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의 입장에선 더 능력 있는 사람한테 붙을 수밖에 없지.”
반대로 카밀루스는 상쾌한 웃음을 짓는 중이었다.
“안 그런가?”
순간 버니언의 잔뜩 날 선 시선이 카밀루스의 뒤에 있는 시종에게 향했다. 대공의 등장을 막지 못한 시종은 사색이 된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카밀루스는 왜 애먼 데 눈총을 보내냐는 듯이 제 등 뒤의 문을 닫아 버렸다.
달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뒤 카밀루스는 방금 전의 미소를 지우고 천천히 응접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는 동안 이온과 짧게 눈이 마주쳤는데, 마치 ‘너 이따 보자’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에게 별로 잘못한 것은 없는데도 스쳐 가는 그 눈길에 이온은 왜인지 움찔하고 말았다.
하지만 둘 사이의 교감은 금세 끊겼다. 카밀루스가 응접실 안에 들어서고 나서부터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있던 버니언이 툭 씹어뱉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마침 응접실의 한가운데 선 카밀루스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군신의 예를 올렸다.
“태후 폐하를 알현하러 왔다가, 태양궁에 크레이거 공작 부자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초조하여져서 그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황제 폐하.”
“잘도 지껄이는군, 너.”
“그래도 이 사달이 일어난 건 전적으로 제 탓일 터인데 제가 해결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버니언이 무슨 속셈이냐는 의미를 담아 지그시 노려보자, 카밀루스는 도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제 앞에 서 있는 이온에게 잡으라는 양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주 버니언을 자극하는 말과 행동만 골라 한다.
이온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공작가에서 자신을 이용하라고 했던 카밀루스의 말도 있었고 하니 일단 그의 행동에 따라 주고자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버니언의 표정이 뒤틀리는 것을 보고 카밀루스는 여유 있는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폐하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소공작에게 사심이 있기에.”
그러면서 카밀루스는 여봐란듯이 이온을 도로 공작의 옆에 앉히더니 제 몸으로 막아 그들 부자를 버니언의 시야에서 가려 버렸다.
노골적으로 저를 배척하는 행동에 버니언은 실소를 흘리며 물었다.
“대공이 소공작에게 사심이 있는 것과 짐이 무슨 상관인가?”
“지금까지 뭘 들으셨습니까? 폐하께서도 소공작에게 똑같이 사심이 있으시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반문한 카밀루스가 제 오른손을 감싸고 있던 새하얀 장갑을 빼내더니 버니언의 책상 위로 던졌다.
“자고로 미인을 얻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저의 대결 신청을 거절하실 겁니까?”
가벼운 천이라 내려앉는 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장갑이 던져짐과 동시에 흘러나온 말은 버니언의 심기를 건드리기엔 충분했다.
버니언은 금세라도 거칠어지려고 하는 숨소리를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화기를 채 가리지 못했다.
“……설마 격투라도 벌이자는 것은 아닐 테고.”
어차피 버니언은 힘으로는 카밀루스를 절대 뛰어넘지 못했다. 그걸 아니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제 귀에 벌써부터 그의 자존심에 금이 간 소리가 들려왔지만, 카밀루스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그저 형제끼리 할 만한 간단한 내기를 제안드릴까 합니다만.”
버니언이 제 앞에 던져진 카밀루스의 장갑을 들어 올렸다. 그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난 네놈 목숨을 원해. 지면 그걸 내게 내놔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물론, 공개적으로 처형을 하셔도 받아들이겠습니다. 핑계는, 제가 굳이 제시해 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만드실 수 있겠지요?”
“네 목을 공개적으로 자를 수 있다니 그거 대단히 흥미가 생기긴 하는군. 내기의 조건은 뭐지?”
버니언의 물음에 카밀루스가 책상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한 손으로 살짝 책상 위를 짚은 카밀루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최근 황실의 골칫덩이가 있지 않습니까? 라치크의 길드장, 그를 쫓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오호…….”
“그자를 찾아 먼저 이 황성 안에 끌고 오는 자가 승자인 것으로 하지요.”
버니언은 몹시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으로 웃음기를 비쳤다. 카밀루스는 승낙의 뜻으로 알고 몸을 세웠다. 그리고 이온을 돌아보았다.
그의 파란색 눈동자가 제게 향한 순간, 이온은 당황한 제 마음을 숨기려 애써야만 했다. 그가 장갑을 던질 때만 해도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다.
라치크의 길드장이라니…….
카밀루스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이온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추호도 모를 카밀루스가 이온을 마주 보며 질문했다.
“제가 받을 대가 중 하나는 당신께 청해도 되겠습니까, 소공작? 저는 소공작께서 무얼 내주시든 만족할 것 같습니다.”
‘……설마 뭔가 알고 말하는 거야?’
이온은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못했다. 비단 이 자리만이 아니라 그 어떤 곳에서도.
다만 수상해 보일 것이 뻔하니 대답을 무한정 미룰 수는 없었다. 이온은 제 동요를 숨기기 위해 피곤한 척 살짝 눈을 내리깔며 대꾸했다.
“대공께서 이기시면 다음 연회의 첫 춤을 대공과 출까요?”
“좋습니다.”
카밀루스가 만족한 듯 활짝 웃었다. 그런 뒤 자연스럽게 다시금 버니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저에게 영식의 저주에 대한 단서를 풀어 주십시오. 하지만 폐하께서 이기시면…….”
“방금 말한 대로 네 목은 내가 가지고, 네가 눈감으면 결국 이온 크레이거는 내 황후가 될 거야.”
황후라는 말에 카밀루스가 순간 미간을 좁혔다. 버니언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미인을 얻는 내기라며?”
한쪽은 목숨을 내놓겠다 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일방적으로 제 욕망을 채우겠다 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불공평한 내기가 또 있나 싶었던 이온이 끼어들어 은근히 비꼬는 말을 했다.
“제국 최초의 남황후가 되다니 대단히 영광스럽겠습니다, 폐하.”
그러자 버니언이 푹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온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걱정 마라, 너…….”
거리가 가까워지자 앉아 있는 이온의 손을 잡을 요량이었는지 그가 허리를 살짝 굽히며 손을 뻗은 찰나였다.
둘 사이에 난입한 카밀루스가 버니언의 손끝이 이온에게 닿기 전에 그 손목을 가로챘다. 그 때문에 버니언의 몸이 도로 세워지면서 카밀루스에게로 돌아갔다.
“여기서 내기 대상에 손을 대는 건 반칙 아닌가 싶은데.”
“…….”
버니언의 눈에 살기가 올라왔다. 하지만 제 앞의 이복 형제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심경이 고스란히 비치는 그 눈빛을 보면서도 카밀루스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 내기는 폐하를 위한 판 아닙니까? 제가 지면 목도 내놔야 하고, 정인도 빼앗겨야 하는데.”
팍!
“감히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천한 사생아 주제에.”
손목을 뿌리친 버니언이 그리 말하자 카밀루스는 제 입에 순순히 사과의 말을 올렸다. 비록 말투가 한없이 가볍기는 했어도.
“송구합니다.”
계속 거슬리게 구는 카밀루스를 무시하고 버니언은 이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쉽네, 무슨 저주인지 알면서 주해 방법을 찾는 것도 더 쉬워질 텐데 미뤄지게 생겼으니…….”
마치 이온이 빨리 알려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길 바라는 투였다. 하지만 이온은 그의 호의라면 굳이 빌면서까지 받고 싶지는 않았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8년 동안 저주에 시달렸는데 조금 더 버티는 게 무슨 대수라고요.”
“걱정 마라. 그깟 길드장 따위 금세 찾을 테니까. 이미 진전이 꽤 있던 차라.”
그거 더 주의해야겠네.
저더러 안심하라며 버니언이 흘린 말을 듣고 이온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새끼한테 잘못 걸리면 제 인생이 진짜 좆 되는 거였다.
물론 버니언이 저를 못 찾게 잘 숨길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내기니 뭐니 할 때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둘 중 누구도 못 찾을 테니.
“그보다 절 황후로 세우시려면 많이 골치 아프시겠습니다……. 후계도 못 보는데 어쩌시려고요.”
“내가 그깟것 하나 해결 못 할까?”
“…….”
너무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진짜 뭐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이온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버니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걱정 하지 말고 몸만 오면 돼. 그동안 더 아프지도 말고.”
이쯤 되니 슬슬 머리가 아파지려 했다. 더는 이 자리에 있어 봤자 의미도 없는 입씨름을 하느라 공력을 소모할 게 뻔했다.
어차피 카밀루스가 판을 뒤엎어 주었으므로 이온은 더 고민하지 않고 자리를 뜨기로 했다.
“그럼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제가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고 있어서요…….”
“그래, 그렇게 해.”
허락의 말이 나오나자마자 이온은 공작과 함께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근데 틀림없이 금세 따라 나올 줄 알았던 카밀루스는 의외로 그러지 않았다.
이온은 복도로 나와 도로 닫힌 응접실의 문을 보다가 뒤돌아섰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테니까.’
캐물을 말이 많았지만 그때 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