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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문에 기대어선 카밀루스는 왜인지 탈진한 것처럼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짙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매일같이 어딘가가 아픈 이온을 보고 있으면 돌아 버릴 것 같은데, 이 집안사람들은 대체 저 꼴을 어떻게 몇 년이나 봐 왔는지 몰랐다.
정신력들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카밀루스가 눈을 떴을 때였다. 시야 한구석에 걸리는 사람의 존재에 흠칫해 옆을 돌아보니, 복도 끝에서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이는 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
곧 몸을 편 그가 카밀루스에게 계단 쪽을 손짓하며 이야기했다.
“저와 잠시 담소할 시간을 내 주시지요, 대공 전하.”
시종을 보내지 않고 직접 걸음한 공작의 모습에 카밀루스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지요.”
그러고 앞서가는 공작을 따라 1층의 응접실로 향했다. 미리 말해 두었던지 안쪽엔 다과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데 뒤에 시종을 들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크레이거 공작은 카밀루스의 잔에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김이 올라오는 차를 한 모금 머금어 넘긴 카밀루스가 맞은편의 공작을 바라보았다.
“무슨 용건입니까, 공작?”
벌써 루미에르홀에 머문 지 며칠이 지났지만, 공작은 첫날 이후로 한 번도 카밀루스를 따로 찾지 않았다. 이렇게 독대한 것은 저택에 막 들어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는 의미다.
공작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한 것을 보고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첫마디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하인에게 물어보니 제 아들이 쓰러진 게 오늘 새벽이라더군요. 전하께서 아침 일찍부터 돌봐 주고 계셨다 하던데, 맞습니까?”
이 질문에 카밀루스는 간단히 ‘맞습니다.’ 정도로 대답할 수 있었지만, 이래저래 바쁜 사람들끼리 모였는데 딱히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아 본론을 재촉했다.
“공작, 누군가는 이런 걸 귀족적 화법이라고 말합니다만…… 저는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요는, 소공작이 새벽에 쓰러진 걸 어떻게 알았느냐가 궁금한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흔쾌한 대답에 카밀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한 가지 먼저 묻고 싶군요.”
마침 찻물을 넘긴 공작이 잔을 내려놓으며 질문이 뭐냐는 눈빛을 보냈다. 은근히 경계심이 어린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애초에 서로 사이가 좋았던 편이 아니었던 터라 카밀루스도 그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공작은 본인의 아들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하지만 이 말은 크레이거 공작의 불편함을 못 견디게 자극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그의 말투가 곧바로 딱딱해졌다.
“전하께서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소공작이 새벽에 종종 저택의 옆문을 통해 어디론가 나갔다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걸 전하께서 어찌…….”
“다행히 눈치챘군요.”
카밀루스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꾸하자 공작이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먹으라고 가져다 둔 다과이긴 해도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는 카밀루스의 태도가 괜스레 거슬렸다.
저번 만남 때도 느꼈지만, 이번 역시 카밀루스에게 은근히 지고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지고 들어간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부른 것은 분명 공작 자신인데,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카밀루스의 판인 듯이 느껴졌다.
그러나 카밀루스의 발언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라, 공작은 적당히 돌려 말했다.
“저는 아들에게 그리 무관심한 아비가 아닙니다.”
“물론이지요. 만약 공작이 진짜 몰랐으면 나도 심히 실망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이 질문 역시,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고 해야 할까…….
어릴 때 북부로 떠나 제대로 된 황도의 정치판을 경험해 보지 못했을 카밀루스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공작이 가장 상대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 중 하나였다. 말에 가감이 없는 데다, 화법 자체가 몹시 직설적인데도 그랬다.
공작은 기묘한 긴장감을 풀기 위해 다시금 차를 한 모금 넘긴 뒤 답했다.
“아들의 옆에 늘 붙어 다니는 기사가 있는데…….”
“알렉사이 에렌스트 경.”
그쯤은 이미 안다며 카밀루스가 곧장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예, 그에게 물었으나 마땅한 답은 내 주지 않더군요.”
“그게 끝인지?”
“대공께서는 무슨 답을 더 원하시는 것이십니까?”
마치 신문당하는 것만 같은 상황에 공작이 불만 어린 반문을 했다. 그러자 카밀루스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딱히 원하는 건 없습니다. 그저 사람의 호기심이란 보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기에 뒤에 뭐가 더 있을 것 같아 물어본 것에 불과하지요.”
“지금 이 자리가 누구를 추궁하려고 마련된 자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결국 크레이거 공작이 참지 못하고 그리 대꾸하자 카밀루스가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어투에 약간의 빈정거림이 묻어났다.
“아, 공작은 그런 목적이었군요?”
“…….”
“즉, 아직은 날 경계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그제야 공작은 카밀루스가 이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앞의 질문들을 이어 왔음을 알게 되었다.
제가 대화의 흐름을 놓쳐 버리다니. 그 사실을 깨닫고 꽤 당황해 버린 크레이거 공작이었지만, 그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밀루스는 소파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툭툭 쳤다.
“그런 거라면 내가 공작의 의심을 단번에 풀어 줄 만한 카드가 있기는 한데, 내 아주 큰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라…… 누구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곤란해서 말이지.”
말인즉 카밀루스 또한 공작을 의심한다는 의미였다. 말미에 불만 있냐고 묻는 듯이 은근히 눈치를 주는 것에, 공작은 결국 제 심중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대화가 진전이 되지 않을 것이 뻔했으므로.
“대공.”
“할 말이라도?”
“판단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것이 판단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에 카밀루스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것은 당신이 그런 말도 할 줄 아느냐는 의미에 가까웠다.
〈현 황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하는군.〉
사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얼버무리기에 앞으로도 평생 못 듣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며칠 만에, 이렇게 쉽게 들어 내리라고는 카밀루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터였다.
다만 누군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황제에게 밀고를 하기 딱 좋은 소재다. 그만큼 위험한 생각이었고…….
크레이거 공작이 이런 식으로 과감하게 나온다면 카밀루스 역시 한 걸음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카밀루스가 셔츠의 왼쪽 소매에 있는 단추를 툭툭 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굵은 팔뚝을 드러내 자신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는 공작 앞에 내밀었다.
팔꿈치가 접히는 부분 바로 아래에, 문신이라도 새긴 듯 파랗게 마법진이 그려진 것을 발견한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뭡니까?”
“쉽게 말하면 조건 마법 식. 소공작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내용의 술식입니다. 물론 소공작한테는 다른 거라고 속여 놨지만.”
“…….”
공작이 이걸로 뭘 증명할 거냐고 묻는 듯이 지그시 쳐다보자, 카밀루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간단한 마법이니 다른 마법사를 부르면 진위야 금세 밝혀질 겁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의 답은 아니긴 하겠지. 여기서 이 내용을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자유고, 그간 내 행동들이 전부 거짓이라고 믿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난 공작의 평가를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
서로에게 캐낼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카밀루스의 태도는 몹시도 방만하다 할 만했다. 설득하는 자의 그것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공작이 날 믿지 않으면 지금 이 만남은 서로의 시간만 낭비한 채로 끝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공작?”
그러나 이 말에는 공작 역시 공감하는 바였다. 결국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습니다. 하지만 대공께서 먼저 제 아들에 대해 알고 계신 게 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영식의 비밀이 궁금한 겁니까? 아니면 내가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지 여부가 궁금한 겁니까?”
“당연히 후자이지요, 전하.”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나온 대답에 카밀루스는 그만 대놓고 웃어 버렸다.
그의 말은 전자는 다 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밀루스는 이제야 겨우 공작이 왜 자신을 이곳에 불렀는지 정확하게 알아챘다.
새벽녘에 이온과 에렌스트 경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게 벌어졌어야 하는 일을 제삼자에게 들켰다면 그건 이온에게 아주 큰 위협이었다. 아니, 더 나아가 크레이거 공작가를 향한 위협이 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공작은 제 아들인 이온을 지키고 싶은 거였다. 설령 유구한 세월 동안 지켜져 온 가문이 망하더라도.
‘……어쩐지 아들 바보 기질이 보인다더라니.’
생각보다 더 대단한 아버지였다, 크레이거 공작은.
하지만 카밀루스 역시 이온에 관해서라면 애정이든 뭐든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기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럼 이 정도 대답이라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 뒤의 이야기까지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다, 라는.”
“…….”
“비슷한 유로 말하면 화려한 백조의 수면 아래 잠긴 발, 아니면 무대 위의 배우에 가려진 막후의 피땀…… 뭐, 그런 것들까지 전부.”
대답을 들은 공작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얼마 전에 한 폐하와의 내기는.”
“공작, 그 질문은 반칙이지요. 구체적인 이야기는 서로 안 하기로 암묵적 합의를 한 거 아니었습니까? 당신의 아들을 위해서.”
문장이 길어질 것 같자 카밀루스가 말허리를 끊으며 반문했다. 그 순간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의 벽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