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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92)화 (92/317)

* * * 

지하로 향하는 좁은 통로를 지나 문을 열자마자 온갖 불쾌한 냄새가 훅 끼쳤다. 곰팡내는 기본이었고, 뿌연 안개와 함께 담배 냄새가 밀려드는 것에 이온이 곧장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저 혼자 들어가도록 할까요?”

“아니, 내가 가야 이야기가 쉬워.”

에렌스트 경의 제안을 가볍게 거절한 이온이 다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의 모습이 모두 드러나기 전부터 떠들썩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이건, 씨발, 사기야!”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걷어차인 의자가 이온의 발 앞에 굴러오자 에렌스트 경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팔로 이온의 앞을 막았다.

“이 새끼가! 지가 못해서 돈 잃어 놓고 판을 엎어?”

이온은 몇몇이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눈으로 지하 도박장의 면면을 눈으로 훑었다. 규모만 보면 어느 파티장의 홀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넓은 공간에, 마법 구슬을 띄워 은은하게 안쪽을 밝혀 둔 이곳은 제법 많은 테이블들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돈 또는 중요한 무언가를 걸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뒤섞여 있는 터라, 사람들의 옷차림이 전부 제각각이었다. 이온은 그 사이에서 제가 들었던 특징들을 떠올리며, 찾는 사람이 어디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지하실에 들어온 이후로 공기가 답답해 작게 콜록대기 시작하자 에렌스트 경이 염려된다는 표정으로 물어 왔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그냥 공기가 안 좋아서 그래.”

“빨리 찾고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에렌스트 경의 보호를 받으며 지하 곳곳을 누볐다.

함께 눈으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폈지만, 한동안 둘 중 누구도 찾았다는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다 이온은 누군가가 코담배를 피우는 것을 발견하고 순간 걸음을 멈췄다.

상대방의 새끼손가락이 까만 것을 확인한 이온이 외진 곳의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 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

사람들 구경에 꽤 열중하는 모양인지, 그게 아니면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옆에 와도 딱히 반응이 없는 그에게 이온이 질문을 던졌다.

“귀족이 이런 데서 도박을 하는 건 너무 품위 떨어지는 일 아닙니까?”

“……?”

그제야 옆을 돌아보는 남자의 시선에 이온이 뒤집어썼던 겉옷의 모자를 거두어 얼굴을 드러내었다.

“카르코 백작.”

공기가 안 좋아서 그런가, 말 몇 마디를 했을 뿐인데 곧바로 기침이 터졌다. 그에 뭔가 싶었는지 이온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상대방이 왜인지 좀 흐리멍덩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못 알아보니 다행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뺄 이유가 없는 이온은 순순히 답했다.

“크레이거가의 장남인 이온 크레이거라고 합니다.”

“아…… 그 몸이 안 좋다는.”

그래, 이 정도가 적당했다.

카르코 백작은 이미 정계와 거리를 둔 지가 한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존재조차 잊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하는 대꾸를 들은 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대화 좀 할까 싶어…… 하, 찾아왔습니다.”

점점 숨쉬기도 불편해지고, 먼지가 걸린 것처럼 목이 간지러워 연신 콜록거리자 백작이 제 코담뱃갑을 닫았다. 그러고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이온을 곁눈질했다.

“서로 안면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에 대한 단서를 백작께서 알고 계실 것 같기에.”

백작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별말 하지 않고 정면만 바라보고 있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이온이 물었다.

“카르코 백작은 선황의 시종장이셨지요?”

“……오래된 이야기를 하는군.”

겨우 반응을 끌어낸 이온이 아까부터 시야 한쪽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까닥거리는 그의 검은 새끼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카르코 백작은 모종의 일로 마기가 몸에 닿아 손가락이 저렇게 된 탓에 태양궁에서 쫓겨난 시종장이었다. 실은 황후를 잃은 선황이 기존의 사람들을 다 내치고 싶어서 핑계를 댄 것이라는 후문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가 태양궁을 나간 뒤 선황은 꽤 긴 시간을 거쳐 시종과 하인들을 천천히 전부 갈아 치웠다.

“저에게 그 오래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백작.”

“사자의 일이 왜 궁금한 건가?”

이온은 선황의 이야기가 나온 뒤로 그가 더는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는 것을 보고, 이 이야기가 그에게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이온은 아까부터 제 눈앞에 둥둥 떠 있는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어머니의 정체 알아내기’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적어도 두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고 먼저 일어나 밖으로 향해 걸어갔다. 공기가 워낙 탁해서 더 버티기는 어려울 듯했다. 실제로 사망 확률도 19퍼센트까지 올라왔다.

“밖에 공간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뒤에서 에렌스트 경이 백작을 데리고 따라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플레이어가 베를렌 베르디 카르코의 회유를 시작합니다.]

[본 진행은 플레이어의 생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 *

라치크길드 황도 서부 지점

그런 간판을 단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멀리서 자정의 종소리가 울린 다음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겉옷은 오는 길에 페드로에게 맡기고 드레스 셔츠만 걸친 채 24시간 내내 불이 켜져 있는 그곳에 조용히 들어섰다. 그러자 아무도 드나들지 않을 새벽이라 꾸벅꾸벅 졸고 있던 카운터의 안내원이 보였다.

눈꺼풀이 무거운지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모습에 카밀루스는 마치 지나가다가 그냥 들른 사람처럼 한구석에 앉았다. 그러고는 무료한 얼굴로 의자 옆에 비치된 한 무더기의 전단을 살폈다.

누군가를 찾는다는 내용도 있었고, 구인하는 내용도 있었다. 라치크 길드는 겉보기엔 아주아주 평범한 길드였다. 귀족들보다는 평민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생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점이 제국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서 가끔은 지친 사람들의 휴게소가 되어 준다고도 들었다.

카밀루스는 한적한 그곳에 앉아 지하의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배경 삼아 여유롭게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창문 쪽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

그 순간, 종달새처럼 작은 새 한 마리가 짹짹 울더니 잠시 뒤 찾아온 다른 새와 짧게 춤을 추다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카밀루스는 그 둘이 어느 마법사가 부리는 새임을 눈치챘다.

‘여러 마리가 번갈아서…….’

이전에 새가 사라진 일 때문에 더 조심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 중간에 전달 역도 따로 있을 테니 새를 쫓는다고 해도 마법사를 찾는 데까지는 꽤 애를 먹게 될 터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쫓아가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지하에서 여러 개의 발걸음 소리가 올라왔고, 말소리도 더 선명해졌다.

제일 먼저 들려온 건 의심이 가득 담긴 아스타틴의 목소리였다.

“더 이상의 거짓은 없다고 믿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물론입니다. 이건 정말로 제 목을 걸어도 좋아요. 제가 소통하는 분은 이분뿐입니다.”

아마 이 황도의 서부지점장인 듯한 사람한테 쪽지를 건네받은 아스타틴이 내용을 확인하고 미간을 구겼다. 그러다 이내 1층의 구석에 앉아 있는 카밀루스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밀루스는 능청스럽게 보고 있던 전단지를 내려놓고 작게 미소 지었다. 그는 곧장 제 앞으로 와서 허리를 굽히지 않는 아스타틴을 보며 여유롭게 물었다.

“새벽이라서 헛것이라도 봤다고 착각하고 있나?”

그러자 아스타틴이 작게 숨을 삼키더니 얼른 쪽지를 품 안에 구겨 넣었다. 그러고는 곧장 카밀루스와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걸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렌시움 대공을 뵙습니다.”

그의 말에 뒤의 기사들도 얼른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카밀루스는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눈은 괜찮아서 다행이네. 난 또 겉옷 하나 벗었다고 못 알아본 줄 알았지.”

“……송구합니다.”

명백한 빈정거림에 아스타틴이 작게 사과의 말을 입에 올렸다. 이전의 만남 때도 느꼈지만 썩 좋지 못한 카밀루스의 태도에 그는 절로 제 어깨를 긴장시켰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명했다.

“좀 더 가까이 와 봐라.”

“…….”

아스타틴이 제가 들은 게 맞느냐는 듯이 눈을 들어 쳐다보자 카밀루스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저하던 아스타틴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카밀루스의 앞으로 몇 발짝 다가섰으나 카밀루스는 더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가락을 연신 까딱였다.

“더.”

“대공.”

아스타틴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져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이었다. 그에 아스타틴이 무슨 생각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카밀루스가 그가 걸친 제복의 옷깃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

그에 아스타틴이 놀라 눈을 크게 떴을 때였다. 카밀루스가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널 감시하는 놈이 있다, 아스타틴.”

“그게 무슨……?”

카밀루스가 눈동자만 굴려 창 쪽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아스타틴의 눈도 따라가려고 하자 그는 옷깃을 잡은 손을 잡아당겨 못 하게 막았다.

“흔히 보이는 마법사가 부리는 새가 네 주변에 날아다니고 있어. 당연히 한두 마리는 아니다.”

그걸 왜 자기한테 가르쳐 주냐는 눈빛을 본 카밀루스가 본론을 꺼냈다.

“그댄 크레이거가의 영식한테 빚진 게 남아 있지?”

“…….”

“영식의 목에 걸려 있던 마나석을 파괴했을 때.”

“대공, 그건.”

아스타틴에게서 어울리지 않게 변명 같은 것이 흘러나올 듯하자 카밀루스가 다시 제 말을 이었다.

“그때 버니언의 명령은 단순히 목걸이 하나를 부수라는 정도였지 않나. 그런데 그거 때문에 영식이 혼수상태에 빠져 버렸으니…….”

카밀루스는 뒷말을 잇지 않고 그저 아스타틴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스타틴은 그날, 사건의 주동자인 황태자가 태자궁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시치미를 떼는 바람에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을 전부 뒤집어쓸 뻔했다. 하지만 그를 아꼈던 선황이 분노해 날뛰는 크레이거 공작을 불러 담판을 지었다.

8년 전, 둘 사이에 무슨 거래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중 하나가 카밀루스가 만든 마나석이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네게 정말로 양심이 있다면 그걸 빚이라고 생각해야지. 그리고 이번이 네 빚을 청산할 기회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눈치 없기는.

이 정도 말하면 이온은 당연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타틴은 이온처럼 귀엽지도, 명석하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카밀루스의 말이 길어졌다.

“감시자를 내쫓지 마. 계속 모르는 척 널 노출하란 말이다.”

“…….”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그대의 이 심장에, 정의가 살아 있다면 말이야.”

이야기하면서 카밀루스는 아스타틴의 가슴을 툭툭 쳤다. 그러고 더는 반응 볼 필요 없이 일부러 그를 확 밀쳐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비틀거린 아스타틴이 당황해 쳐다보자 카밀루스가 그를 내려다보며 툭 내뱉었다.

“그렇게 목이 뻣뻣해서야 예를 갖춘다고 볼 수 있나?”

제가 불러 놓고 제가 화내는 그의 모순된 모습에 아스타틴은 그가 연기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리고 이건 잘 가져가도록 하지.”

“……?”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던 아스타틴이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가 그의 손에 들린 쪽지와 약병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전하!”

카밀루스가 그의 옷 안에 있던 것을 어느 틈엔가 빼 간 것이었다. 대공이 설마 도둑질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아스타틴이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자 카밀루스가 피식 웃었다.

“버니언한텐 발견한 게 없었다고 적당히 둘러대.”

그러고 카밀루스는 지난 며칠간의 성과를 한순간에 도난당한 아스타틴이 물고 늘어지기 전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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