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자나 봐요…….”
소곤거리는 소리에, 방금 전 방을 나왔던 카밀루스도 괜스레 안쪽을 살짝 살피며 대답했다.
“사실 잠든 지 이제 겨우 6시간 남짓 됐을 겁니다.”
“그렇군요.”
어차피 지금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을 테니 들어가 봐도 상관없을 텐데, 에밀리는 마치 겁쟁이 아이처럼 차마 안으로 발을 들이지는 못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제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그녀는 잠든 이온을 꽤 오래 바라보았다.
에밀리는 한참 만에 문을 도로 닫았다. 돌아서는 그녀에게 카밀루스가 눈짓으로 왜 안 들어가냐고 물어 안에 들어가기를 부추겨도 봤으나 도무지 용기가 안 생기는 모양이었다.
……지난 8년간 이 저택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얼마나 많이 마주했을까?
이온은 병에도 익숙해졌다고 했지만, 면역이 전혀 안 돼 있는 것 같은 에밀리의 모습에 카밀루스는 안타까워졌다.
에밀리는 심란해하는 표정을 지은 채 도로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아, 하는 감탄사를 내더니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 손바닥을 쳤다.
“맞아요,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오라버니가 깨기 전에 쿠키를 구워야겠어요!”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외친 그녀는 신나서 얼른 계단 쪽으로 뛰어갔다. 날다람쥐처럼 계단을 잽싸게 달려 내려가는 그녀의 뒤를 카밀루스가 천천히 쫓아가고 있으니, 이미 몇 계단 내려간 에밀리가 느긋하게 움직이는 그를 채근했다.
“어차피 전하께서도 오늘은 하실 일 없으신 거죠? 오라버니 깨는 걸 기다리실 거잖아요. 그럼 어서 같이 구우러 가요!”
돌연 할 일 없는 사람 취급받는 게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카밀루스는 이 정도는 넘기기로 했다. 그녀는 이온이 아끼는 동생이니까.
“갑자기 쿠키를 왜?”
지난번에 남긴 아침 식사를 가져다준 때를 제외하면 이온이 제 방에서 뭔가를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카밀루스가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에밀리가 주변을 돌아보다가 도로 계단을 올라와 카밀루스의 옆에 서더니 작게 속삭여 왔다.
“전하께선 오라버니를 좋아하시면서 아직도 식성을 파악하지 못하신 건가요? 이온 오라버니, 완전히 쿠키 킬러거든요?”
“소공작이…… 말입니까?”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설마’가 ‘역시’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네, 매일매일 쿠키를 무슨 스무 개씩 해치워요. 그런데도 살이 안 찐다니…… 적폐가 따로 없지만, 어쩌겠어요?”
“…….”
그 살은 전부 게으르고 통통한 드래곤한테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탁자 밑에 있는 간식 상자도 전부 그 잔망스러운 녀석을 위한 거라고 말해 주고 싶은 걸 카밀루스는 간신히 참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대화를 유도하려 했다.
그가 다시 계단을 훌쩍 내려가는 에밀리의 뒤에 대고 말을 붙였다.
“크레이거 양? 잠시만요, 쿠키 말고 더 쉬운 건 없습니까?”
“네에?”
아니,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생각하느라 핀트를 잘못 맞춘 모양이었다. 에밀리가 다시금 뒤를 돌았을 때는, 방금 전까지의 양처럼 순한 표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눈을 바짝 치켜올린 독사 같은 모습이 그녀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짧지만 날카로운 반문을 한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대공 전하, 설마 저희 오라버니한테 고작 그 정도 정성도 못 쏟으시겠다는 의미인가요?”
북부에서 오우거 수십 마리를 상대할 때도 이런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그녀의 말 한마디에 등 뒤로 식은땀이 다 났다.
단단히 오해를 사 버렸다. 하지만 마땅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아 주저하고 있으니, 에밀리가 그를 더욱 밀어붙였다.
“저는 저희 오라버니를 엄청엄청 아껴 주다 못해 심장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애인으로 인정할 수 있거든요? 겨우 이런 거에 무너지실 줄 알았으면 저번에 그렇게 안 밀어드렸죠?”
“아니, 그게.”
정성스럽게 만들어 봤자 그 쿠키는 당신의 오빠 방에 몇 년째 서식 중인 새끼 드래곤이 다 처먹을 거라고 말해 줄 수도 없는 상황이라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에밀리는 눈빛으로 ‘이온을 위한’ 쿠키를 정말 안 만들 거냐고 강요하고 있었다.
곧 이쪽을 목 졸라 죽일 것 같은 시누이의 매서운 기세에 카밀루스는 결국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예, 물론…… 굽겠습니다. 구워야죠.”
자신이 정성스레 구운 걸 드래곤 놈이 다 가로채 갈 것을 생각하면 배가 아파 미칠 지경이었지만 이 집안에서 을의 신세인 카밀루스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제야 에밀리가 초록빛 눈을 예쁘게 휘며 천사처럼 활짝 웃었다.
“그렇죠? 제인, 전하께서 직접 쿠키를 구우신다고 하니 앞치마 좀 챙겨 드려!”
주방 쪽으로 당당히 걸어가며 온 집안사람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외친 에밀리의 말에 옆의 하녀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나가던 하인들 역시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크게 당황한 기색이 된 제인이라는 이름의 하녀가 눈짓으로 자중하시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그건……. 대공 전하시잖아요.”
그녀가 귓속말로 전하의 체면을 좀 생각하시라고 전했으나 에밀리는 신경 쓰지 않고 카밀루스에게 눈치를 주었다.
커다랗게 뜬 눈을 보면 그곳에 담긴 협박의 의미를 눈치 못 채려야 못 챌 수가 없었다.
진짜로 모르면 새대가리라고 놀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에밀리의 뒤를 따라가던 카밀루스는 다행히 새대가리는 아니었으므로, 그녀 옆의 하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영애께서 날 배려하여 한 말이 맞네. 앞치마를…… 내오도록.”
“아, 예.”
하녀는 정말 전개가 이렇게 되는 게 맞는 건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대공인 카밀루스의 허락까지 떨어지니 결국 앞치마를 가지러 갔다.
그것까지는 그렇다 치겠는데…….
“전하, 그게, 마땅한 것이 없어서.”
“…….”
잠시 뒤, 겸연쩍어하며 하녀가 내놓은 앞치마는 사이즈가 한참 모자란 데다 꽃무늬 자수가 새겨진 것이었다.
주방 문 앞에 선 카밀루스가 이를 보고는 굳어 잠깐 반응을 하지 못하자 하녀가 혼날까 봐 고개를 잔뜩 숙였다.
움츠러든 그녀의 모습을 보며 차마 뭐라 하지 못한 카밀루스는 마치 기도문이라도 외우듯이 속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너그러워지자, 너그러워지자…….’
이건 전부 이온을 위한 일이다.
뭐든 참을 수 있다.
나는 이온을 진짜로 사랑하니까…….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해낸 카밀루스가 이어 머뭇머뭇 앞치마를 걸쳤다. 그 모습에 에밀리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볼우물까지 움푹 파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그녀가 목소리 톤을 한껏 높였다.
“너무 멋지세요, 대공 전하!”
‘우스운 거 아니고?’
그렇게 반문할 뻔했지만 또다시 참은 카밀루스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에밀리는 한술 더 떠 그의 팔에 매달리며 작게 속삭여 왔다.
“이런 조신한 전하를 보면 오라버니도 틀림없이 반할 거예요.”
그녀가 그의 팔을 당기며 주방 문을 통과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에 카밀루스는 순간 작은 앞치마를 입은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잊고 눈을 반짝했다.
“제가 조신합니까?”
만약에 그렇게 보이는 거면 이 정도 이미지 추락은 괜찮은 것도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에밀리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죠. 우리 이온 오라버니는 가정적인 사람을 좋아할 게 틀림없어요.”
그건 그런 것 같기도…….
몸도 아프면서 생각보다 활동적인 이온을 떠올린 카밀루스는 그녀의 논리에 설득당했다.
“그리고 본인이 잡혀 사는 것보다는 잡고 사는 걸 더 좋아할걸요?”
이것도 아마 맞을 것이다.
그리고 카밀루스는 상대가 이온이라면 잡혀 살아도 오히려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했듯이 앞치마를 두른 카밀루스의 존재에 만족하는 것은 오로지 에밀리뿐으로, 주방에 그가 들어서자 음식을 준비하던 하인들은 깜짝 놀라 하던 일을 멈추었다. 심지어 누군가는 긴장감에 손을 달달 떨었다.
그 모습들을 발견한 에밀리는 자기들은 신경 쓰지 말라며 카밀루스가 딴생각을 하기 전에 서둘러 그를 주방 안쪽의 분리된 공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미 여러 번 쿠키를 구워 본 모양인지 에밀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달걀, 버터, 설탕 등의 재료들을 척척 찾아 탁자 위에 올리며 말했다.
“쿠키를 만드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특히나 좋아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만들면 집중이 더 잘되죠.”
왜인지 이곳에 들어올 때쯤엔 에밀리의 말에 홀려 버린 뒤였던 카밀루스가 머릿속으로 이온이 쿠키 먹는 모습을 떠올렸다.
역시 빌어먹을 드래곤 녀석보다 훨씬 귀여웠다. 제 손보다 큰 쿠키를 들고 있으면 더 귀여울 거 같았다. 게다가 이온의 손은 작은 편이니 이는 꽤 현실성 있는 상상이었다.
카밀루스는 제 앞의 쿠키 재료들을 내려다보며 열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런 걸로 애정을 시험당할 줄은 몰랐지만.’
이게 이온의 동생인 에밀리식 테스트라면 당연히 합격점을 받아야 했다.
자신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