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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86)화 (86/317)

카밀루스는 꽤 긴 시간 집중하며 제게 흘러들어 오는 미세한 기운들을 읽어 냈다. 그러다 드디어 마리엘이 말했던 대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기에 눈을 찌푸렸다. 

이거였다.

제가 이전엔 미처 읽어 내지 못했던 바로 그것…….

비로소 저주의 선명한 실체에 다가선 카밀루스는 이를 악물었다.

잠시 뒤 손을 떨어뜨린 그에게 이온이 눈치껏 천을 내밀자 카밀루스가 그것을 받아 손목을 감싸고 꽉 눌렀다.

긴장에 숨조차 멈추고 있던 이온은 그제야 넌지시 물었다.

“왜 그래, 카밀루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이 방 안에 있는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을 터였다. 카밀루스는 그들의 시선을 등 뒤로 느꼈지만 선뜻 어떤 말도 내놓지 못했다.

틀림없이 갑작스러운 이야기가 될 텐데, 이 자리에서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카밀루스는 침묵을 택했다.

“나도 잠깐만,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 뒤에 말해 줘도 될까?”

“……알아낸 게 있어?”

“아마도.”

네가 상상도 못 할 얘기야, 이온.

자신조차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이온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카밀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머리를 핑 돌게 하는 현기증에 조금 비틀거렸을지도 모른다. 곧바로 달려온 페드로가 손목을 쥐며 그의 몸을 지탱했다.

페드로는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일단 카밀루스의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은 조용히 부축만 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 카밀루스를 소파에 앉힌 페드로는 스스로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 손과 어깨를 바들바들 떠는 상대를 내려다보며 화난 목소리로 불렀다.

“전하.”

카밀루스는 피곤하다는 양 소파에 몸을 기대며 짧게 대꾸했다.

“왜.”

건성인 그의 태도에 페드로가 울컥해 소리쳤다.

“지금 따귀라도 때리고 싶은 거 아십니까? 대체 왜 이러신 겁니까!”

그러자 카밀루스는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 와중에도 장난치듯이 받아쳤다.

“내가 너그러워서 망정이지, 다른 귀족들한테 그렇게 말하면 잡혀갈 수도 있는 거는 알아?”

“대공.”

“안 죽어, 이 정도론. 회복 마법도 썼어.”

“…….”

한없이 가벼운 태도에 페드로가 카밀루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카밀루스의 옆자리에 걸터앉아 그를 마주했다.

회복 마법을 쓴 게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처럼 그가 손목을 감싼 카밀루스의 손을 떼어 내며 감싸인 천을 들어 올렸다.

충격은 가시지 않은 듯 아직 손을 떨었지만, 상처는 사라졌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페드로에게 카밀루스가 문득 물었다.

“페드로, 나 왜 이렇게 애 취급해?”

그러자 페드로가 대뜸 물었다.

“반말해도 되냐?”

“이미 멋대로 내뱉고 허락받네.”

카밀루스가 픽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페드로가 더는 대꾸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자 둘 사이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카밀루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왠지 평소 그들 사이에 없는 어색함이 느껴져 눈을 내리까는데, 페드로가 두 팔로 그를 안아 왔다.

카밀루스가 움찔하는 사이 페드로가 그의 어깨를 꼭 쥐며 속삭였다.

“카밀루스, 넌 내 아들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 말을 듣고 카밀루스는 괜히 미안해지기도 해서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알아.”

“다시는 이렇게 무모한 짓 하지 마라. 자식새끼 다치는데 마음 안 아플 부모는 없으니까.”

페드로가 저를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는 건 카밀루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것 아닌 말 같은데도 코끝이 찡해졌다.

아버지도 주지 않은 사랑을 왜 당신이 주지?

왜 이 사람은 이렇게 따뜻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눈가가 시큰해져 오려고 했다. 그에 카밀루스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제 손끝이 떨리는 것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었어. 이온의 저주를 알아보려면 정상적인 상태로는 안 될 것 같았으니까.”

그러자 페드로가 그만 몸을 떨어뜨리며 꾸짖는 말을 했다.

“대공의 머릿속엔 소공작밖에 없습니까?”

“……혼 그만 내. 죽은 거 아니잖아.”

목소리가 작아졌으면서도 끝내 잘못했다거나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다는 말은 절대 안 하는 카밀루스를 페드로가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카밀루스는 하는 수 없이 변명을 길게 주워섬겼다.

“이온의 몸에 마기가 있다길래 그걸 확인하려고 한 거야. 내 마나가 그걸 알아보는 데 걸림돌이 돼서 피를 뺀 것뿐이고. 마나는 몸 안에선 피와 결합해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무모하게…….”

페드로가 말하는 중간이었지만 카밀루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아니면 내 몸에서 마나를 뺄 방법이 없었어. 난 마법 조금 쓴다고 티가 날 정도도 아니라서.”

“그래서, 손목을 그을 정도로 가치 있는 결론이 나기는 했겠지요? 해주 방법을 찾으신 겁니까?”

카밀루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는 또 한 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 저주는 단순한 방법으론 못 끊어. 시전자를 죽여야 돼. 물론 반드시 찾아서 죽일 거고.”

“대체 어떤 저주길래 해주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겁니까?”

방금 전 이온의 앞에서는 차마 밝히지 못하고 나온 진실을 입에 올리려니 카밀루스는 입 안이 몹시 꺼끌꺼끌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불편함을 드러내듯 페드로와 마주했던 몸을 돌려 정면 쪽을 향했다. 그래도 페드로가 이런 말을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굳이 회피하거나 돌려서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온의 배 안에 둥그렇게, 마기가 주머니처럼 들어 있고, 그 안에 몸의 모든 마나가 몰려 있어. 그래서 신체 중 다른 곳에선 마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거야.”

아무리 마법을 못 쓴다고 해도 페드로도 사람의 몸에 마나가 피와 같이 흐르고, 그 흐름이 막히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긴다는 상식 정도는 머릿속이 집어넣은 상태였다. 그리고 마기라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도 잘 알았다.

카밀루스의 말을 들으면 소공작의 상태가 저 지경인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바이긴 했지만…….

페드로가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저주는 뭐 하는 저주인 겁니까……?”

카밀루스도 아직 그것은 알지 못했다. 이온에게 걸린 저주가 무슨 목적인지까지는. 다만 그것의 ‘효과’만 알게 됐을 뿐이었다.

제가 내린 결론은 다소 뜬금없는 것이 분명했고, 페드로도 들으면 당황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앞서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카밀루스가 말머리를 조금 돌렸다.

“마기가 정확히 뭔지는 아나?”

“글쎄요, 몬스터들이 그걸로 마법을 펑펑 쓰는 건 압니다만.”

“말한 대로 몬스터에게 있어서는 사람의 마나와 같은 건데, 이게 사람의 몸에 들어오면…… 신체 변형 같은 걸 일으켜. 그래서 마기에 잠식되면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게 되고 심지어는 괴물처럼 바뀔 때도 있는 거야. 실제로 오크나 리치는 사람이 변형되어서 굳어진 것이고.”

“그럼 소공작의 몸에 있는 마기도 어떤 변형을 일으킨 겁니까?”

카밀루스는 이번에 나온 질문에는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페드로가 채근하듯이 그를 불렀다.

“대공?”

“물론, 일으켰어.”

카밀루스는 마른세수를 하고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꽉 눌렀다. 그의 입에서 분노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버니언 그 새끼가 이걸 알고 이온한테 수작 부린 거라고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

“역겨운 새끼.”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감히 이온을 대상으로 그런 미친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은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불안해 손도 제대로 못 대는데, 제깟 놈이 뭔데 나의 이온한테…….

욕설을 내뱉으면서 주먹을 지그시 쥐는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페드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있습니까?”

“시전자가 저주를 왜 이따위로 설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길래?

솔직히 말하면 사람 형상은 멀쩡히 유지하고 있으니 그렇게 썩 대단한 일은 아닐 수도 있으리라고, 가볍게 생각하기도 했던 페드로였다. 카밀루스의 눈에는 이온을 향한 콩깍지가 씐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다음 말을 듣고는 그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온은 지금 아이를 낳을 수 있어.”

“……예? 그게 무슨.”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에 짙은 침묵이 감돌았다.

페드로는 문득 일전의 자신의 모습을 반성했다.

손자 농사가 망했다며 충격에 빠졌었지만, 이런 식의 해답을 바랐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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