말이 꽤 위태로운 것이라, 카밀루스가 문 쪽을 돌아보며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태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황이 세상을 떠난 지금, 더는 두려움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 말이 분란을 일으키는 말 같나요? 난 대공이 공감해 줄 줄 알았는데요.”

선황은 대체 몇 사람에게 업보의 족쇄를 채웠던 건가.

그 사람의 최대 피해자나 마찬가지인 카밀루스는 물론 그녀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연민의 말이 흘러나온 그때에, 태후의 목소리엔 미세하게 울음이 섞였다. 자세히 듣지 못한다면, 그녀의 저 쓸쓸한 뒷모습을 모른다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미세하게.

“모두가 그이를 철혈의 군주라고 표현하지만 난 공감하지 않아요. 그이는 누구보다 사랑을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이런 말씀을 저에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밀루스의 물음에 태후는 드디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강렬한 햇살과, 그로 인한 짙은 그림자가 그녀의 두 눈을 덮은 눈물을 가려 주는 중이었다.

“난 구원받지 못했지만 누군가를 구원할 수는 있을 것 같더군요.”

“…….”

그 구원의 대상은 자신인가.

다소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카밀루스는 인내심 있게 뒤의 말을 기다렸다. 눈앞의 안타까운 한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곧 응접실에 시처럼 묘한 운율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이는 아마 대공은 사랑했을 거예요, 그것도 아주 많이. 어쩌면 내 아들 버니언보다 대공을 더 사랑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겠죠.”

썩 신통한 이야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밀루스는 웃음 참지 못할 뻔했다.

‘그게, 사랑이었다고?’

친아들을 탑에 가두고 학대하는 것조차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증오라는 단어가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태후는 어떤 확증이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대가 북부로 향했을 때의 화려한 행렬을 기억하나요? 그이는 그날 대공을 지켜보기 위해 황성의 정문이 가장 잘 보이는 창문 앞에 내내 서 있었어요. 대공이 이끌고 가는 기사들의 행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요.”

그날의 일은 카밀루스도 남들의 입을 통해 여러 번 들었다.

그레나 기사단과 노아 기사단이 아이오딘으로 떠나는 자신을 배웅하던 그날, 선황이 태양궁에서 내내 지켜보고 있었노라고.

그 때문에 사생아인 카밀루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아니냐는 오해도 많이 샀지만, 글쎄.

카밀루스는 그것이야말로 그의 위선이 아닐까 싶었다.

가짜 선의, 자신의 죄를 덜기 위한.

하지만 카밀루스는 단호히 말할 수 있었다. 설령 거기에 어떤 한 조각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해도, 그것이 그의 면죄부가 되어 주진 않으리라고.

그런데 태후의 시각은 달랐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는 자존심과 체면을 내려 두고 그대를 찾아갔죠. 대공에겐 그이의 그런 선택이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가 볼 땐 그건 분명한 그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양보였고, 희생이었어요.”

“태후 폐하, 안타깝지만…….”

양보니, 희생이니.

그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더는 들어 줄 수 없었던 카밀루스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 말은 저에게 구원이 아닙니다.”

태후의 얼굴이 기울어졌다. 표정엔 정말로 의문이 가득했다. 그녀는 방금 발언의 문제점을 정말로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째서죠?”

“사람을 칼로 찌른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찔렀다는 이유로 용서하실 겁니까? 아니면 그 이유를 듣고 이해나 감동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반문한 카밀루스는 안타까움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말은 틀렸지만, 공감은 해 줄 수 있었다. 같은 사람에게 고통받았다는 공통분모가 있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그들은 상대방을 연민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단지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는 행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문제의 해결을 뜻하지 않았으므로.

“이런 이야기를 하신 건 태후 폐하께서 저를 구원하였다는 사실로 위안을 얻고 싶기 때문이었겠지요. 송구하나, 제가 거기에 휘둘려 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

“저를 기다리셨던 것 같은데 원하시는 답을 내 드리지 못해 저 역시 마음이 좋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 말이 잔인하게 들리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카밀루스는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좋은 추억’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기만이었다. 본인이 파란 안경을 쓴 채로 하얀 물체를 봐 놓고서는 물체가 파랗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태후 폐하, 용서를 구하는 건 가해자만 할 수 있습니다.”

태후에게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짙은 그림자에 가린 그녀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이는 죽었어요.”

“그러니 서둘러 잊는 것 외에는, 벗어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의 망령에 사로잡히게 될 터이니.”

“그게, 그이에게 평생 괴롭힘을 당해 온 대공의 깨달음인가요?”

카밀루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한 소년에게 구원받은 자의 깨달음입니다.”

누군가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태후는 그런 카밀루스를 보면서 입술을 움찔했다.

단지 사랑받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아직 선황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공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평생을 학대당하면서 더한 고통에 빠져 있던 카밀루스는 몹시 편안해 보였다. 선황의 죽음과 함께 저를 짓누르던 무언가를 날려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태후께도 적절한 구원자가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카밀루스의 말에 태후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활짝 펼쳤다. 그렇게 얼굴을 가린 그녀가 부채를 천천히 부치며 완전히 뒤돌아섰다.

“거기 있는 것은 가지고 가도록 해요. 나에겐 어차피 쓸모없는 물건이니까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밀루스는 거절하지 않고 마기가 담긴 약물 병을 들어 올렸다.

이것으로 이온의 해주에 대한 답에 조금이라도 근접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고, 오늘 제가 태양궁 옆을 지나갈 겸 겸사겸사 찾아온 용건을 입에 담았다.

“실은 태후 폐하께 허락받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방금까지 제법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생각했던 태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세 전환을 했다.

“생면부지의 나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가요?”

예상했던 바라 카밀루스는 그저 작게 웃을 뿐이었다.

“황실도서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곳의 장서를 탐내는 것은 아닐 텐데요.”

“예, 황실의 기록을 찾기 위함입니다. 태후께서도 저의 어머니가 누군지 궁금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부채 위로 드러난 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위명을 들었을 때는 곰 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공은 곰이 아니라 여우였네요.”

허락의 말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