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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을 따라서 태양궁에 든 카밀루스는 깊은 저녁이라 빛 구슬로 밝힌 복도를 지나 버니언이 있다는 침실로 향했다.
침실이라. 그래도 그 나름대로 핏줄이라고 안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게 버니언의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부른 장소가 의외였다.
침실 문을 여니 먼저 한 여인이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버니언은 다섯 사람은 누울 수 있는 넓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그 누군가의 시중을 받는 중이었다.
눈 둘 곳이 없는 광경이라 순간 카밀루스는 눈살을 구겼다. 버니언은 앞이 벌어진 가운을 입고 있었고, 그것은 뒤의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애인이라도 되는 건가. 누가 봐도 방금 전까지 침대 위에서 뒹굴었을 그들의 차림이 눈에 거슬렸다. 코끝을 자극해 오는 시큼한 냄새가 불쾌해 잠시 멈춰 있으니, 버니언이 시선을 돌렸다.
예를 올리기를 재촉하는 그 눈빛에 카밀루스는 뒤늦게 허리를 굽혔다.
“비렌시움 대공이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만 나가 봐.”
버니언의 명령에 여인은 노래를 멈추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곧 카밀루스의 뒤에서 문이 닫혔다.
둘만 남자 카밀루스는 참지 못하고 빈정거렸다.
“황후를 얻기 전에 혼외자부터 얻게 생기셨군요.”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버니언에게 일종의 책임감이라든가, 바뀐 태도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온을 상대로 어떤 기분 나쁜 상상을 하고 있을지 잘 알 것 같아 한 말이었다.
그런데 내용을 듣고 버니언이 피식했다.
“예를 들어 너 같은?”
“선황을 존경하시더니 그런 것도 따라 하고 싶으셨습니까?”
“뭐 어때? 마음만 안 주면 되지. 어차피 황위 싸움에선 너처럼 알아서 떨려 나갈 텐데.”
어느새 무표정해진 카밀루스가 대꾸하지 않고 있자, 버니언은 제가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유쾌함이 담긴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고는 가운 앞섶을 갈무리해 아까부터 거슬렸던 하체를 가렸다.
그가 가운의 끈을 꽉 묶으며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였다.
“듣자 하니 넌 성교육도 받은 적 없다면서?”
“그런 게 폐하의 걱정을 살 정도로 중요한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걱정?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적당히 넘어가고……. 어차피 넌 동정도 못 뗐을 거 아냐? 이온을 즐겁게 해 줄 수 있겠어?”
“…….”
뒷짐 지고 있던 카밀루스가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감히 이온을 저런 식으로 언급하다니. 이성이 끊겨 주먹을 날릴 뻔했다.
간신히 참아 낸 카밀루스는 문 쪽을 확인했다. 몰래 방음 마법을 걸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 그는 곧 손을 까딱여 자신을 부르는 버니언의 앞으로 걸어갔다.
버니언이 침대에서 일어나 카밀루스와 마주 섰다.
“너, 갑자기 도서관엔 왜 드나드는 거지? 듣자 하니 황실 기록을 보고 있다던데?”
자신보다 살짝 키가 작은 그를 은근히 내려다보며, 카밀루스는 동요하지 않고 적정한 답을 내놓았다.
“저도 클로델 왕조의 일원으로서 볼 자격은 충분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허락은, 태후께 이미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태후를 언급하자 버니언은 잠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어떻게 설득했냐는 눈빛을 보내기에 카밀루스는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태후는 선황의 옆에서 썩어 간 모양인데, 아들인 버니언은 제 앞만 바라보느라 눈치도 못 챘나 보다.
한데 카밀루스의 미소가 버니언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버니언이 돌연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카밀루스의 옷깃을 잡고 비틀었다.
“난 네놈만 보면 화가 들끓어. 왤까?”
카밀루스는 그의 손아귀에서 구겨지는 옷깃이 신경 쓰였지만 평상의 얼굴을 유지하며 대꾸했다.
“폐하께서 혼자 그렇게 느끼시는 것인데 제가 답을 내 드려야 하는 겁니까?”
그에 더 화가 난 모양인지 숨을 거칠게 들이켠 버니언이 손을 풀지 않은 채로 카밀루스를 밀어냈다. 곧 작게 소음이 일며 벽 앞에 있던 서랍장에 카밀루스의 몸이 부딪혔다.
“개수작 부리지 마, 이 사생아 새끼야. 네 시커먼 속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시커먼 속이라…….”
버니언이 내뱉은 단어를 반복해 중얼거린 카밀루스의 눈이 문득 서늘한 온도를 품었다.
“그거 누가 할 말을 읊은 건지 헷갈리는데.”
뒤이어 제 멱살을 쥔 버니언의 손을 쳐 낸 카밀루스는 지금껏 상대방을 치지 못해 안달하던 오른손을 뻗어 버니언의 목을 움켜쥐었다.
“큭!”
“혹시 내가 가만히 있는 게 평화를 바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카밀루스가 그를 눈 아래로 깔아보며 손아귀에 더 힘을 넣자 버니언이 충격을 받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 너, 허억……!”
카밀루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버니언을 뒤로 밀었다. 그는 커억, 컥, 하는 소리와 함께 간신히 숨을 삼키는 버니언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애잔하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멍청해도 이제는 누가 우위에 있는지 정도는 판단할 줄 알아야지, 버니언. 설마 내가 그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해?”
“그, 그만…….”
카밀루스의 손에 진심이 담긴 것을 느끼고 순식간에 공포에 잠식된 버니언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가 마법을 풀지 않는 이상 안쪽에서 어떤 소란이 일어도 절대 모를 바깥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렸을 때 고작 한 번 이긴 게 네 머릿속에 희망이라도 심어 줬었나 봐?”
연신 비아냥거림을 흘린 카밀루스가 그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제 음성을 똑똑히 새겨 넣었다.
“내가 지금까지 가만히 있는 건 단지 네가 ‘우선순위’가 아니기 때문이야. 나에겐 너 따위한테 쓸 시간이 없거든. 사실 네 면상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난 몹시도 아까워.”
“……크으!”
“하지만 경고는 해 두지. 이온을 대상으로 청혼서를 보내느니 황후로 만들겠다느니 지껄이지 마. 그런 말이 또 한 번 내 귀에 들어오면 그때는 살고 싶지 않을 만큼 비참하게 만들어 줄 테니.”
말을 마치고 카밀루스가 움켜쥐었던 목을 놓으며 그를 확 밀쳐 냈다.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지면서 해방된 버니언은 제 목을 두 손으로 감싸며 쌕쌕 숨을 내쉬었다.
“허억, 허…….”
카밀루스는 충격에 어깨를 바르르 떨면서 숨을 고르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얼마 안 가 버니언이 방 안을 눈으로 훑다가 머리맡에 있는 작은 칼을 집었다.
“너, 죽…… 죽어, 죽여 버릴 거야!”
그러고 이성을 잃고 그것을 휘두르려고 하는 버니언의 팔을 카밀루스가 가볍게 붙잡았다. 도로 침대 위에 그의 몸을 뒤집어 처박은 카밀루스가 제 몸으로 버니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카밀루스가 그를 제 아래에 깔아 두고는 지긋한 눈길로 버니언의 반응을 살폈다. 사색이 된 얼굴을 바들바들 떨어 대며 이쪽과 눈도 못 마주치는 꼴을 보니 이제야 정말로 무서워진 모양이었다.
“너한테 날 죽일 능력이 없다는 건 알지? 뭐, 네가 내기에 이겼을 때 내 목을 주기로 했으니 이기고 나서는 마음껏 하게 해 줄게.”
“…….”
“물론 그 와중에도 네가 가진 것들, 내가 언제든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너, 너…….”
버니언이 홉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에, 카밀루스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앞으로 천한 사생아 새끼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서 폐하께서 밤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게 생겼군요? 근데 그게 원래 가진 게 많은 자들의 숙명입니다, 황제 폐하. 그간 폐하께서 너무 여유작작하게 살아오신 거고요.”
더는 반박을 하지 못하고 얌전해진 버니언의 모습을 확인한 카밀루스가 그만 몸을 떼어 냈다.
구겨진 옷을 한 번 털어 낸 카밀루스는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 그가 회랑에 발을 디디자마자 뒤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카, 칼 단장을 불러와! 당장!”
동요를 숨기지 못한 음성에서 카밀루스는 제 말이 제대로 들어 먹혔음을 알고는 입가에 웃음기를 비쳤다.
그렇게 태양궁을 나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페드로를 데리고 도로 도서관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그들이 궁정의 외진 구역으로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지 활공하던 독수리가 카밀루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카밀루스는 왔냐는 간단한 인사도 안 하고, 알아서 먼저 떠들기 시작하는 녀석의 재잘거림을 들었다.
「잠깐 공작가에 들렀는데, 그 연약한 도련님 나가던걸?」
“이온이?”
「응, 그리고 아스타틴 쪽은…….」
적당히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은 카밀루스는 가기 싫다고 투덜대는 독수리를 도로 날려 보냈다. 그 뒤 도서관으로 향하던 발을 돌려 성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마침 황제의 부름을 받고 태양궁으로 향하던 칼 나르바에스가 맞은편에서 기사들을 이끌고 걸어오다가, 카밀루스 앞에서 멈췄다.
“비렌시움 대공을 뵙…….”
하지만 카밀루스는 그의 인사를 받을 틈도 없이 그저 손으로 어깨만 한 번 툭 치고 지나쳤다.
칼이 제 어깨에 닿은 손에 놀라 돌아보았으나, 이미 카밀루스는 저만치 걸어가 버린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