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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82)화 (8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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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언의 미소를 보면서 이온은 제 마음속에 불길함이 피어오름을 느꼈다. 어째서 그가 마탑주와 그 조수, 그리고 공작과 자신이라는 조합을 한자리에 모았는지도 의문스러운 터였다.

어쨌든 분명한 건 지금부터 계속 개 같은…… 아니 개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숨까지 참으며 각오를 다졌지만 그렇게 녹록한 짓은 아니었다.

“내가 소공작을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알고 있나?”

그에 이온은 손수건을 꺼내 자연스럽게 입을 가리며 기침을 흘렸다. 사실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무기가 있는데 안 쓸 이유도 없다.

“제가 감히 폐하의 너른 마음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다만 저의 거취, 어떤 걸 정하고 싶으신 건지 몹시 궁금할 뿐이죠…… 흡…….”

말끝에 숨을 들이켜며 곁눈으로 버니언을 힐끗했다. 그는 이온의 연기쯤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턱을 괴면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렇지만 이온은 뻔뻔하게 눈꺼풀을 살짝 감고, 시선을 내리깔아 에메랄드 빛 눈동자에 옅은 그늘을 만들었다. 그러자 아버지의 걱정 어린 소리가 넘어왔다.

“소공작, 괜찮으냐?”

역시 속는 정도는 사랑에 비례하나 보다.

작게 코웃음을 친 버니언이 드디어 편지에서 언급했던 그 화제를 입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소공작이 루미에르홀에 들어갔을 때 비렌시움 대공도 함께였다고 들었는데?”

그러자 이온이 눈을 들고 세상 순진해 보이는 표정으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폐하, 설마 제 뒤를 밟으십니까?”

물음에 옆에서 공작이 눈썹을 조금 꿈틀하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버니언의 마음속 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려오는 듯했다.

‘그만 좀 하지?’

하지만 이온이 얼굴에서 그늘을 거두지 않고 있으니, 버니언도 더는 눈총을 주지 않았다.

“뒤를 밟긴. 그 정도는 귀가 밝으면 다 들을 수 있는데.”

“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생각해 보니 클로델 왕조가 열리고 황실이 한 번도 크레이거 가문과 연을 맺은 적이 없지 않던가. 이미 12대가 지났는데 말이야.”

‘설마 그 청혼이 진짜라고?’

황태자 시절에는, 사실 그때도 이해는 안 됐지만 어떻게든 장난이라고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무게감이 달라졌다.

얼마 전에 에렌스트 경에게 아무리 그래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고 꾸짖었던 이온인데, 지금은 저 자식이 진짜로 머리가 돌아 버려서 천지 분간 못 하게 된 건가 싶었다. 크레이거 공작도 마찬가지 생각인지 표정을 굳히더니 넌지시 물었다.

“송구하나 폐하께서는 이미 정혼자가 계시지 않습니까?”

“아직도 혼인을 안 올린 걸 보면 모르겠나? 그거야 선황이 정해 준 이일 뿐이지. 안 예뻐서 마음에 안 들어.”

버니언의 대꾸를 듣고 어이없어졌다. 차라리 정혼자가 저 덫을 피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덫이 제 발밑으로 온 것은 유쾌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온이 노골적으로 표정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버니언이 갑자기 앞으로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명했다.

“이리 와 봐, 소공작.”

먼저 크레이거 공작의 검어진 안색을 살핀 이온은 응접실의 소파에서 일어나 그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를 향해 버니언이 재촉하는 듯이 자신의 손을 흔들었다.

손이 닿자 창이 떴다.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강화)]

[마나가 부족하여 강화율을 올릴 수 없습니다.]

‘마나를 넣어 줬었나 보지?’

심히 불결하긴 했지만 영향이 없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라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돌연 버니언이 잡힌 손에 입술을 가까이하려 했다. 이온이 놀라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꽉 붙드는 것에 실패해 버렸다.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폐하! 제 아들을 욕보이지 마십시오.”

다행히 아버지의 으름장에 입맞춤 직전에 멈춘 버니언이 눈빛에 날을 세웠다.

“내가 이러는 게 욕보이는 건가? 짐은 소공작의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현하려 한 것인데.”

“…….”

손을 잡은 채 저를 살짝 올려다보는 그를 이온이 눈아래로 내려다보자, 버니언이 입술에 선명한 미소를 띠었다.

“날 내려다볼 수 있는 이런 오만함도 마음에 들고?”

역겨우니 면상 좀 치우세요.

사석이면 주저없이 그렇게 말했을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을 따름이다.

이온이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버니언이 아깝다는 듯이 손을 놓아 주었다. 그에 얼른 손수건으로 잡혔던 손을 감싸고 티나지 않게 죔죔을 하는 이온에게 버니언이 이어 말했다.

“아마 대공이 그대의 저주를 풀어 준다면서 공작을 회유한 것이겠지? 그는 자신이 최고의 마법사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니.”

이온은 문 쪽 가까이 앉아 있는 마탑주 재니스를 힐끗하며 반문했다.

“틀립니까? 적어도 지금은 대공이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맞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재니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소공작.”

그 말은 이온, 크레이거 공작, 그리고 버니언 모두의 눈총을 샀다. 재니스에게 안 도와줄 거면 좀 닥치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던 버니언이 이온에게 다시 시선을 옮기며 표정을 고쳤다.

“하지만 짐도 그대의 저주를 풀어 주고 싶다는 이 마음은 진심이지. 방법만 있다면 뭐든, 해서라도 해결해 주고 싶어.”

버니언은 말하면서 ‘뭐든’이라는 말에 특히 방점을 두었다. 크레이거 공작이 그 말뜻을 예민하게 알아듣고는 물었다.

“……설마, 폐하께서 그 답을 알고 계신 겝니까?”

진짜 ‘설마’였다. 이온이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의심스럽게 쳐다보는데, 버니언이 재니스 옆의 조수를 불렀다.

“마르.”

“예, 폐하.”

이온이 일어나는 마리엘을 돌아보았다. 황제의 응접실에서마저 케이프를 벗지 않은 그는 버니언의 고갯짓에 이온의 옆으로 다가왔다.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공자?”

“무슨…….”

“손을 잠시 내어 주시지요.”

이온이 주저하고 있는데, 지금껏 바지 주머니 속에서 얌전히 있던 욤뇽이가 자세를 바꾸고 있는지 꿈틀거렸다.

이온은 당혹스러웠지만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자연스럽게 손을 내려 가만히 있으라는 듯 그곳을 지그시 눌러도 보았으나, 욤뇽이의 몸 비틀기가 심해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한데 시간을 지체하는 이온을 이상하게 여긴 마리엘이 채근해 왔다.

“공자?”

“…….”

그래도 평소에 아무 일 없을 때는 얌전히 있는 욤뇽이였다. 아직 아기 드래곤에 불과했지만, 신통한 구석이 있으니 갑자기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다 싶었던 이온은 마리엘과의 접촉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여 이온이 마리엘에게서 몸을 틀어 버니언을 돌아보았다.

“폐하, 그 전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 저주에 대한 호기심을 거둘 정도로 중요한 말인가?”

“일단은요.”

“들어 보지.”

버니언이 별거 있겠냐는 양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여유를 드러냈다. 그에 이온은 다시금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흘렸다. 그 뒤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게, 저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크레이거 공작가의 후계자이다 보니 귀가 꽤 밝지 않겠습니까. 하여…… 콜록, 들리는 이야기가 꽤 여럿이 있는데요?”

아까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활용하여 말하는 이온을 보면서 버니언이 허리를 세우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안 좋은 감을 느끼긴 한 모양이었다.

“……뭐지?”

이온이 눈을 휘어 웃으며 그를 살살 찔렀다.

“최근 노아 기사단을 이용해서 뒷골목을 닥치는 대로 뒤지고 계신다고요. 듣자 하니 마나 증폭 약을 구하신다던데 사실이십니까?”

순간 버니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온이 이 방에 들어선 뒤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걸, 소공작이 어떻게 아나?”

말투 또한.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도, 귀가 밝다고.”

“…….”

버니언의 파란 눈이 이온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래, 지금 아주 수많은 생각이 들지?’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이온이 버니언의 가장 약한 부위를 자극했다.

“혹시 대공을 질투하십니까?”

“이온 크레이거.”

평소 건들거리던 버니언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이온은 기침을 흘리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그러면서 불편해진 목구멍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늘 그랬듯이 거짓으로 시작했지만 그의 병약한 연기는 조금씩 진심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더 처연해 보이기 위해 이온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차피 제 저주는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라서요……. 선택은 신중히 해야 하는 법인데, 두 분께서 제 저주를 푸는 데 관심을 보이시니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제 입장에서는.”

그때였다.

말하는 중간에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버니언이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다. 어차피 짜증 나는 화제이니 회피할 목적이 강해 보였다.

그가 문밖의 시종을 향해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를 던졌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더 얼굴 험악해질 이야기가 들려왔다.

“예, 폐하…… 그것이, 비렌시움 대공께서 조금 전부터 대기하고 계십니다.”

“뭐?”

버니언의 허락이 채 떨어지기 전이었다. 예의 대공이 직접 문을 열고 나타났다. 제 이복 형의 면상을 본 버니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온의 입장에선 더 능력 있는 사람한테 붙을 수밖에 없지.”

반대로 카밀루스는 상쾌한 웃음을 짓는 중이었다.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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