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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84)화 (8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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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이 나가 버린 뒤 버니언은 보이지도 않는 그의 뒷모습을 쫓듯이 한참을 문쪽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응접실 소파 한자리를 차지한 카밀루스를 보면서 얼굴을 구겼다.

“넌 왜 안 꺼지지?”

“걱정 마. 재니스와 용건이 남은 것뿐이니까.”

카밀루스는 너 따위엔 관심 없다는 양 그리 받아쳤다. 버니언은 어이없었지만, 이 순간은 좀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아, 그래. 곧 목이 잘릴 테니 그러라고.”

“고마워. 동생의 배려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가벼운 대꾸가 지나가자 그들의 유치한 대화를 들으며 재미있어하던 재니스가 제 옆에 나란히 앉은 카밀루스의 몸을 훑으며 한마디 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많이 크셨습니다, 대공.”

카밀루스는 재니스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 한쪽 다리를 꼬아 앉았다.

“해후의 인사를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냉정하게 말을 잘랐지만 재니스는 제 고운 손을 가슴 위에 얹으며 썩 친절한 어투로 물었다.

“저에게 용건이라니, 혹시 마탑의 지배자라도 되고 싶으십니까?”

“관심 없는 사안이다.”

“그럼 저에게 복수라도……? 팔 하나라도 내드릴까요?”

“그런 가치 없는 것을 바랄 리가 있나?”

“그럼?”

건조한 어투로 몇 마디 나누던 카밀루스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얼떨결에 두 손으로 그것을 받은 재니스가 제 손바닥 안의 작은 약병을 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보글대는 분홍색 약물을 들여다보던 그는 카밀루스의 눈치를 보다가, 어느 틈에 제 옆에 도로 앉은 조수를 불렀다.

“좀 무서운데…… 마르?”

마리엘이 케이프 아래의 고개를 살짝 돌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카밀루스는 재니스와 옆의 조수를 곁눈으로 살며시 살폈다.

재니스에게서 약병을 건네받는 손이 검었다. 단순히 햇볕에 탄 정도가 아니라, 짙은 회색 빛이었다. 사람 손이 아닌 것처럼도 보였다.

마탑주 재니스만큼의 강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무척 기이한 기운을 가진 이였다.

“……마기에 잠식된 적이 있는 모양이군.”

그것을 보면서 카밀루스가 작게 중얼거리자 마리엘이 재니스 너머에서 그를 살짝 건너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공.”

그러고 약물이 든 병의 뚜껑을 열었다. 분홍색 약물이 손바닥에 떨어졌고, 얼마 전 카밀루스가 그랬듯이 마리엘도 약물이 보글거리면서 기포가 터지는 것을 들여다보다가 손끝으로 살며시 비볐다.

꽃 모양으로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보면서 재니스가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마기가 담긴 약이네요. 이런 것을 대공이 어찌 가지고 계시는지?”

카밀루스는 그제야 재니스와 눈을 맞추었다. 생긋생긋 웃고 있는 재니스의 속내가 뭔지 가늠해 보며 그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과시하며 떠보았다.

“영식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 약에 대해서는 못 알아보나? 마탑에서 나온 물건인데도?”

마탑의 물건이라는 소리에 조금 관심이 일긴 했는지 재니스가 마리엘에게서 도로 병을 받아 제 손 위에 몇 방을 따른 뒤, 손으로 그것을 뭉갰다. 그러고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이런 허접한 것을 만들리가요.”

“허접하다?”

재니스는 그만 병의 뚜껑을 다시 꽉 껴 넣고는 제 앞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 물건이 마탑에서 나온 게 사실이라면 제가 돌아가서 만든 이를 색출해 혼은 내겠습니다. 마기를 활용해 이런 물건을 만든 건 마탑 내의 규칙을 어긴 일이니까요.”

“…….”

카밀루스가 그게 끝이냐고 묻는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자 재니스가 눈썹을 들썩였다.

“이외에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 모양이십니다?”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자 재니스가 이것저것 떠올려 보는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눈에 보이는 연기를 하던 그가 이내 알았다는 듯이 핑거 스냅을 딱, 쳤다.

“예를 들어, 이 약이 영식의 저주를 악화한다든가?”

그 이야기가 흘러나오자마자 카밀루스의 파란 눈동자가 짙어졌다. 입술 사이에서는 꽤 살벌한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유의해서 답하는 게 좋을 거다. 이제 내겐 족쇄가 없으니.”

그에 재니스가 멀리서 봐도 선명히 구분될 만큼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깔깔거리기까지 하는 그였지만, 카밀루스를 향한 눈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카밀루스가 입을 일자로 다문 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으니, 곧 그 입에서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정말 많이, 컸구나?”

그 순간 응접실 안에 콰앙, 하고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사이 몸이 밀쳐진 재니스의 몸이 탁자 위로 넘어졌다.

카밀루스가 제 손등으로 그의 뺨을 친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재니스가 바닥에 쓰러진 채 제 얼굴을 감싸고 올려다보았다.

가라뜬 카밀루스의 눈은 서늘한 온도를 품고 있었다.

“폐하께서 네 뒤를 봐주고 있으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지? 감히 내게 공대를 하지 않아?”

묻고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양 카밀루스가 버니언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켜보고 있던 버니언은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네가 무례했다, 재니스.”

재니스는 즉시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었다.

“송구합니다, 대공. 제 잘못이 큽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재니스는 뒤의 한마디를 참지 못했다.

“그냥 옛 추억이…… 문득 떠오르지 뭡니까?”

“…….”

카밀루스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옛 추억.

황성의 이름 없는 탑에 갇혀 살던 그 시절을 들먹이는 것이 분명했다. 제 앞에서 그런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다니, 손이 움찔거렸다.

순간적으로 그를 죽여 버리고 싶어진 카밀루스가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재니스는 숨까지 크게 들이켜며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용서하세요, 제가 주제를 몰랐습니다.”

가식이 가득한 그 행위에 오히려 울컥 살해 충동이 올라올 뻔했지만, 카밀루스는 주먹을 쥐며 간신히 참아 냈다.

지금은, 아니었다.

이자에게 더 캐낼 것이 있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느끼며 카밀루스는 방의 주인인 버니언에게 인사도 없이 응접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셌다. 버니언은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유쾌하게 웃었다.

“잘했다, 재니스.”

그러자 재니스가 사르르 눈웃음을 짓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도로 의자에 앉았다.

“제 뺨 하나를 내주고 폐하의 즐거움을 얻었으니 이득이네요?”

그때, 마리엘이 탁자 위에 있는 약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것을 들어 올렸다.

“대공께 전달드리고 오겠습니다.”

재니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엘이 조심스럽게 문을 여닫고 회랑을 걸었다. 걸음을 따라가기 벅차 하는 시종을 뒤에 끌고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그를 마리엘이 거의 뛰듯이 걸어 쫓아갔다.

“대공 전하?”

거리가 꽤 가까워졌을 때 카밀루스를 부르자 그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마리엘은 카밀루스의 옆으로 가 분홍색 물약이 든 병을 내밀었다.

“…….”

카밀루스가 병을 받지 않고 마리엘의 내밀어진 손을 힐끗했다. 마기에 잠식되어, 마치 마물의 그것이라도 되는 양 검어진 손을 보고 있으니 마리엘이 조용히 물었다.

“혹시 일부러 두고 가신 건가요?”

카밀루스는 몸을 조금 틀어 마리엘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케이프의 모자를 푹 눌러쓴 마리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비치는 목 부근도 살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저에게?”

“듣자 하니 아까 전 소공작의 손을 잡으려고 했던 거 같은데…… 그의 저주에 대해서 어떻게, 뭘 알고 있지?”

“아아…… 그게 궁금하셨군요.”

약간 풀어진 어투가 된 마리엘이 케이프의 그림자 아래에서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그러더니 모자를 벗어 냈다.

케이프에 가려졌던 얼굴은, 마기에 잠식되지만 않았다면 꽤나 미인으로 일컬어졌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의 것이었다.

절반 이상이 거멓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카밀루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을 때였다. 마리엘이 간단한 설명을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제 몸 중 반은 마기가 흐르고 있고, 또 반은 마나가 흐르고 있지요.”

“눈이 기묘하군.”

마리엘의 홍채는 물감을 흩어 놓은 듯이 일부는 검었고, 일부는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그곳을 손을 가리키며 마리엘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여기가 마기와 마나가 싸우고 있는 곳입니다. 가끔은 검어지고, 또 가끔은 보라색이 되었다가 이상하게 파란색으로 보일 때도 있고…….”

설명이 길어질 것 같자 카밀루스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해서, 그대의 몸에 마기가 흐르는 것과 내가 묻는 말이 무슨 상관인지 말해라.”

마리엘은 제가 너무 수다스러웠음을 인정하는 뜻으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마음이 급한 카밀루스에게 순순히 대답을 내놓았다.

“소공작의 몸엔 마기가 있습니다. 여기에요.”

말하면서 마리엘은 손가락으로 제 배꼽 부근을 가리켰다. 카밀루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온의 몸에 마기가 있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라 당혹감부터 올라왔다.

“나는…… 느끼지 못했다.”

“대공께서 일상적으로 내뿜는 마나가 남들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난 양이시지 않습니까. 공자의 몸에 있는 마기는 아주아주 미세한 양이기도 하니, 아마 대공께서 그분을 만지셨을 때 그 마기는 힘을 못 썼을 겁니다.”

“…….”

“너무 강대한 힘은 때론 그런 부작용이 있지요, 대공.”

마치 조언이라도 하는 양 조곤조곤한 말투였다. 그러고 다시 약병을 내밀자 잠시 멍하니 있던 카밀루스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마리엘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카밀루스는 건네받은 약병을 내려다보다가 손에 힘을 넣었다.

‘강대한 마나 때문이라고……?’

방금 전 그 이유가 사실이라면, 그 저주를 읽으려고 해도 쉽지 않았던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되었다.

카밀루스는 그제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에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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