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각형으로 깎은 작은 병 안에서 검은 연기가 울렁거렸다. 뚜껑을 열면 바로 마기가 빠져나오니 절대 열지 말라는 경고를 떠올리며 이온은 끈으로 한 번 더 감아 뚜껑을 고정했다.
새벽으로 향해 가는 밤늦은 시각이라 약간 몽롱해진 이온이 그것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선황의 유품이라고…….”
설령 이것이 자신이 걸린 저주를 일으키는 물건이 맞는다 해도, 황제가 이온에게 저주를 건 □□일 리는 없었다. 이미 죽어 관에 들어갔으니까.
역시 □□는 마탑주인가 싶었지만 마탑에서는 마기를 다루는 것을 금기시했다.
생각을 이어 가려고 하면 계속 툭툭 막히는 탓에 이온이 골머리를 앓는 사이 에렌스트 경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공작.”
의자에 푹 기대어 앉아 있던 이온은 약병을 제 품 안에 넣으며 대꾸했다.
“찾았어?”
“네, 여기라고 합니다.”
에렌스트 경이 책상 위에 쪽지를 내려놨다. 그곳엔 황도의 뒷골목에 있는 한 도박장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온은 제 사망 확률을 확인했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14%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온이 몸을 일으키며 옷걸이에 걸려 있던 망토를 뒤집어썼다. 그사이 다리 쪽으로 올라와 몰래 옷 안에 숨어든 욤뇽이랑 눈이 마주치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곧 그가 책상 앞에 서 있는 에렌스트 경을 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가자.”
“그런데 도련님.”
부르는 소리에 이온이 멈칫했다. 에렌스트 경이 어째선지 찝찝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걸리는 거라도 있어?”
“그게, 저, 대공이 방에 없습니다.”
이런 야밤에 자리를 비웠다고?
웬만한 사람들은 전부 잠들었을 시각이었다. 물론 카밀루스가 어딜 갈 때마다 이온에게 꼭 보고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집에서 벗어나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의심을 살 수 있는 시간이다 보니 이온도 잠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카밀루스를 두둔하는 의미에 가까웠다.
“문제 될 건 없지 싶은데?”
에렌스트 경은 이온의 말에 담긴 주저함을 읽고 굳이 한마디 덧붙였다.
“대공의 움직임이 심상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낮에는 태후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엮이지 말았으면 하더니, 에렌스트 경은 카밀루스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고를 듣고 나니 선황의 유품을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그 출처가 명확해졌다. 이온은 역시나 싶어 내심 안심했다. 다만 현 황제가 못마땅해하는 비렌시움 대공과 현 황제의 친모인 태후의 묘한 조합에 관심이 생겼다.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고?”
“네, 당시 주위를 전부 물렸다고 들었습니다.”
아쉽네.
카밀루스가 어디까지 내다보고 그녀를 만나러 갔는지는 모르지만, 그 만남은 굴릴라 치면 꽤 큰 눈덩이로 만들 수 있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눈덩이가 될 가능성만 내포하고 있을 따름이라, 벌써부터 호들갑을 떨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어차피 지금 대공은 너무 눈에 띄는 존재야. 황성에서 일을 벌이면 다 알게 돼 있어. 이야기가 들어오면 그때 어떻게 할지 판단하면 돼. 그렇지 않아?”
“도련님께서 그리 판단하신다면 이의는 없습니다.”
더는 이런저런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깔끔한 대답이었다. 마음에 든다는 의미로 이온이 웃어 보이고는 집무실 쪽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깊은 어둠에 빠진 크레이거가 저택의 복도는 고요했다. 이온은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의 끝으로 향했다.
그곳의 문을 열고 2층에서 정원으로 곧장 이어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간 이온과 에렌스트 경은 공작 저의 후원과 이어지는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발소리가 너무 짙게 나지 않도록 조심히 걸으며 이온은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이 길을 지날 때면 카밀루스가 빛으로 밝혀 주었던 예전의 일이 종종 생각났다. 단 한 번뿐인 기억인데, 이온은 그 추억이 마치 제가 가는 길을 응원해 주는 것 같다고 느끼곤 했다.
그래서…….
[추위로 인해 체온이 서서히 내려갑니다. 시간당 0.5%씩 플레이어의 사망 확률이 올라갑니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14.5%입니다.]
입 속에 들어차는 한기에 이온은 기침이 나올 듯해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서 이 길을 지나갈 때의 불안감이, 네가 남기고 간 작은 추억 하나로 말미암아 조금은 불식되었었노라고.
어둠이 아가리를 벌린 숲을 지나는 이온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그들의 뒤로 독수리가 높이 날아오르더니, 한 바퀴 회전한 후 어디론가 향했다.
* * *
뚜벅뚜벅 무거운 발소리가 깊은 적막을 품고 있는 건물 안에 울려 퍼졌다. 수백 년간 쌓아 온 온갖 장서들이 모인, 거대한 황실도서관을 가로지르며 카밀루스는 곳곳에서 향해 오는 눈길들을 느꼈다.
그렇지만 황실 기록을 모아 둔 구역으로 진입해 서가를 살피는 그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내황성에 들어온 이상 감시의 눈을 피할 길은 없었다. 곧 버니언에게 자신이 이곳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질 테고, 당연한 수순으로 버니언은 카밀루스를 자신 앞에 불러내려 할 것이다. 낮이라면 모를까, 일부러 깊은 밤에 찾아왔으니 녀석은 절대 참지 못할 터였다. 자신은 그 전에 최대한 많은 기록을 살펴야 하니, 기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24년 전…….’
카밀루스는 그때의 연도를 떠올리며 책등을 빠르게 훑었다.
친모인 로제니아 미아블레, 아니 결혼을 했으니 로제니아 클로델이 된 그녀는 카밀루스가 태어난 직후에 탑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죽은 당시에는 그 갑작스러운 부고의 이유를 알 길이 없었지만, 카밀루스가 탑에서 나와 그 존재가 알려진 이후로는 혼외자를 들인 충격 때문에 자살한 것이라는 추측이 거의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혼외자가 아니니 자살의 이유는 다른 것이다.
긴 손가락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기나긴 밤의 허리를 베어 낼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날카롭게 황궁의 정원을 지나는 저녁이었다.
클로델 왕조의 가장 너그러운 황제가 될 것이라 여겼던 오브라이언의 42대 빛. 본 서기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황제께서는 황후의 모든 것을 손수 챙겼다.
시종들의 손길을 마다하고 한설이 내리기 시작하는 정원을 가로질러, 낮에 심한 기침을 하다가 눈물까지 비쳤다는 황후에게 직접 미음을 떠먹였다.
방 안의 모두에게 물러나라 한 터라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이곳에 밀어를 적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은 떨어져 가는 잉크와 함께 흘려보내고, 성인의 관을 머리에 쓴 이후부터 언제나 함께하였던 그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본 서기의 마음을 이곳에 적는다…….
황실의 기록들은 대부분 서기들의 회고록처럼 쓰여 있어 마치 남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특히나 이 서기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던지 온갖 아름다운 시와 격언을 인용하며 선황의 사랑을 칭송했다.
복도에 쫓겨나서 할 일이 어지간히도 없었나 보다. 이렇게 길게 써 놓은 것을 보니.
왜인지 들춰 보니 별것이 없어서 허무해진 카밀루스는 심드렁하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로제니아는 말년에 아프기까지 한 모양인가 보았다. 서기의 회고록, 아니 이 황실의 공식 기록에는 선황이 그녀를 어떻게 지극정성으로 돌봤는지에 대한 내용만 가득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임신에 대한 얘기가 없다.’
이 기록은 황제의 서기가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로제니아의 모든 것을 적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도 황후의 임신 징후다. 그에 대한 서술을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숨긴 건가?
황제가 로제니아를 만난 곳은 항상 그녀의 방이었고, 심지어 그녀는 누워 있는 채였으니 숨기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역시나 이상했다.
설마 선황이 죽기 직전까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
그 사람의 고약함을 생각하면 또 하나의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카밀루스의 고민이 깊어졌을 때였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제게 다가왔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터라 카밀루스는 곧장 책을 덮었다. 상대방의 옷차림을 확인한 그가 제 앞에 고개 숙인 이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태양궁의 시종인가?”
“예,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그렇지, 네가 내 소식을 들었는데 참을 리 없지.
카밀루스는 비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숨기며 뒤돌아서는 시종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