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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자신의 방문 앞에 기대서 있던 이온이 카밀루스의 부관인 페드로가 나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몸을 세웠다.
문을 닫기 전 페드로가 그를 확인하고 무어라 하려고 하자 이온이 얼른 검지를 세워 입술에 붙였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에 그가 평연히 문을 닫고는 이온 쪽으로 발소리를 죽여 걸어왔다.
둘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이온이 넌지시 물었다.
“대공께서는 어떤가요? 아까 비틀거시리던데…….”
페드로는 왜인지 아까보다 안색이 더 창백해져 있는 이온을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멀쩡하십니다. 워낙 건강하신지라.”
“피는…… 멎었고요?”
“예.”
그렇지만 페드로의 말에도 이온은 걱정하는 기색을 거두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의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카밀루스가 밖으로 나간 뒤에 피가 튄 이불을 하인들이 거두어 가는 것을 보며 그는 한동안 숨도 쉬기 힘들었다. 비유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발작 직전까지 갔던 터였다.
“대체 왜 그러신 건가요?”
“그건…….”
페드로가 말을 채 시작하기 전이었다. 그가 방금 열고 나왔던 복도 끝 방의 문이 다시금 열렸다.
이온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는 숨기에 이미 늦은 뒤였다. 방 안에서 나온 카밀루스가 이온과 눈을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내 부관이랑 거기서 뭐 해?”
묻는 소리에 이온이 당황해 도로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카밀루스가 한달음에 달려와 문을 열려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문을 열다가 덜컥 멈춰 버린 이온은 카밀루스가 등 뒤에 붙는 것을 느끼면서 어깨를 바짝 긴장시켰다.
카밀루스가 그런 이온의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며 페드로에게 명령했다.
“페드로, 자리 좀 비켜.”
“예, 그럼.”
페드로가 적당히 빠지는 기척이 나는 순간이었다. 카밀루스가 이온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는 속삭여 왔다.
“왠지 네가 밖에 나와 있을 것 같더라. 쉬려고 했는데 아까 표정이 내내 밟혀서 나도 못 견디겠고.”
“…….”
“내 걱정 많이 했어?”
이온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걱정 많이 했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싶었다. 누구라도 그 상황을 겪으면 당연히 그럴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온은 카밀루스에게 화가 나서, 그가 기뻐할 만한 이야기는 절대 해 주고 싶지 않았다.
“안 했어.”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쌀쌀맞은 척해도 안 통하는 거 알지? 진짜로 얼굴에 다 티 나. 너 내 앞에선 무장 해제 되거든, 그거 엄청 귀여워.”
이온의 말에도 전혀 타격을 안 받는 그의 태도에 이온은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받치는 느낌이었다. 이 녀석은 어째서 스스로의 문제를 이리 가볍게 생각할까?
“장난칠 때야?”
“내가 아플까 봐 무서웠구나, 그렇지?”
“너……!”
짜증이 확 올라온 이온이 참지 못하고 뒤돌아서며 그를 밀쳐 내려 했다. 하지만 돌아본 순간 확 당기는 힘에 오히려 끌려가 버렸다.
허리가 안겨 몸이 바짝 붙고, 턱을 붙잡는 손에 고개가 들렸다. 채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입술이 맞붙어 왔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이온은 눈을 크게 떴다. 가지런히 감긴 눈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다.
머리가 굳어서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신을 차리기 전에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카밀루스가 얼어 있는 이온의 뺨을 쓰다듬으며 작게 눈웃음을 그렸다.
“왜 이렇게 예쁠까, 이온.”
이온은 그에 미간을 조금 좁혔다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방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와.”
침실을 통해 안쪽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고 붉게 노을빛이 비치는 창문의 커튼을 거두어 내고 있는데, 따라온 카밀루스가 소파에 앉으며 앞의 탁자에서 배 깔고 자고 있는 욤뇽이를 발견하고는 실소를 흘렸다.
“고양이도 아닌데 빵 굽고 있네, 이 녀석.”
고양이가 식빵이라면 이 녀석은 소라빵 정도의 형태였다. 이온은 방이 곧 어둑해질 것 같아 촛대에 새 초를 올려 두며 물었다.
“요즘 몸이 좀 커진 것 같아. 네 영향 아니야?”
그런 뒤 이온은 손에 힘이 없는 탓인지 성냥을 몇 번이나 그어서 촛불을 켰다. 그와 대비되게 카밀루스는 살짝 손짓해 탁자 위의 초에 불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나이 먹어서 아닌가 싶은데.”
“욤뇽이 몇 살인데?”
“그건 나도 몰라. 이 녀석, 나이는 민감 정보인지 안 알려 주거든.”
대답을 들으며 뒤돌아선 이온이 탁자 위에 촛불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서 뭐냐는 눈빛을 보내니 카밀루스가 살짝 미소 지었다.
사람이 미워 보여서 그런지 별것 아닌 이런 일에도 못마땅해진 이온은 성냥불을 불어서 끈 뒤 굳은 표정으로 카밀루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온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욤뇽이를 제 허벅지 위에 올리고 쓰다듬어 주다가, 카밀루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까 그 손목 내놔 봐.”
카밀루스가 순순히 셔츠의 단추를 풀어 손목을 내밀어 보였다. 그 당당한 태도를 미심쩍어하면서 보니, 채 한 시간도 안 지난 상처가 깨끗이 사라진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온은 제 눈앞의 남자가, 보통의 마법사가 아니었음을 떠올렸다. 카밀루스에게 그런 물리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자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손목을 보고 허무해진 이온이 미간을 구기고 있으니, 카밀루스가 도로 셔츠의 단추를 갈무리했다.
“내 걱정 많이 했어? 상처 남았으면 혹시 붕대라도 감아 줄 생각이었나?”
“…….”
이온이 말없이 그를 노려보며 욤뇽이를 옆자리에 내려놨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기색에, 카밀루스는 행여나 그가 책상 뒤로 도망치면 자신도 쫓아가야겠다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상처 남겨 둘 걸 그랬…….”
짜악!
한데 문장이 채 끝나기 전에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을 가로질렀다. 예상치 못하게 제 얼굴에 충격이 들어오자 카밀루스가 놀리던 입을 멈췄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온이 카밀루스의 뺨을 친 것이었다. 카밀루스는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차가워진 것을 멍하니 보다가,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발견하고는 표정에서 장난기를 거두어 냈다.
소리만 컸지, 하나도 아프지 않았으니 뺨 맞은 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소파에서 빠져나간 이온이 뒤돌아서서 등을 보였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호했다.
“용건 끝났으니까 나가.”
카밀루스는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이온의 뒤로 걸어갔다. 그가 아직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손을 잡아 주면서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해, 이온. 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어. 그래서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거 같다.”
하지만 이온은 그의 손을 냉정히 털어 냈다.
“꺼져. 지금은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카밀루스는 고개를 기울여 이온의 옆모습을 확인했다. 이온의 말 한마디에 속이 타들어 갔다. 말은 이렇게 해도 실은 마음이 약한 걸 알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이온의 눈가에 비치는 물기가 짙어지는 것을 본 그가 말소리에 한숨을 섞었다.
“……네가 울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가?”
물음이 끝난 순간 이온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에 카밀루스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피를 그렇게 봤으니 당연히 많이 놀랐을 텐데, 너무 바보 같았다. 달랠 생각부터 해야 했다.
안절부절못하던 카밀루스는 작게 숨을 들이켜고 있는 이온의 앞으로 가 그를 품에 안았다.
“잘못했어.”
“네 잘못이 뭔지는 알아?”
카밀루스는 이온을 도로 품에서 떨어뜨렸다. 그러고 눈을 마주치는데, 눈가가 살며시 젖은 것을 보였다. 애가 탔다.
하지만 선택을 후회하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저주의 실체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게 되었으니까.
절대로 후회는 없었다.
“……너 때문에 날 다치게 한 거. 근데 앞으로 또 안 그러겠다는 말은 못 해. 그래야 하는 상황이 오면 또 그럴 거거든.”
“카밀루스.”
“내 몸이라도 바쳐서 널 낫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거야.”
이온은 주먹을 꽉 쥐더니 카밀루스의 가슴에 갖다 박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항상……!”
그래 봤자 종이 주먹이라 하나도 안 아팠지만, 안 쫓겨나려면 그의 앞에서 바짝 기어야 할 때였다.
“내가 잘못한 게 또 있어? 일단 무릎이라도 꿇고 들을까?”
“…….”
카밀루스는 아직 화가 덜 풀린 이온의 눈치를 보다가 한 걸음 물러나더니 진짜로 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머뭇머뭇 이온을 올려다보는데, 이건 뭐 사랑싸움이라기보다는 엄마한테 혼나는 아들이 된 느낌이라 찝찝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죄가 또 뭐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