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토당토않은 추측에 이온은 눈살을 확 찌푸리며 과민 반응을 했다.
“내가 미쳤어?”
누구랑 입술을 맞대기는커녕 손도 제대로 못 잡아 봤던 그였다. 게다가 파티장에서 춤을 춘 것도 주변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대충 짧게 몇 번 턴을 돌았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숨이 차 금방 그만두었고…….
하지만 이런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도 너무 구차한 짓이라 한마디만 쏘아붙이며 강하게 부정하니, 카밀루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지? 역시 첫 키스는 나지?”
첫 키스……?
순간 이온의 뇌리에 얼굴을 온통 새빨갛게 물들여 가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절의 카밀루스가 스쳐 갔다.
“너는 어차피…….”
어렸을 때 일찌감치 빼앗아 갔잖아?
하여 그렇게 뒷말을 이으려다가 옆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에밀리를 발견하고 말끝을 흐리는데, 귀신같이 기묘한 뉘앙스를 알아차린 에밀리가 물었다.
“‘어차피’? 둘 사이에 뭐가 더 있었어?”
에밀리는 이미 이온의 첫 키스 상대가 카밀루스건 백작가의 영애건 상관없는 듯했다.
뭐가 더 있냐고 묻는다면,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온은 어째선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니, 어차피…….”
‘뭐라고 해야 하지?’
네 오빠는 꼬꼬마 시절에 벌써 눈앞의 응큼한 대공님께 첫 키스를 바쳐서 순결을 잃었단다?
이온이 헤매고 있는데 카밀루스가 탁자 위에 턱을 괴더니, 생긋 웃으며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아, 그렇지. 그러고 보니 8년 전에…….”
“8년 전에요?”
카밀루스가 일부러 말을 더 잇지 않고 여운을 남기니, 에밀리가 더더욱 집중에 집중을 했다.
하지만 카밀루스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상상의 여지를 한껏 남겨 두자, 이온은 어이없어 입을 벌렸다. 그러는 사이 에밀리가 짜게 식은 얼굴로 매정한 제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오빠, 설마 8년 전부터 전하를 좋아해 놓고 바로 얼마 전에 그런 식으로 사랑싸움을 한 거야?”
“사랑싸움이라니, 무슨 소리야?”
“얼마 전에 기억 안 나? 나를 좋아하는 거 맞느냐느니, 사실은 불쌍해하는 거 아니냐느니 하면서 복도에서 싸웠잖아!”
에밀리의 외침에 이온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렸다.
〈머릿속으로 내용 요약해 봐. 누가 봐도 사랑싸움이었는데.〉
이거 카밀루스랑 짜고 치는 거 아닌가 싶게 얼마 전에 카밀루스가 했던 말을 거의 고대로 가져온 에밀리였다.
카밀루스에게서 들었을 때는 사실 진짜로 그런가 싶었지만, 동생에게 들으니 또 느낌이 달랐다.
이온은 몹시 불편한 그녀의 해석을 절대 부정하고 싶었다.
“에밀리, 그건 사랑싸움이 절대 아니…….”
한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밀리가 무미건조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전하가 불쌍해.”
“…….”
“내가 보기엔 이미 천년의 사랑인데 굳이굳이 아니라고…….”
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지만 왜인지 에밀리가 속으로 혀를 차지 않았을까 싶은 지점이었다. 이온 나름대로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는 가운데, 카밀루스는 에밀리의 적극적인 지원에 가볍게 얹혀 갔다.
“역시 그렇지요?”
“……너 누구 동생이야?”
이온이 흘기며 묻는 소리에, 에밀리는 흐흥 콧소리를 흘리면서 계속 오빠를 물 먹였다.
“여기서 핏줄이 중요한 건 아닌데? 이건 그러니까, 좀, 양심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
“내가 양심이 없다는 거야?”
이온의 반문에 에밀리가 괜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딴청을 피웠다.
“그건 이미 오래전부터 정설 아닌가?”
“에밀리!”
당장이라도 이온이 혼을 낼 것 같자 에밀리가 주방 입구 쪽으로 도망갔다. 밖으로 나간 그녀가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카밀루스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대공 전하, 저 또 나중에 이자 쳐서 받아도 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아가씨의 분부대로 다 해 드리지요.”
확실한 대답을 들은 에밀리는 한 손을 움켜쥐며 파이팅을 외치고 사라졌다. 하지만 곧 아차차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에밀리의 하녀가 안으로 들어와 오븐 앞에 섰다. 오빠한테서 도망치느라 자신의 쿠키가 구워지고 있음을 에밀리가 잠시 망각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에밀리가 밖으로 나감으로써 소동이 일단락되자, 이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에밀리와 합세해 자신을 놀렸던 카밀루스를 쏘아보았다.
“둘이 왜 이렇게 유치해?”
“나 원래 질투할 땐 무조건 유치해지는 거 몰랐어?”
카밀루스의 대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이온이 뒤돌아섰다. 밖으로 나가자 카밀루스가 얼른 쿠키 그릇을 챙겨 따라왔다.
계단을 오르는 이온의 오른쪽 왼쪽을 얼쩡거리며 커다란 덩치로 거슬리게 하던 그가 쿠키를 눈앞에 내밀면서 슬쩍 물었다.
“안 드십니까, 쿠키 킬러?”
“쿠키 킬러는 또 뭐야?”
“동생이 그렇게 알고 있던데? 하루에 쿠키를 스무 개 이상 해치운다면서.”
“…….”
사정 다 알면서 지껄이는 소리가 거슬려 이온이 얄밉다는 듯이 그를 째려보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갓 구운 쿠키의 향긋한 냄새에 욤뇽이가 이불 밖으로 작은 뿔을 쏙 내미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문을 닫아도 이불자락 끝에 어설프게 숨어 있는 물빛 눈동자가 향기의 근원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먹을 걸 들고 온 게 카밀루스라 당장 달려오지 않고 참는 것이었다.
그래도 쿠키의 유혹은 꽤 강했던지 저를 쫓아 집무실로 들어오는 녀석의 모습에, 카밀루스는 눈길도 안 주고 소파에 앉았다.
그가 책상에 앉아 벌써부터 일할 준비를 하는 이온을 힐끗하고는 욤뇽이에게 인내를 강요했다.
“먹고 싶어도 지금은 참아. 이거 이온이 먹기 전엔 넌 입도 못 대.”
“꾸우……?”
듣던 욤뇽이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이온을 돌아보았지만, 책상 쪽으로 걸어간 그는 이쪽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카밀루스는 탁자 밑에 있는 간식 상자를 꺼내 제 앞의 드래곤에게 보란 듯이 쿠키를 하나씩 채워 넣었다.
그에 욤뇽이가 탁자 한가운데에 엎드려 물빛 눈을 깜빡이고 있자 카밀루스가 녀석의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았다. 그러자 아닌 척하면서도 다 지켜보고 있었는지 이온이 한마디 했다.
“아가 괴롭히지 마.”
“꾸꾸!”
이온의 비호에 기세등등해진 욤뇽이가 항의하듯이 카밀루스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간식 상자를 정리해 제자리에 돌려 둔 그가 몸을 펴 소파에 기대었다. 그러고는 밖에서는 듣는 귀가 많았던 터라 차마 묻지 못했던 것들을 캐묻기 시작했다.
“그보다 몸은 괜찮고? 새벽엔 어디 다녀왔어?”
“…….”
갑자기 본론으로 치고 들어오자 책상 서랍을 열던 이온의 손이 멈칫했다. 이제 막 일어났으니 어제 있었던 일들을 어딘가 기록해 두려고 노트를 찾던 것인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진 그가 도로 서랍을 닫고 열쇠로 잠갔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를 힐끗했다가 게으른 드래곤을 손짓해 쫓아내고, 그 아래 깔려 있던 편지들의 겉면을 괜히 하나씩 살폈다.
혹시나 버니언한테서 온 게 있으면 이번에야말로 반쯤 죽여 놓으려고 했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것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주의를 분산시키며 은근히 이온을 찔러 댔다.
“귀족가 영식들 중에서 네가 제일 게으를 거라며. 어제 보니 아니던데? 자꾸 불안하게 할래?”
“불안해할 이유 없어. 쓰러진 건 단순 과로였으니까.”
버니언 게 아니라면 별로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으므로 카밀루스가 편지들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이온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몸도 안 좋으면서 과로가 별게 아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게 맞느냐는 듯한 카밀루스의 눈빛에 이온도 카밀루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솔직히 수상한 걸로 치면 카밀루스가 새벽에 나타난 일도 만만치 않았지만, 지금 추궁하는 건 안 그래도 뜨거운 불길을 불쏘시개로 쑤시는 꼴과 마찬가지였다.
하여 움찔거리는 입술을 겨우 단속했지만, 다음 호기심까지는 갈무리하지 못한 이온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카밀루스, 너…….”
어머니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
뒷말을 이으려는 순간 시스템이 끼어들었다.
[상태 이상: 금어]
[플레이어가 말할 수 없는 문장입니다.]
그 때문에 말이 중간에 끊기자 카밀루스가 이온이 말을 가리는 줄 알고 미간을 좁혔다.
“나 뭐?”
“아니, 아무것도.”
“나 너한테 비밀 없어. 얼버무리지 말고 다 물어봐도 되는데?”
얘기만 들으면 진짜로 다 알려 줄 기세였다. 하지만 행적들을 쭉 정리해 보면 카밀루스가 확실히 뭔가 수상했다. 머릿속에선 이미 한참 전에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이온은 거의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비밀이 없어?”
“갑자기 왜 그렇게 반응이 싸해지는지 모르겠네. 설마 나 의심해? 내가 네 뒤통수 칠 거 같고, 그런 건가?”
설마. 카밀루스가 자신을 배신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 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자꾸 그에 대해 아주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는 느낌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밀루스는 황도에 올라온 뒤 제 행적을 숨기지 않았고, 이온도 그가 뭘 하는지 거의 다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은 왜 그에게서 종종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걸까.
“이온?”
생각이 너무 길어졌던가. 어느새 카밀루스가 앞으로 다가와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이온이 썩 당황한 표정으로 마주 보자 그가 작게 속삭여 왔다.
“너 지금 많이 이상한 거 알아? 표정 관리 전혀 안 된다.”
“내 표정이 어떻길래.”
별것 아닌 듯이 대답하면서도 이온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마음이 싱숭생숭해 그에게 집중하기가 힘든 탓이었다.
왠지 모르게 카밀루스가 앞에 있는 한 계속 이런 상태가 유지될 것 같았다. 하여 지금은 대화하기 힘드니 그만 나가 달라고 할까, 그렇게 고민하던 차였다.
이온을 지그시 지켜보던 카밀루스가 물어 왔다.
“……나한테 혹시 미안한 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