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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수면을 취하지 않은 채 20시간 이상 깨어 있는 중입니다.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옵니다.]
[현재 플레이어의 사망 확률은 22%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몸에는 깨어 있는 시간마저 제한 시간이 있었다는 걸 깜빡했다. 어느 숙박업소의 작은 방에 들어가 백작과 마주 앉은 이온은 시스템의 말대로 눈꺼풀이 무거워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대로 1시간만 더 지나도 아마 견딜 수 없을 만큼의 피로가 몰려올 터였다. 그러한 상태를 눈치챈 에렌스트 경이 이온을 조심스레 불렀다.
“소공작?”
그러나 이온은 손짓으로 그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에렌스트 경은 걱정스러워하는 듯했으나 일단 두 사람과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진 문 쪽에 서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백작은 뭔가 불안한지, 이온과 마주 앉은 다음부터 계속 손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이로 깨물었다가 탁자를 두드렸다가 옷을 구겨 잡기를 반복했다. 이온은 정신 사나운 그의 면면을 살피다가 넌지시 권유했다.
“혹시 코담배가 필요하신 거면…….”
잠깐 피우셔도 괜찮다.
그렇게 말하려 했는데 백작이 주먹을 꽉 쥐더니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도 날 찾아온 자가 있었소……. 설마 공자도 같은 용건으로 찾아온 건가?”
그에 이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엿듣고 있던 에렌스트 경 역시 이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가로저었다.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이온은 다시 백작과 마주했다.
“제가 한 일은 아니라서 답변드리기가 어렵군요. 그쪽은 무슨 일로 백작을 찾았습니까?”
“얼마 전에 그분이 돌아왔다고 들었네.”
“그분? 대공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이온은 피곤함에 관자놀이를 살짝 눌렀다. 졸립다 보니 머리가 뻑뻑해져 있었지만 이 정도는 어떤 맥락인지 충분히 파악이 되었다.
“같은 용건이 맞겠습니다. 저 역시 대공의 어머니를 찾고 있으니.”
막후에 자신 말고 카밀루스의 어머니를 찾는 자가 또 있다.
‘……아마도 버니언이겠지.’
이온은 제가 그보다 한발 늦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또한 아직 버니언에게서 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니 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힘이 빠지기도 했다.
아니,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으니 질문이 건너왔다.
“대체 왜 그걸 알려고 하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두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
백작은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하나는 이온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하겠지만, 나머지 하나는 누군지 헷갈릴 터였다. 다만 이온은 제가 흑인지 백인지 구분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화제는 자연스럽게 넘겼다.
“제 발언의 어디에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자네는 크레이거 공작의 영식이라고 하지 않았나?”
“제 신분이 문제인 것인지요?”
크레이거 가문은 유구한 오브라이언 제국의 역사상 단 한 번도 친황실파가 아닌 적이 없었다. 초대부터 지금까지 무려 43대가 흘러내려 왔고, 심지어는 세 번째 왕조를 맞이했지만 언제나 황가에 대한 충성을 잊지 않았다.
어느 시점부터는 상업으로 눈을 돌려 부를 이루고 있으나 역사서의 내용들을 보면 예전에는 무력도 상당했던 것 같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2인자를 자처했던 가문이 바로 크레이거 공작가인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상대는 자신을 지금 버니언이 보낸 자로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어째서인지 백작은 방금 전의 대화를 이어 가지 않고 대충 얼버무리려 했다. 묘하게 이야기가 자꾸만 겉돌았다. 말을 거듭할수록 상대의 입을 열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을 때, 이온은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다.
이온은 안 그래도 늘어지고 싶어 하는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조금 풀어진 자세로 상대방을 살피다가, 말하는 동안 백작이 틈 날 때마다 한 번씩 만지작거리고 있는 새끼손가락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눈길을 느꼈는지 백작이 왼손으로 그것을 가렸다. 방어적인 신호임을 알아챘지만 이온은 굳이 지적해 물었다.
“그 손가락은 왜 그런 것인지 궁금하군요. 황궁에는 마기가 담긴 물건이 많지 않았을 텐데요.”
“이건 그냥 내가…… 부주의했기 때문이네.”
이온은 음, 하고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못 믿겠다는 의미였다.
이는 눈앞의 사람이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든 상관없는 요소였다. 카르코 백작은 과거엔 황제의 시종장까지 된 사람이다. 선황의 성미를 생각해 보면 한순간의 부주의로 위험에 빠질 만큼 허술한 사람을 옆에 두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이온은 적당히 속아 넘어간 척을 해 주기로 했다. 제가 원하는 화제를 꺼낼 적절한 타이밍이 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런 겁니까? 약병을 잘못 건드렸다든가?”
“그래, 그런 유지. 단순한 실수.”
이온은 입가를 살며시 휘었다.
‘생각보다 답을 일찍 찾았네.’
카밀루스가 건넨 시점이 너무나 적절했다고 생각해야 할지…….
이온이 걸치고 있던 케이프 안쪽에 손을 넣었다. 병의 각진 모서리가 만져진 순간 시스템이 물어 왔다.
[‘초월의 물약’을 본 퀘스트에 활용하시겠습니까?
1. 예
2. 아니오]
[적절한 사용이 아닐 시 플레이어의 생존에 영향을 미칩니다.]
시스템이 노골적으로 협박하고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묻는다면 당연히 ‘예.’였다. 이온으로서는 굳이 이 확률 높은 도박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1. 예’가 선택되었습니다.]
이온이 탁자에 보라색 물약을 탁 내려놓았다. 육각형의 약병을 들여다보던 백작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이걸 자네가 어떻게 가지고 있지?”
그 반응을 보면서 이온은 확신했다. 손가락이 저리된 것은 이 약병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그리고 아마 백작은 이온이 어디 쪽인지 확신하게 됐을 터였다. 지금 시점에 선황이 지니고 있었을 이 약병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야 얼마 되지 않을 테니까.
높은 확률로 태후이고, 태후는 버니언의 생모였다.
제가 버니언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으리라 상상할 것을 생각하면 불쾌하긴 했지만, 그것이 진실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면 나쁘지는 않았다.
“출처를 알려 드리면 저에 대한 경계가 낮아집니까? 선황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나요?”
“그건.”
여전히 주저하는 백작을 보면서 이온은 그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말을 길게 늘였다.
“제가 바라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백작. 정치적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옛날이야기하듯이, 선황 주변의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런 이야기가 왜 필요한가?”
이온은 이 질문에는 조금 고민을 해야 했다.
여러 상황으로 추측건대 카밀루스는 약병을 태후에게서 받아 왔다. 버니언의 친모인 태후가 왜 이걸 카밀루스에게 건네었을까? 그것도 제 아들을 위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인 득실과 상관없는 무언가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추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제국의 태후이니 이미 온갖 금은보화를 다 가지고 있을 테고, 딱히 무언가를 수집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들었으니 둘 사이에 돈이나 재물이 오갔을 확률은 낮다.
“가엾은 누군가를 위해 다정한 노래를 불러 주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그러니까 태후가 바란 대가는, 감정적인 것일 터였다.
〈대공의 친모 때문일까요?〉
제가 그 질문을 했을 때 공작이 보였던 날카로운 반응.
〈넌 네 어미를 참 닮았다.〉
카밀루스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듯했던 선황의 발언.
두 가지가 현 태후의 녹록지 않았을 상황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태후라고 못 박지 않은 것은 자신의 추론이 틀렸을 가능성 역시 열어 두기 위함이다.
“…….”
백작은 이렇다 할 대답 없이 이온과 약병을 번갈아 보았다. 그 와중에 불안한 듯, 아까 그랬던 것처럼 손을 한 군데 두지 못하고 부산스레 움직였다.
머리를 열어 생각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지만 이온은 제가 정답을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어 꽤 초조했다. 그러나 설득하는 입장에서 입을 멈출 수는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적당히 숨기셔도 상관없습니다. 빠진 퍼즐은 제가 맞춰 넣을 테니.”
마침내 백작의 입술 사이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네는 마탑주 재니스를 아나?”
그의 이야기가 나오리라고는 예상하기도 했고, 못 하기도 했던 터다.
이온이 가만히 뒷말을 기다리고 있자, 백작이 살짝 떨리는 손으로 약병의 뚜껑을 두드렸다.
“이걸 가져온 사람은 그자였네.”
[플레이어가 베를렌 베르디 카르코의 회유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야기는 선황의 황태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온은 제 생각보다 훨씬 긴 이야기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시간이 얼마 없는데…….’
[상태 이상: 피로. 플레이어가 급격한 피로감을 느낍니다. ※1시간이 지나면 플레이어가 ‘탈진’ 상태에 빠집니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3%입니다.]
하지만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다음에는 백작을 볼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