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팽팽 돌리고 있는데, 카밀루스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온이 고개를 드니 카밀루스가 너무 활짝 웃지 않기 위해 입술 끝을 떠는 게 보였다.
“성인이니까 그 정도 상상은 이해할 수 있기는 한데.”
“……웃지 마, 말하지 마.”
웃지 말라고 하니 카밀루스는 진짜 곧바로 입을 일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닫힌 입 대신 눈으로 말소리를 흘렸다.
언제부터 그런 상상을 했어? 혹시 꿈도 꿨나?
그런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해 이온이 다시 시선을 돌리려 하는데 밑에서 욤뇽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온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어쩐지 평소보다 반짝이는 것 같은 녀석의 보석안을 보면서 이온은 좌절했다.
얘도 말 알아들었었지…….
그때, 카밀루스가 성큼 걸어와 책상 위에 걸터앉더니 짓궂은 한마디를 던졌다.
“대상이 나인 건 맞지?”
“카밀루스!”
이온이 눈을 치켜올리자 카밀루스가 능청스럽게 놀란 척을 했다.
“설마 아니야?”
“…….”
“그럴 리 없는데. 우리 이온이 나름 건전해서 양다리는 못 걸칠 텐데.”
“그만 놀려.”
불편함을 못 견디고 이온이 소파 쪽으로 피신했다. 다행히 카밀루스는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이온의 민망함이 조금 가셨을 때쯤 쫓아와 옆자리에 앉았다. 그에 이온이 앞쪽의 소파를 눈짓했다.
“맞은편에 앉아.”
“싫어. 가까이서 봐야 더 예쁘니까.”
제법 단호하게 거절한 카밀루스가 이온의 어깨를 감싸 왔다. 그가 제 몸보다 훨씬 작은 이온을 품에 푹 안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내려다보았다.
이온이 그의 어깨에 어색하게 기대고 있으니 아까보다 진지해진 카밀루스의 음성이 나직이 울렸다.
“걱정 마. 키스 이상으로는 생각도 안 해 봤어. 보고만 있어도 좋아, 나는.”
내가 몸이 약해서……?
이온은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힘을 주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괜스레 제 허벅지 위에 퍼진 욤뇽이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어떤 대답이 적절한 것인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데, 카밀루스가 커다란 손으로 이온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진짜 엄청 귀엽네, 이온 크레이거.”
그렇게 분위기를 대충 갈무리한 카밀루스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자, 이거.”
그의 손에는 두 개의 약병이 들려 있었다. 하나는 이온이 주었던 분홍색 물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보라색 물약이었다.
이온이 뭐냐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카밀루스가 이온의 허벅지에 엎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눈을 감고 코를 골기 직전인 녀석의 머리를 툭 쳤다.
“일어나, 게으름뱅이.”
“꾸?”
졸음기 때문에 무거운 눈꺼풀을 연신 껌뻑거리며 욤뇽이가 고개만 살짝 들었다. 그러다가 카밀루스가 눈앞에 내민 두 개의 약병을 발견하고는 자세히 살펴보려는 듯이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카밀루스는 녀석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이 두 가지 다 이온한테 치명적이야, 그렇지?”
“꾸…….”
욤뇽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온이 걸린 저주를 이걸로 일으킬 수도 있겠나? 그것까지 알 수 있어?”
하지만 다음 질문에 욤뇽이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모른다는 의미였다.
물으면서도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일말의 희망을 품었었는데.
실망한 기색을 비치는 카밀루스에게 이온이 보라색 물약을 눈짓하며 얼른 물었다.
“하나는 어디서 난 건데?”
“이건 선황의 유품이야.”
선황의 유품?
출처가 왜 그렇냐는 의미로 이온이 두 눈에 의문을 가득 담았다. 카밀루스는 이온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약병 두 개를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두 약물 모두 병 안에서 보글보글 끓는 중이었다. 다만 보라색 약물이 담긴 병 안에는 검은 연기가 갇혀 그 안을 연신 휘돌기까지 했다.
카밀루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 두 가지 약물엔 공통점이 있어. 물이 수용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의 많은 마나가 녹아 있다는 것, 그리고 마기가 마나에 융합돼 있다는 것.”
손가락이 가볍게 분홍색 약물 병과 보라색 약물 병을 순서대로 톡톡 쳤다.
“이 분홍색보다는 보라색 쪽에 훨씬 더 많은 마기가 들어 있고.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확실히 저주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양이야.”
“그래서 네 결론은 뭐야?”
이 지점에서 카밀루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제 짐작이 제발 틀렸으면 했지만 가능성이 꽤 높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의 파란색 눈동자가 이온에게 향했다. 곧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약물을, 그게 아니라면 이 비슷한 약물을 이온 네가 마시지 않았을까 하는 거.”
긴장한 이온은 두 손을 모아 그러쥐었다.
이온이 저주에 걸린 건 13살 때였다. 이런 정체도 모를 약물을 어린아이가 혼자서 구했을 리는 없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강제로 먹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저주를 건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그에 동조하는 사람…….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저주의 내용이었고, 그보다 더 난해한 점은 저주에 걸린 자신이 그대로 방치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저주를 건 사람은 단지 이 약을 먹이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쪽이 약해지기만 하면 되었던 걸까?
‘그럴 리가…….’
성인식도 못 치른 어린애한테 어떤 가치가 있다고.
언젠가 카밀루스가 했던 말마따나 이 몸이 저주에 걸린 시기는 아마도 카밀루스를 탑에서 꺼내기 전후. 공교로운 시기이다 보니 무작위로, 재수 없게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저주인지는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 외 대부분의 실체가 안갯속이다.
‘내가 놓치는 부분이 있는 걸까?’
모든 단서가 질서 없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 줄 요소가 부족했다. 바로 개연성.
“카밀루스, 넌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지금 네 몸에 뭉쳐 있는 마나는 사실 웬만한 사람이 몸 전체에 수용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섰어. 하지만 이전의 네 마법 능력이 그렇게 탁월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마나가 넘쳐도 운용을 못하면 소용없는 것 아니야?”
“반대로 운용 방법만 제대로 알면 그 능력이 무궁무진하게 발휘되지. 하지만 넌 아니었어. 운용도 잘하는 편이었고 덕분에 마법도 제대로 사용했는데 그렇게 수준이 높지는 않았어.”
제 얼마 없는 기억 속의 이온 크레이거는 확실히 그래 보이긴 했다. 겨우 빛 구슬 몇 개 밝혀 놓고서 그것도 집중 못 하면 꺼뜨릴 정도였다. 카밀루스가 마법 쓰는 걸 보면서 놀라기도 했고.
그렇지만 방금 전의 이야기로 진실의 실체에 다가가기엔 썩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진짜로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는 알아볼 방법이 없지 않아?”
내 기억이 없으니까.
카밀루스와 탑에 빠져나오는 과정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기억을 찾기 위한 마지막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누군가 마셔 보면 확실한 결론이 나겠지.”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온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그가 약병을 바라보고 있는 카밀루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누군가가 너는 아니지? 그런 생각 추호도 하지 마. 나랑 똑같은 상태가 되면 골치 아픈 환자만 늘어나는 셈이니까.”
게다가 카밀루스가 자신과 같은 저주에 걸린다니,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 정도는 카밀루스도 이해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대답이 없었다. 불안해진 이온이 그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재차 불렀다.
“카밀루스?”
“…….”
이 자식, 자기가 저주도 이겨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온은 그의 시선을 빼앗고 있는 두 개의 약물을 서둘러 가로챘다.
“이건 압수야.”
“이온.”
“나보단 네가 더 무모하니까. 인정하지?”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진짜로 마실 생각도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이 미친 녀석…….
그렇게 속으로 이를 갈고 있는데 눈앞에 창이 떴다.
[‘초월의 물약’을 획득하였습니다.]
[활성화된 퀘스트의 진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초월의 물약?’
퀘스트 진행에 영향을 미치면 계속 가지고 다녀야 하는 건가?
그보다 이런 이름의 물약이라면 임신이랑은 관련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역시 헛다리 짚은 거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카밀루스가 괜한 생각 안 하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이온은 책상으로 걸어가 열쇠를 돌려 제 서랍을 열었다.
그동안 모아 두었던 약물이 가득한 그곳에 두 개를 넣어 둔 뒤 도로 서랍을 닫으며 카밀루스에게 경고했다.
“혹시 또 욤뇽이한테 빼 오라고 하지 말고.”
“……응?”
뜨끔했는지 카밀루스가 반 박자 늦게 반응해 왔다. 그것을 본 이온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 녀석이 너한테 분홍색 약물 보여 줬었잖아. 아니야?”
어느새 등받이에 올라와 카밀루스 옆에서 자신 쪽을 보고 있는 욤뇽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녀석을 잠깐 돌아보았다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어?”
“우리 아가는 몰래 뭘 하기에는 여러모로 허술하시거든. 그렇지? 열쇠도 제자리에 안 둘 정도니까.”
이온이 열쇠고리를 손가락에 끼우고 돌리자 욤뇽이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꾸우?”
“…….”
카밀루스가 욤뇽이를 지그시 노려보니 녀석이 작은 날개를 파르르 떨다가 등받이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 카밀루스의 눈총을 피해 곧바로 이온에게 뛰어가 안기는 것이었다.
“뀨뀨! 뀨!”
살결이 부드러운 볼을 제 얼굴에 비비며 애교를 부리는 욤뇽이의 모습에 이온이 활짝 웃으며 속삭였다.
“응, 응. 귀여우니까 봐주는 거야. 그리고 착하게 되돌려 놨으니까.”
아기 드래곤 녀석의 잔망스러움을 지켜보던 카밀루스가 이온의 말을 듣고 우는소리를 했다.
“되돌려 놓으라고 한 건 난데. 그럼 그런 칭찬은 나한테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욤뇽이한테도 질투해?”
“……걔한테 뽀뽀 주지 마.”
이온은 카밀루스를 한 번 새침하게 흘겨보더니 보란 듯이 욤뇽이의 몸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려 뽀뽀를 해 댔다.
“예쁘다, 우리 아가.”
“뀨!”
그 광경을 지켜보는 카밀루스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저 자식, 괜히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