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께선 8년 전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 사람도 얼마 없는 북부의 아이오딘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쪽 사정을 어찌 이리 손바닥 위에 다 올려 두고 계신지 의문이 들기는 하는군요.”
꽤 지루하다 느껴질 만큼 긴 정적 끝에 공작이 그렇게 의구심 어린 말을 내뱉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지적이기도 했지만, 카밀루스는 그에 대한 변명은 따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얌전히 살았다는 것이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것과 등치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남습니다.”
공작의 말은 네 비밀이 무엇인지 어서 속 시원히 말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그에게 맞받아칠 생각이 없었다.
크레이거 공작이란 사람은 카밀루스 클로델을 이해할 수 없는 부류였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식으로든 넘어서지 못할 간극이 존재했다.
“공작, 나에겐 이제 단 한 번의 기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자신의 이해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간절함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벼랑 끝이라는 말입니다. 더는 싸움에서 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이기는 판을 만들고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음을 들은 공작이 카밀루스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는 황가 특유의 파란색 눈동자를 뚫어져라 보다가, 돌연 무슨 생각에라도 빠졌는지 초점을 흐렸다.
“전하께서 이제 스물다섯이시던가요?”
불쑥 떠오른 다른 화제가 조금 당혹스러웠으나 카밀루스는 일단 답했다.
“……스물넷입니다. 갑자기 나이 이야기는 왜 하는지?”
“아니, 잠시 선황 폐하의 생전 모습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나를 보면서?”
카밀루스가 노골적으로 미간을 구겼다. 그가 불편해할 주제임을 알고 있을 텐데, 공작은 딱히 이쪽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전하께선 확실히 그분과 닮은 구석이 있으십니다. 계속 보고 있으니 지금의 황제보다도 더 많이 타고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로 만족스러운 평가는 아니긴 한데, 하고 싶은 말을 막지는 않겠습니다.”
“얘기를 더 이어 가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렇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몰라 카밀루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솔직히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더없는 모욕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아들이 아비를 닮았다는 말은 으레 하는 말이었다. 스스로가 보기에 버니언과 자신 중에서 성격적으로 누가 더 선황을 닮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자신 쪽이기도 했다.
게다가 크레이거 공작은 선황을 아주 오랫동안 섬겨 오기도 했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것으로 알려졌으니 자신을 보고 문득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친구라…….’
혹시 공작은 자신이 그리도 지독하게 미움받은 이유에 대해 알고 있을까.
“공작은 혹시 제 어미에 대해 압니까?”
“모릅니다. 그 당시에는 선황 폐하와 사적인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으니.”
거의 준비한 듯이 나온 대답이었다. 카밀루스가 그에 찻잔을 들어 올리던 손을 멈추고 의구심을 담아 바라보았다.
“왜 그리 보십니까?”
“공작이 선황과 틀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요.”
아까의 불편한 대화를 자신이 한 번 견뎌 내 주었으니, 이제는 그의 차례였다.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면서 크레이거 공작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카밀루스는 대화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두 분의 관계가 정말 기묘하다는 생각을 가끔 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정말 둘도 없는 친우로서 함께 자랐는데, 커서는 왜 정치적인 동반자 이상이 되지는 못했는지. 특히나 공작은 선황과의 관계에서 거의 일방적인 손해만 보는 경우가 많았던데요.”
크레이거 공작가가 친황실파인 것은 원래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눈앞에 있는 이번 대 공작의 경우는 더 노골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크레이거 공작은 선황이 황위에 오른 뒤로 한 번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그를 보필했으며, 그곳의 모든 행정을 가신들에게 맡겨 두었다.
그 때문에 사실상 공국의 해체가 눈앞에 온 게 아니냐는 설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황제가 그의 지위를 완전히 거두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런 애매한 상태에서 선황대에 크레이거 가문은 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제국 내 몇 가지 상품에 대한 거래권 및 이권들을 황실의 앞에 내놓으면서 충성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했다.
한데 공작은 실소하더니 그게 뭐 별 대수냐는 듯이 대꾸했다.
“선황 때 그러지 않은 자가 있기는 했습니까? 선황만이 아니지요, 클로델 황실의 기조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왕조가 새로 열리면서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공국들이 있으면 그 권한을 하나둘씩 회수해 그들을 길들여 왔습니다. 선황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실제로 클로델 황가가 들어선 이후로 5대 공국 중 하나는 완전히 해체되었고, 나머지 공국들의 군사권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하여 클로델 황가의 목적은 중앙 집권형의 절대 권력을 차지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중이었다.
“크레이거 공작가도 그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벌써 오브라이언 제국이 유지된 지도 수백 년이 흘렀습니다. 공신 가문의 피는 흐려지고 있으나, 황실에는 매번 블랑셰의 축복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니…….”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만하지요. 이 클로델 황실이 들어서면서 성전조차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클로델 왕조마저 끝이 나면 이 나라에서 그런 이야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될 겁니다.”
“그 말씀엔 동의합니다.”
깔끔한 대꾸와 함께 공작은 앞에 놓인 과자 하나를 들어 입에 넣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대화를 끊어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카밀루스는 그가 속내를 드러낼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대화를 이어 나가 봤자 그에게서는 로제니아 미아블레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카밀루스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포기했다.
실수인 척, 달그락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려놓자 공작이 눈썹을 살짝 들썩였다. 카밀루스는 기꺼이 작별 인사를 입에 올렸다.
“담소 즐거웠습니다, 공작. 다과도 맛있었고.”
“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카밀루스가 몸을 일으키자 크레이거 공작 역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카밀루스는 그런 그에게 일침을 두었다.
“그러나 다음에 만날 때는 공작이 더 진실해졌으면 좋겠군요.”
“…….”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으니.”
그러고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공작이 직전에 불러 세웠다.
“대공, 그런데 제 아들의 저주에 대해선 언제 말씀해 주실 겁니까?”
“아, 그거…….”
문고리를 놓은 카밀루스가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혹시 이온이 말한 게 있나 싶어 일부러 말끝을 흐려 보았지만, 공작은 얌전히 뒷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렇다 할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아직 그가 말을 못 들었을 것이라 판단한 카밀루스는 고민했다.
과연 어느 정도 선까지 알려 줘야 하나 애매했던 것이다.
갑자기 아들이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고 하면 공작가 전체가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 아니, 사교계 전체를 뒤집어 놓을 엄청난 스캔들이다. 그 때문에 이온도 당장 아버지에게 달려와 알리지는 않았던 것일 터였다.
따라서 그걸 알리는 건 이온의 몫으로 남겨 두고, 그는 일부의 진실만 적절히 알려 주었다.
“소공작의 저주는 다행히 몸에서 마나를 소멸시키는 게 아니라 아주 협소한 한 지점에 뭉치게 하는 겁니다. 그걸 풀어 주면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몸 자체에는 마나가 꽤 많이 있는 편이니 오히려 더 건강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성장을 제대로 못 한 부분까지는 해결이 안 되겠지만…….”
카밀루스의 말에서 희망을 본 공작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환해졌다. 방금 전의 불유쾌한 대화 따위는 벌써 잊어버린 듯이.
“해서, 풀 방법이 있습니까?”
그 때문에 조금 미안해졌지만, 이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정상적인 해주 방법은 없는 저주입니다.”
“……그럼.”
“소공작이 앓은 지 벌써 8년이니 저주에 대한 기본 상식 정도는 있겠지요. 지금 공작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그 방법뿐입니다.”
대답을 들은 공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의 눈빛에 살벌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한 카밀루스는 한숨을 내쉬며 경고했다.
“공작, 그는 당신이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자일 겁니다. 행여나 무모해지지 않도록 해요. 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온은 다르니.”
이온이라면 제 아버지가 자신에게 저주를 건 이를 죽이려다가 개죽음을 당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자신 하나면 충분했다.
원죄는 자신에게 있으니까.
카밀루스는 그만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