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곧장 나오는 여관의 홀을 가로지르는데, 몇 걸음 못 걷고 현기증에 휘청거리자 에렌스트 경이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상태 이상: 피로]
[상태 이상 ‘탈진’이 발동되기까지 10분 3초…….]
이온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가야 돼.”
안색이 창백해진 것을 보면서 에렌스트 경이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온은 그의 손을 꼭 잡는 것으로 어서 가자는 뜻을 밝혔다.
자박자박, 빠르게 땅을 밟았다. 그동안 머릿속이 백지가 된 듯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피곤보다 더한 충격이 그의 모든 상념을 날려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르코 백작의 말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나 당시 황실의 핏줄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 않나?〉
‘말도 안 돼.’
피로감에 몸이 축축 처지려고 하는 와중에도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이온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럴 리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런 슬픈 이야기는, 더는 카밀루스의 인생이 아니어야 했다.
‘그래, 아니야. 아직 퀘스트가 완료된 것도 아니고…….’
그 가정이 맞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까 아니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절묘하게 들어맞는 퍼즐 조각들이 자꾸만 불길한 상상에 부채질을 해 댔다.
뇌리에 자꾸만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지는 것을 애써 떨쳐 낸 이온은 정신없이 걸었다.
그렇게 공작 저의 뒤편 정원으로 이어지는 숲을 지나가며 손톱을 깨물 무렵이었다. 푸드덕, 하고 커다란 새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온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
그에 이온이 움칠하자 에렌스트 경이 얼른 팔을 붙잡아 뒤로 당겼다. 걸음이 덜컥 멈추어졌다.
[상태 이상 ‘탈진’이 발동되기까지 32초…….]
그리고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알리는 시스템 창을 본 순간, 이온의 발을 익숙한 목소리가 옭아매 왔다.
“이로 그렇게 어디 물어뜯는 버릇은 안 좋은데, 이온.”
이온에게 달려들 듯했던 방금 전의 커다란 새가 누군가의 팔에 가 앉았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몸을 뒤로 돌리니 카밀루스가 보였다.
“게다가 이 새벽에 어디 다녀와?”
“카밀루스…….”
던져진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이온이 머뭇거렸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저택에서 나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게 자신처럼 후문으로 몰래 나왔다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온은 의외의 곳에서 마주한 그를 보고 당황해 눈을 떨었다.
단순히 독수리가 날아오는 방향으로 쫓아온 게 맞을까?
의문을 품고 바라보는 사이 카밀루스가 이온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새벽의 공기가 차가워 뺨이 식었던지 이온의 얼굴에 그의 손이 닿자 미온의 열기가 전해졌다.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 ……무슨 일 있었나?”
[상태 이상 ‘탈진’이 발동되기까지 7초…….]
뒷말은 에렌스트 경에게 향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걸 보고 이온이 먼저 대답했다.
“아니,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건데.”
하지만 이 정도 시간으로는 방으로 돌아가긴 틀렸다. 이온은 순간 정신력으로도 버틸 수 없는 피로가 확 몰려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어딜 다녀왔길래?”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랐다. 이 곤란한 질문에 답변하지 않아도 되어서. 때마침 시스템이 눈앞에서 난리를 쳤다.
[경고! 경고!]
[시간이 초과되어 플레이어가 ‘탈진’ 상태에 빠집니다.]
[상태 이상: 탈진. 사망 확률이 15% 이하가 될 때까지 수면 상태에 빠지며(15% 이하여도 반드시 깨어나지는 않음), 걷기·뛰기 등의 활동에 제약을 받고, 섭식·소화 등의 생식 기능이 다소간 떨어짐.]
하지만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백작이 말한 게 사실이 아니지 않으냐고, 어떻게 한 사람에게 그렇게 많은 불행이 몰릴 수가 있느냐고.
스스로도 원하지 않는 능력을 받은 대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잔혹하지 않느냐고.
만나면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말을 토해 낼 시간조차 없이 이온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 버렸고, 눈앞이 휘청거렸다. 순간 곁에 있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가로질러 왔다.
“도련님!”
“이온!”
그리고 이온의 눈이 감기기 전, 놀란 카밀루스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해지는가 싶더니 등 뒤를 받쳐 주는 거센 힘이 느껴졌다.
이온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눈가에 옅게 눈물이 맺혀 있었다.
* * *
“하아…….”
얼굴을 감싼 손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침이 밝았지만 어제 하루 동안 눈을 전혀 못 붙인 카밀루스가 이온의 침대 앞에 앉아 그를 지켜보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이온은 겨우 잠에 빠진 것에 불과하지만 카밀루스는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는 지켜보기만 하다가는 한숨만 늘 것 같은 기분에, 카밀루스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혹시나 이온이 깰세라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고 아침부터 꽤 분주한 저택의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에밀리가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카밀루스를 발견하고도 먼저 말을 못 걸고 있는 것에, 카밀루스가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를 불렀다.
“크레이거 양?”
“전하.”
계단을 완전히 내려가 그녀 앞에 선 카밀루스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살폈다. 이전에 봤을 때와 달리 조금 풀이 죽은 듯한 기색이 마음에 걸려 그냥 지나치기가 뭐했다.
“소공작을 보러 가려는 겁니까? 그럼 올라가지 않고요.”
그의 질문에 에밀리가 이온과 닮은 초록빛 눈을 들어 카밀루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저, 오라버니가 또 쓰러졌다고 들었어요.”
이온이 너무 안 깨어나서 그런지 아침에 잠깐 이온의 방에 들렀다 간 버틀러가 있었는데, 그가 다른 이들에게 알린 모양이었다. 당장 크레이거 공작이 달려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저도 놀라긴 했습니다만, 그냥 잠든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인가요?”
“걸리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마치 의심된다는 듯한 그녀의 발언에 카밀루스가 반문하자 에밀리가 제 배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행동에서 그녀의 초조감이 그대로 묻어났다.
“……대공께서 절 겁쟁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항상 오라버니가 깨지 못할까 봐 걱정이 돼요.”
이전에 보았을 때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오빠를 살살 놀리기도 했던, 밝은 에밀리를 기억하는 카밀루스였다. 그는 에밀리가 고개를 살짝 숙여 자신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녀는 몹시 솔직하다는 점이었다.
“아픈 오빠를 보러 갔는데 가끔 깨어나지 않았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의 무서움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서툴지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해합니다.”
짧게 대꾸하는 말에 에밀리가 고개를 들었다.
“이해하신다고요?”
“그런 감정은 나 역시 소공작을 볼 때마다 느끼니까.”
“그런가요?”
카밀루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밀리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숙녀의 손을 잡아도 되는 건지 몰라 주저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별 저항감 없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아 왔다.
카밀루스는 저에게 의지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그녀의 행동에 약간의 고마움마저 느끼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반대편 손으로 치맛자락을 붙잡고 에스코트를 따라 계단을 오르는 그녀에게 카밀루스 역시 솔직한 심경을 꺼내 놓았다.
“잠이 들었을 때 다음에 눈을 뜨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고, 늘 그를 위해 움직인다며 확신 어린 생각을 하면서도 이 길이 맞는 것인지 매번 헷갈리죠.”
“오라버니의 저주는 풀릴까요?”
“그럴 거라고, 언제나 자신 있게 말하지만.”
에밀리는 다 알겠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뒷말을 붙였다.
“마음속엔 항상 불안감이 상존하는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크레이거 양.”
다행히 자신의 위로가 통했는지 에밀리의 얼굴이 눈에 띄게 풀렸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카밀루스가 에밀리를 이온의 방 앞에 데려다 두자 에밀리가 바로 손을 놓았다.
복도의 고요함이 그녀에게 어떤 압박감을 주었던지, 에밀리는 선뜻 문을 열지 못했다. 잠시 뒤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에밀리가 문을 열었다.
사람 몸이 통과하지 못할 만큼 작게 틈을 만든 그녀는,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내 조금 열린 문 틈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이온의 모습이 비치자 그녀가 숨을 작게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