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02)화 (102/317)

* * * 

카밀루스의 다독임을 들으면서 깊은 잠이 들었던 이온은 사위가 어둑해진 한밤중에야 눈을 떴다. 일어났을 때 카밀루스는 당연히 옆에 없었다.

누군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침대 위를 멍하니 보다가, 이온은 몽롱한 머리로 협탁에 손을 뻗어 종을 딸랑거렸다.

소리가 울린 뒤, 들어온 건 자신의 전담 버틀러가 아닌 에렌스트 경이었다. 부탁을 받은 듯 그가 대신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소공작, 몸은 괜찮으십니까?”

이온은 아직 따뜻한 이불에 파묻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자면 잘수록 더 많은 잠을 부르는 법이라, 여전히 노곤했다.

“……얼마나 잤어, 나?”

“제가 뵈러 왔을 때는 이미 주무시고 계시더군요. 지금은 저녁 시간도 훨씬 지났습니다. 오늘 뭔가 드시긴 하셨습니까?”

“아니, 배고파. 주방에서 먹을 것 좀 훔쳐 와 줘.”

이온의 어린아이 같은 요구에 에렌스트 경이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하인들이 방 곳곳에 촛불을 놓아 안쪽을 밝히고 갔고, 에렌스트 경은 샐러드와 고기 조금 그리고 마실 것을 가져왔다.

하지만 배가 고픈 것과 별개로 에렌스트 경이 가져온 음식들이 구미를 당기지는 않아 고민하던 이온은 아침에 봤던 것이 생각나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집무실 탁자 밑에 쿠키 있는데 그것도 가져다줘.”

“쿠키요?”

“응, 거기 간식 상자 있잖아.”

뭔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에렌스트 경이 이번에도 제 말대로 해 주었다. 그가 간식 상자를 가져와 무릎 위에 올려 주자 이온은 일단 뚜껑을 열었다.

단내를 맡았는지 이불 속에 숨어 있던 욤뇽이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온은 모르는 척 안쪽을 살폈다.

보름달처럼 엄청 큰 쿠키가 하나가 있어 뭔가 싶었지만, 일단 개중에 제일 작은 별 모양 과자를 집었다.

입 안에 넣자마자 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으, 엄청 다네.”

방금 일어난 데다, 평소 간식을 입에 거의 안 대다 보니 그 맛이 더 자극적으로 와닿았다. 그의 중얼거림에 에렌스트 경이 잔을 내밀자 이온이 얼른 받아 들어 물을 넘겼다.

그러고 상자 뚜껑을 도로 닫아 옆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카밀루스는?”

정신 차리고 제일 먼저 묻는 게 그의 행방이라는 사실이 의외였던 듯 에렌스트 경은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온이 눈으로 재촉하니 이내 성실히 답해 왔다.

“몇 시간 전에 이 방을 잠깐 들렀다가 또 나갔습니다. 아, 그리고 듣자 하니 어제는 황실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더군요. 그 뒤에는 잠깐 태양궁에 들렀고요.”

“그 야밤에? 책 내용이 뭔지는 알아봤고?”

“본인이 태어났을 당시 일이 알고 싶은 모양이었습니다. 24년 전 기록들을 뒤지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그래……?”

에렌스트 경의 보고를 죽 듣고 이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도 어머니가 누군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아는데 뭔가 더 찾을 게 있나?

‘탑에 대해서인가.’

그럴 수도 있다. 민간이 내는 책에서는 황성 안에 있는 그 기괴한 탑에 대한 언급이 거의 안 된다. 특히나 선황 때는 더 그랬던 것이, 바로 그 대의 황후가 뛰어내린 곳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황실에 대한 적대 행위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황후가 허락한 게 그 도서관 방문에 관한 쪽이었나 보네. 황실 일원의 허락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한 곳이니. 카밀루스는 아마 버니언에게는 거절당할 게 뻔해서 황후에게 청한 것일 테고.”

“그런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별것 아니라 김이 빠질 지경이야.”

중얼거린 이온이 얼마 전 그것 때문에 카밀루스를 수상하게 여겼던 에렌스트 경을 향해 “그렇지?” 하면서 눈치를 주었다. 그에 에렌스트 경이 말없이 샐러드 그릇을 무릎 위로 가져오더니, 야채를 포크로 찍어 내밀었다.

이온이 눈을 살짝 흘기며 받아먹자, 에렌스트 경이 또 다른 용건을 꺼냈다.

“도련님,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응, 말해.”

“카르코 백작이 죽었습니다.”

이온이 입을 다물고 입 안의 음식물을 꿀꺽 넘겼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상당히 불쾌해지긴 했었지만, 바로 어제 만난 인물인 터라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가슴이 술렁였다.

“사인은 뭐래?”

“과음인 것 같다고 그러더군요.”

“……예상했던 바네.”

사인이 과음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말이다.

“상대가 도련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아닐까요?”

에렌스트 경의 걱정 어린 물음에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자신의 정체를 들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불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의미로 양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알렉, 난 길드 개설을 시작할 때부터 언제까지나 뒤에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 언젠가는 밝혀질 거라고 생각했으니, 누군가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아.”

“그럼…….”

“그 사람이 떠벌리느냐 아니냐가 핵심이야. 하지만 조용한 걸 보니 다행히 버니언의 편은 아닌가 보네. 그렇지?”

“예.”

“그럼 아직 시간은 있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의외로 이온이 침착하게 받아들이자 에렌스트 경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온의 말에 충분히 납득한 그는 순순히 알겠다고 답했다.

“그보다 네가 알아봐 줄 게 있는데, 알렉.”

“말씀하십시오.”

“지금 살아 있든 죽었든 상관없으니 대공이 태어났을 때로 추정되는 시기를 전후로 황실이나 당시 황실 시종 혹은 시녀 들의 가문, 아니면 친황실파 가문에서 일하던 산파들이 외부로 움직인 적이 있는지 알아봐.”

뜬금없는 명령이었지만 에렌스트 경은 카밀루스의 어머니를 찾기 위한 청임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기껏해야 가문에 한둘일 테니 알아보기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시기가 오래된 게 걸리긴 하는군요.”

“일단은 알아볼 수 있는 만큼만. 사실 황실 내에서 해결한 게 아니라면, 아주 신뢰하는 가문에게 시키긴 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에렌스트 경이 말을 흐리자 이온이 “응?”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저희 공작가에서도 알아봅니까?”

이 질문에는 이온도 곧바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마침 제 앞에 퀘스트 창이 펼쳐지며 냉정한 현실이 떠올랐다.

[본 퀘스트 완료 시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적의,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호의를 포함하여 불특정 다수의 호의 및 적의가 상승합니다.]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적의.

카밀루스의 생모와 관련된 무언가가 크레이거 가문과 엮였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았다.

이온은 그게 대체 뭘까 싶었고, 제 아버지가 과거에 무슨 짓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두렵기도 하였으나 제 마음 하나 편하자고 모든 것을 묻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직 모르는 진실이 있다면 알고 싶었다.

탑에서의 탈출과 그 과정에서 얻은 저주.

사생아 카밀루스의 존재와 베일에 감싸인 그 어머니.

선황이 가지고 있던 마기가 담긴 물약과 그것을 가져다주었다는 재니스.

카밀루스의 어머니의 정체가 이들을 모두 한 묶음으로 묶어 줄지도 모른다.

“조건에 맞으니 당연히 해야지.”

딱 자른 이온의 대답에 에렌스트 경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 집안에 충성하는 기사로서 그에게는 몹시 불편한 명령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온의 기사이기도 한 그는 기꺼이 명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물러나겠습니다.”

에렌스트 경이 문을 닫고 나갔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혼자 남자, 이온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몸을 늘어뜨렸다.

그러다 눈치를 보고 이불 밖으로 슬쩍 뿔을 내미는 욤뇽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온은 조용히 눈을 깜빡이고 있는 드래곤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쿠키가 먹고 싶어?”

“꾸우…….”

하지만 이번엔 먹는 게 목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좀 지쳐 보이는 이온의 가슴 위로 올라온 욤뇽이가 그에게 찰싹 달라붙자 이온은 녀석을 꼭 안아 주었다.

위로해 주는 듯한 행동에 흐뭇하게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이온이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그런데, 넌 정체가 대체 뭐야?”

“꾸?”

무슨 소리냐는 듯이 욤뇽이가 고개를 갸웃댔다. 하지만 이온은 진짜로 의문스러웠다. 화이트 드래곤이라고는 하는데, 이런 존재가 어디 또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여 이온이 순수한 호기심에 물었다.

“네 엄마 아빠가 있긴 있어?”

그리고 이온은 곧 그게 엄청난 말실수였다는 점을 깨닫고 말았다. 욤뇽이의 커다란 물빛 눈동자 위로 갑자기 눈물이 글썽 차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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