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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99)화 (99/317)

“……나한테 혹시 미안한 거 있어?”

어쩌면 그 말이 찌른 것은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진심이었을지도 몰랐다.

듣는 순간 저절로 목구멍이 좁아지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컨디션이 좋지 못한 탓에 금세 숨이 거칠어졌다. 까딱 잘못하면 과호흡이 올 것 같았다.

“이온?”

이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것을 보고 카밀루스가 놀라 당장 책상 너머로 건너오려고 하자, 이온이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괜찮아,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면 돼.”

애써 가슴을 누르며 숨을 가다듬었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카르코 백작의 발언이 생각보다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카밀루스가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이온은 눈을 꾹 감은 채 스스로를 진정시켜 갔다.

하아, 하…….

이 지독할 정도로 약한 몸은 증상도 너무 여러 가지였다. 이온은 지긋지긋함마저 느끼며 한참 만에 눈꺼풀을 올려 다시 앞을 보았다. 그러자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카밀루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준 그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이온이 그를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카밀루스.”

“응?”

“내가 이런 말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주저하는 마음에 말소리가 흐려졌다. 카밀루스는 어떤 말을 덧붙이거나 하지 않고 이온이 마음의 준비를 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그에 힘입어 이온은 지금까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던 질문을 간신히 풀어 놓았다.

“너한테 선황 폐하는 어떤 의미야?”

예상했지만 불편한 질문이 던져지자 카밀루스의 표정이 굳었다. 이온 앞에선 기본적으로 웃는 얼굴을 유지하던 그의 입술 끝이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역시나 싶었던 이온은 곧바로 제가 실언했음을 인정했다.

“미안해, 이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었던 것 같…….”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

그런데 말을 채 다 맺기 전에 카밀루스가 불쑥 대답해 왔다. 이온은 조금 안심했다. 혹시나 그가 선황에게 사랑받고 싶었다거나 하는 속생각을 내비쳤다면 더 죄책감이 일었을 텐데, 그러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혼란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 사람이 날 어떤 생각으로 대했는지…….”

어렸을 땐 학대해 놓고, 죽기 직전엔 찾아가서 대공위를 남겨 줬다. 제삼자 입장에서 그 두 가지만 봐도 충분히 모순된다고 생각할 만한데, 선황의 이중적인 태도를 피부로 느꼈을 카밀루스는 더하지 않았을까?

“원망은 안 해?”

“지금은 안 하지, 네 덕분에.”

내 덕분에?

무슨 뜻이냐고 눈으로 물으니 카밀루스가 이온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만면에 웃음을 그렸다.

“무슨 뜻인지 왜 몰라? 네 앞에서 불행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잖아.”

“그런…….”

이온이 양 뺨을 살짝 붉혔다.

카밀루스가 매번 이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솔직히 민망했다. 이것이 자신이 받아도 되는 호의인지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온의 마음속엔 늘 카밀루스에 대한 고마움과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 이야기가 왜 궁금했을까.”

질문을 들은 이온은 그저 그를 빤히 바라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기실 카밀루스가 자신에게 바라는 건 연민 어린 눈빛이 아니라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렇지만 마음의 틈을 따라 굽어 흐르는 부정한 마음이.

진실이라는 이름의 탈을 뒤집어쓴 수치가.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를 향해 넘쳐흐르기에, 이온은 스스로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황실의 핏줄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카밀루스의 인생을 폭력적으로 유린했던 인간이 사실은 그의 아비조차 아닐 수 있다.

이건 그에게 너무 가혹한 진실이 아닐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만약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카밀루스는 또다시 손가락질을 받게 될 터였다.

황후의 태를 빌려 태어났으나 황제의 씨는 아닌 자.

그건 황제의 사생아라는 꼬리표보다 더한 낙인이었다. 진위와 상관없이 그러한 논란의 여지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비렌시움 대공, 카밀루스 클로델은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이온이 내릴 결론은 하나였다.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을 것이다.

비록 죽어 이 땅에서 사라진 존재이지만, 카밀루스에게 선황은 그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카밀루스는 아니라고 부정할 것이다. 혹은 지금의 상황으로 충분하다고 할지도.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냉정한 법이다. 황실의 일원으로서 늘 정치에 한 발을 담그고 살 수밖에 없는 카밀루스는 선황의 해골을 밟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온은 그렇게 해서라도 카밀루스가 이 세상에서 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앞길을 제 손으로 열어 주고 싶었다.

그것은 이 몸의 주인과 상관없는 ‘자신’의 의지였다.

“……그냥, 궁금했어. 너랑 이런 얘기 한 번도 나눈 적 없잖아.”

스스로가 느끼기기에도 무척 빈약한 변명이 나갔다. 역시나 이온의 일이라면 본인의 것보다도 더 잘 아는 카밀루스가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이 아닌 것 같은데. 네가 날 보면서 이런 슬픈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던가?”

“내 얼굴이 그래?”

“그래.”

썩 단호하게 대꾸한 카밀루스가 손을 이온의 앞에 내밀었다. 영문을 몰라 멀뚱히 보고만 있자, 잡으라는 듯이 흔든다.

이온이 손을 올리자 카밀루스가 책상에서 엉덩이를 떼며 이온을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빼냈다.

“몸 상태로 보나, 심리 상태로 보나 지금 넌 일할 상황이 아니야. 이러다 진짜로 죽겠어. 너 죽으면 난 어떡하라고 이래?”

“어떡하냐니. 넌 너대로 알아서 잘 살겠지.”

“틀렸어, 같이 죽겠지. 너 없는데 내가 어떻게 살까?”

오버하네.

그렇게 퉁바리를 두려다가 이온은 이전의 마법 계약 내용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엄살이 아니라 나 죽으면 진짜로 죽지, 이놈.

어찌 되었든 카밀루스가 이끄는 대로 침대 위에 누운 이온은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는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카밀루스가 픽 웃다가 이온의 어깨 옆에 걸터앉았다.

그가 이온의 말랑한 뺨을 괜히 살짝 꼬집으며 가볍게 물어 왔다.

“왜 자꾸 그런 눈으로 보는데. 혹시 누가 감히 본 대공에 대하여 안 좋은 소리라도 했습니까, 소공작?”

“그런 거 아니야.”

“거짓말이 너무 티가 난다니까, 넌?”

네가 너무 잘 간파하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옆으로 몸을 돌려 등을 보이자 카밀루스가 영차, 하고 과한 소리를 내더니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왔다.

이불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이온이 곁눈질로 눈치를 주었으나, 카밀루스는 오히려 이온의 어깨를 감싸 몸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긴 팔에 감싸인 채 얼굴이 그의 가슴에 닿자 이온이 움칠했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동그란 귀 끝이 발그레해진 것을 발견했지만 놀리지 않았다.

대신 이유도 제대로 모르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 주었다.

“너만 내 옆에 있으면 언제나 괜찮아, 나는.”

두근거리는 카밀루스의 심장 소리가 평온했다. 아침의 햇살이 주는 따스함과 잘 어울리는 안정감 있는 리듬이었다.

“나에 대해 누가 무슨 말을 했든 다 잊어. 그건 날 절대 못 흔드니까.”

“마치 다 안다는 듯이 말하네.”

“몰라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왜……?”

진심으로 묻는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가 팔을 꽉 잡아 왔다. 마치 결의라도 다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난 너를 위해서만 일어나고, 너를 위해서만 무너져.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그런 건 몰라.”

“그럼 이제부터 알아 둬. 사랑한다는 뜻이니까.”

덜 필요도, 더할 필요도 없는 담백한 고백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강강약약 같은 거, 그건 내 정의가 아니야.”

카밀루스의 정의인즉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 강해지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 약해지는 것이라는 의미다.

말뜻을 알아들은 이온은 아까부터 저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대신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카밀루스의 옷자락을 구겨 잡았다.

그의 포근함은 아이러니하게도 늘 가슴을 찌릿하게 했다. 분에 넘치는 다정함은 마음을 무지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 그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하여 자격 없는 걸 알면서 그의 마음을 탐하는 욕심을 부리게 되어 버렸다.

“그럼 계속 날 사랑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게 바로 독이 든 성배였다.

이온은 과연 그들 앞에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까 의심되었다. 아니, 실은 벌써부터 자신 때문에 무너져 내릴 그가 눈에 보였다.

하지만 카밀루스를 더는 거부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일이다.

문득 카밀루스의 손가락이 눈꼬리에 닿았다. 이온은 그제야 그곳에 물기가 고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끄러움이 올라와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드니, 머리 위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이온 네가 그걸 이제야 물어봐 줘서 너무 서운한데?”

이온은 자신을 다독이는 손길을 느끼며 결심했다.

이 따스함을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누구든 그를 흔들 수 없도록 자신이 카밀루스 클로델을 지켜 낼 터이다.

그들 사이엔 또 하나의 구원 서사가 쓰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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